194화
한연맹 소속의 무인들은 핸드폰 대신 통신구를 받았다.
빌리언트가 한연맹의 ‘공장’을 통해 만든 간이 통신구였다.
투명한 유리알 모양에 대고 말을 하는 것에 어색함을 느낄 틈도 없이, 무인들을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 용산구, 검은 피부에 위아래로 솟은 송곳니를 가진 2m 신장의 몬스터 출현. 대응할까요?
[아뇨, 그건 트롤이라는 존재입니다. 일 갑자 미만의 내공을 가지신 분들은 속히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 조원동, 녹색 피부에…… 대략 3m 정도 되는 신장을 가진 몬스터입니다. 특색은 손에 낡은 도끼를 들고 있습니다.
[주의 요망 몬스터입니다. 무인분들은 속히 전장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야구공 모양의 빌리언트가 통신구 앞에서 무인들을 가이드하고 있었다.
인형체의 빌리언트는 시우와 함께 거대 컴퓨터 앞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기판을 조작하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서울 시내가 금방 몬스터 소굴이 될 겁니다.”
“진의 중심은 어디야?”
“남산타워입니다.”
“생명체 반응은?”
“방위 위성의 전파가 진을 둘러싼 막을 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산 내부 cctv는 해킹 가능하지?”
빌리언트는 재빨리 기판을 두드려 cctv화면들을 주르륵 띄우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던 시우가 카메라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화면 안에는 수상한 복장(검은 로브)을 하고 커다란 수정체 앞에서 빙 둘러선 채 손으로 물결치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빌리언트는 곧장 화면을 확대하였고, 흐릿한 화면 속에서 로브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게 검은 장미단 일까요?”
세아의 물음에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시우는 곧장 연구소 밖으로 나섰다.
우빈과 소빈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우빈의 태산과 같은 무거운 중검이 오우거의 무릎을 내려찍자, 강철 기둥처럼 단단해 보였던 오우거의 발이 역으로 꺾이며 오우거는 고통의 괴성을 내질렀다.
크어어어억!
오우거는 분노에 이성을 잃고 우빈을 향해 미친 듯이 도끼를 내리찍었다.
오우거가 도끼를 내려찍을 때마다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던 한연맹 내부의 도로가 갈색 속살을 퍽퍽 드러냈다.
“차앗!”
오우거의 시선이 재빠른 우빈을 따르는 동안, 함께 뛰어올라 초상비를 시전하고 있던 소빈이 곧장 오우거의 목을 갈랐다.
살기 가득한 천살지존검의 일 수였다.
소빈의 검이 지나가고, 오우거의 목이 기괴하게 꺾이면서 피 분수를 뿜었다.
크어어어어엉억!
반쯤 잘려나간 목을 덜렁덜렁 매달고 있는 오우거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괴성을 내뿜으며 광기에 잠겨 사방으로 도끼와 피 분수를 뿌렸다.
[헬 버스터]
후끈한 공기가 한순간 우빈과 소빈을 덮치며, 뒤쪽에서 십여 발의 헬 버스터가 오우거의 전신에 꽂혔다.
퍼퍼퍼퍼퍼퍼퍼퍼펑!
오우거는 조각조각 갈라져 바싹 탄 살점과 뼛가루를 사방으로 튀겼다.
그렇게 상반신이 날아간 뒤에도 넘어진 하반신은 움찔움찔거리며 무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살검으로 다리를 공격하고, 중검으로 목을 내리 쳐. 오우거는 회복력이 트롤 못지않으니까.”
시우의 말에 소빈과 우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화문하고 우빈은 나를 따라. 진의 중추에 적이 있는 것 같아.”
“저도 가겠어요.”
“아니, 한 문주랑 여기 남아줘요.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이대로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돌아와 버리면…….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될 테니까.”
시우의 단호한 말에, 소빈은 더 이상 억지 부리지 않고 물러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다. 서울의 추정 인원만 1,000만 명이다. 단지 소중한 가족을 잃은 것을 넘어 이 정도면 재앙 수준이다.
혼란은 예측할 수 없고, 그 대비책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역사상 이토록 많은 사람의 피해가 있었던 적이 있던가. 적을 막지 못하면 그 끔찍한 상상이 현실로 이뤄질지도 몰랐다.
한쪽에서 숨어 지켜보던 지혜가 시우와 눈이 마주치자 밖으로 나왔다.
“시우야!”
지혜는 시우에게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시우는 지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해 해결하도록 할 거야, 마치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거고, 결국 해낼 거야. 지금은 불안감을 위로하거나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어. 우리에게 1초가 그들에게 몇 년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꼭! 안전한 곳에서 나를 믿고 기다려 알겠지? 그게 지금 네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이야.”
어찌 들으면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들이 많았지만, 시우의 결연한 태도와 말투에 지혜는 마치 전장에 장수를 보내는 아내의 심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서포트는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을 지우게 하는 것이었다.
“알겠어, 꼭 돌아 와야 해.”
“응!”
시우는 곧장 포털을 열었다.
포털 밖으로 남산타워가 흐릿하게 보였다.
“여기가 포털이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야, 들어가는 즉시 남산까지 절대 멈추지마! 낙오되면 버리고 간다. 지금은 동료를 구할 시간조차도 아껴야 하니까. 알겠나?”
“네!”
“가자!”
시우가 가장 먼저 포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우빈과 미화문의 전투원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남산 주변은 이미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한연맹의 무인들이 보기엔 그저 두려운 장면에 불과했지만, 시우에겐 기이하게 느껴졌다.
‘생태를 무시하고 존재한다고?’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도 생태에 따라 달라진다.
무덤지기라고 불리는 가고일은 한낮엔 석상으로 굳어 있다 밤이 되면 돌을 깨고 움직이는 박쥐형 몬스터였다. 하지만 한낮의 태양이 쨍쨍함에도 가고일은 무덤을 지키듯 남산으로 가는 길목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래된 호수가에서 볼 수 있는 뱀형 몬스터 ‘나가’, 저주받은 던전에서 활동하는 ‘베어울프’, 밤 사냥꾼이라 부르는 ‘놀’, 전장에서 죽어간 수백의 시체가 마기를 만나야 발현되는 ‘듀라한’까지. 마치 알게니하 대륙의 몬스터들 올스타가 출동한 것처럼 종류와 생태에 관계없이 다양한 몬스터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이걸 어떻게…….”
엄청난 수의 몬스터에 기가 질려버린 전투원 하나가 나직이 말했다.
다른 전투원들도 말은 내뱉지 못했지만,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헬 파이어]
시우의 양손에 붉은 마법진 두 개가 발현되며, 길을 따라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캬아아악!
끄어엉!
캉! 캉!
쇠마저 녹여 버리는 지옥의 불길에 도로를 꽉 막고 있던 몬스터들이 녹아가고, 그 광경에 정신을 차린 김준상이 버럭 외쳤다.
“뒤쳐지지 마라! 뒤처지면 놓고 간다!”
김준상을 필두로 전투원들이 대형을 맞추어 달리기 시작했다.
시우를 중심으로 정방에 두 팀이 양쪽으로 길을 열고 측면에 두 팀, 후방에 두 팀, 이렇게 총 서른 명의 인원들이 각자 오행진을 형성하며 나아갔다.
“지금이다!”
헬 파이어가 잦아들자 다가오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던 김준상의 외침에 미화문의 전투원들이 일제히 오행륜을 쏟아 내었다.
완전체에 비하며 턱없이 작은 크기였지만, 까마득하게 뭉쳐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밀어내기에는 충분한 숫자였다.
황금빛 륜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며, 몬스터들이 기괴한 고깃덩이로 변했다.
그 모습을 보고 새삼 자신들의 강함에 감동하는 것도 잠시.
펑!
굉음과 함께 전방으로 쏘아졌던 황금색 륜이 폭사하며 산산이 먼지로 변하였다.
황금색 륜을 폭사시킨 건 다름 아닌 전장의 사신 듀라한.
자신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다른 한 손으론 말도 단숨에 잘라 내버릴 듯한 거검을 단검처럼 휘두르는 위압적인 위용에 미화문의 무인들의 발걸음이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타타타타타.
그들의 발걸음이 멈칫거리는 사이 앞으로 나선 것은 우빈이었다.
“태산압천!”
푸른색 환한 검기의 크기는 듀라한이 든 거검 못지않게 컸다.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엄청난 압력을 순식간에 폭사시킨 우빈의 검은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는 거검으로 대응하는 듀라한을 압착기로 짓누르듯 우그러뜨렸다.
뚜득, 우그득.
단단한 강철과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져 나간 썩어가는 몸뚱어리는 우빈의 중검에 순식간에 짓눌려 다른 몬스터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했다.
“제압하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쓰지마! 최대한 흘리고 뒤에 팀에게 맡긴다!”
시우의 손에서 마법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십 개의 마법진은 시우가 가장 애용하는 거인의 손.
옆으로 앞으로 밑으로 위로 등등.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거인의 손은 몬스터들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그들을 밀려 나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모두 길을 뚫는 데 집중해!”
김준상의 외침에 전투원들도 무조건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검을 들고 내려치는 오크 전사의 공격은 정령의 힘으로 흘려보내 버리고, 앞에서 끔찍한 울음을 내뱉으며 날아드는 가고일은 바람의 정령의 힘으로 그 방향을 바꾸어 몬스터들에게로 보내버렸다.
그 사이사이 시우의 버프 마법과 공격마법이 효과적으로 작용한 것은 덤.
그렇게 겨우 남산타워에 도착했다.
남산타워 전망대.
평소라면 관광객들과 커플들, 가족들의 방문으로 많은 수의 인원을 자랑해야 하는 공간은 텅 빈 채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미화문의 전투원들은 타워 내부에 나타난 몬스터들을 사냥하기 위해 아래층에 남았고, 시우와 우빈만이 전망대의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여길 오는 건, 여자친구와 함께라고 생각했는데…….”
흘긋 우빈을 본 시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눈에 잘 새겨둬, 이곳에 오는 게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여자친구가 안 생긴다는 말이야?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해석은 청자의 몫이지.”
“제길……. 둘 다 싫은데.”
전망대 한편,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이방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덟의 인물은 한 개의 수정을 중심으로 마법을 연성하듯 쉴 새 없이 수인과 주문을 외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선 유형화된 마나가 수정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고, 수정의 꼭대기에선 빛이 쏘아져 전망대 천정을 뚫고 들어갔다.
“손님들, 이곳은 코스프레 현장이 아니에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대가 최시우인가?”
시우와 가장 가까이 있던 마법사가 말했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였다.
“나를 애타게 찾았다고 하던데, k―pop 스타 얼굴 보지 않아도 되겠어?”
시우의 손에선 이미 대량의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에너지의 압축에 우빈이 살 떨려 하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걸 부수려 하는가?”
“1,0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걸 내가 두고만 볼 거 같아?”
드드드드드드드드드.
시우의 손안에 모이는 마나의 양이 더욱 많아짐에 따라, 전망대 전체가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시, 시우야.”
“호신강기 펼쳐, 알머스트도 착용하고.”
시우의 말에 우빈은 재깍 알머스트를 착용하고 호신강기까지 펼친 채 두어 걸음 물러섰다.
“지금 이걸 부수면 더 큰 피해가 일어날 거네.”
“그래? 시험해 보지 뭐.”
시우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자,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점점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우리가 정체도 모르는 자네를 왜 찾았다고 생각하나!”
“요즘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이잖아?”
“무슨! 우린 우리가 원해서 그댈 찾은 게 아니네!”
“그럼? 댁들이 원하지 않았는데, 댁들이 나를 찾았다는 말이야?”
“바로 그거네!”
“……? 내 영어가 이상했나?”
“아니, 자네 영어는 정확해!”
“그럼 그건 무슨 소리지?”
“우린 그저 하나의 결계에 지나지 않아. 이 결계는 서울을 봉쇄함과 동시에 외부로부터 추가적인 피해를 막는 역할도 하고 있어. 우리가 당한다면 피해는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번져 가게 될 거야.”
“그게 무슨 개 소리지?”
“지금 통로 연 것은 우리가 아니라는 말이네.”
“그럼?”
“우릴 지배하는 존재…… 우릴 조종하는…… 는…… 는…… 는…… 조종하는…… 하는…… 하는…….”
마법사는 마치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머리를 덜덜 떨더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두 눈은 흰자로 변하고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럼에도 그의 두 손은 계속 움직이며 수인을 맺고 있어 기괴한 모습을 연출했다.
“인형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마법사의 입에서 종전과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훨씬 더 가늘고 미색이 부드러우며 공손함이 물씬 묻어나는……. 어디선가 들어봤던 그런 목소리.
시우의 손안에서 팽창하던 마나의 압력이 서서히 낮아졌다.
그리고 시우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낮게 깔렸다.
“살아 있었나?”
“절 기억하고 계셨군요.”
“어디냐?”
“이곳에 흔적을 남겨 두었습니다. 전 한국 지리가 익숙지 않아서 잘 모르겠군요.”
시우는 아직 다 소멸하지 않은 손안의 마나를 전망대의 창문을 향해 던졌다.
챙챙챙챙챙.
거대한 압력을 한꺼번에 받은 듯 전망대의 창문들이 모두 깨졌다.
시우는 곧장 창문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시우야! 나는!”
“여기 있어! 내가 신호를 주면 저 수정구를 날려 버려.”
시우는 우빈의 대답을 듣지 않고, 전망대 아래로 낙하하다 날개를 펼쳐 새처럼 날아갔다.
익숙하다 해야 할까.
익숙하지 않다 해야 할까.
시우에게 잊을 수 없는 곳이었지만, 그 몇 년 사이에 골목의 풍경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몇 년째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던 고물 자전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도시가스가 들어오면서 LPG 가스통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여전히 외진 골목에는 불량배들이 자주 놀러 오는지, 바닥엔 구겨진 담뱃갑과 꽁초들이 널려 있었다.
한 때는 시우에게 지옥 같은 곳이었고, 한 때는 시우의 귀한의 기념비적인 장소였던 곳.
금방이라도 싸구려 염색에 터질 듯 줄여 입은 교복을 입은 양아치들이 나올 것 같은 불온한 기운이 가득한 골목에, 이곳의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미남자가 서 있었다.
시우의 한쪽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역시 네놈이었구나. 류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최시우 님.”
냉막한 표정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미남자. 그의 입가에 뭍 여성들의 눈길이 절로 돌아갈 법한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