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타이탄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시우는 가볍게 손짓하였고, 타이탄은 공간을 찢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전장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한연맹의 무인들도, 살아남은 병사들도 다들 지친 듯 자리에 앉거나 모래 위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아직 상공에는 이카루스의 날개가 떠 있었고, 전장 일부에 그늘을 만들어주었기에 쉬는 자들은 그늘을 굳이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51area에서 캐시와 책임자로 보이는 이들이 수갑에 구속 된 채 미화문의 전투원들에 의해 끌려 나왔다. 포로들의 모습을 보던 이들은 깜짝 놀랐다. 포로 중에 존의 모습과 똑같은 안드로이드 인형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우는 먼저 캐시에게 말했다.
“어떻게 처리 해야 할까? 참고로 야토가미는 그 뿌리를 남겨 두지 않았는데.”
캐시는 대답 대신 존의 잔해와 골렘을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겠습니다. 한국이 제안하는 모든 제안을 수용하겠으니,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아, 나도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은 원치 않아. 하지만 단단히 각오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의 희생은 값이 비싸니까.”
시우의 차가운 말에도 캐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존이 죽은 이상 그녀에게 미국 상계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세계 최강의 힘을 가졌던 것과는 반대로 미국 상계는 절대적인 일인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영원불변의 힘을 가진 존이었기에 그에 대응할 만한 세력도 없었고, 죽지 않았기에 후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건 언제나 존의 강함 뿐이었고, 그것이 곧 미국 상계의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죽은 지금, 미국 상계는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남은 것은 그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시설 뿐.
“좋아, 한 문주는 한연맹의 대표로 51area와 협상을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한세아가 고개를 숙인 후, 51area의 사람들을 이끌고 51area의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존의 모습을 한 인형만이 남아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시우와 존의 인형에 집중했다.
존의 인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은 존이 처음에 나타났을 때 대경하며 검을 뽑고 달려 나가려던 이도 있었다.
더구나 존은 수갑을 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언제 시우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다행히 한연맹을 방문했던 존의 인형에 대해 아는 이들이 동료를 말렸고, 작은 소란은 그렇게 끝났다.
“그건 뭐야?”
시우는 마치 아는 사람을 대하듯 말했다.
“기지 안에 제가 쓸 만한 물건이 이것밖에 없더군요.”
“얼굴이라도 좀 바꾸고 나오던가.”
“전 썩 나쁘지 않습니다. 어쨌든 계약상 주인으로 모셨던 분이니까요.”
“그래도 좀 어지간히 해도 되지 않았냐? 뭐 이렇게 전력을 다해 덤벼?”
“마나의 계약에 의한 종속이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서운함을 느끼실 분이 저를 존에게 넘기신 겁니까?”
존의 인형을 조종하는 건 다름 아닌 빌리언트였다.
시우는 빌리언트의 말에 멈칫 거렸다.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제가 계약의 맹점을 찾아 타이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알았어! 미안하다!”
“언젠가 이 댓가는 반드시 받겠습니다.”
“너 근데 평소와 좀 다르다?”
에고 소드 시절부터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빌리언트]였지만, 그동안 빌리언트가 인간적인 언사를 행한적은 없었다.
에고 마법의 특성상 인간과의 구분을 짓기 위해 에고의 존재들은 특유의 기계적 언사를 유지하게 되는 데, 그 때문인지 사고의 확장도 그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물론 이성적 감정을 넘어서지 않는 형태로 고정되어 있었고, 이는 곧 에고를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의 빌리언트는 에고 자체로서의 존재라기보다 형상을 따르는 인간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었다.
“존의 인형 내부에 감정에 대한 서포트 프로그램이 존재합니다. 아마도 영혼체로서 인형을 조작할 때 좀 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면을 강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데, 그게 영향을 준 거 같습니다.”
“……괜찮네. 계속 그렇게 생활 해보는 건 어때?”
“마스터가 원하신다면.”
“본체 이동 준비는 끝났어?”
“이 인형 안에 모두 옮겼습니다. 존의 인형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잘했다. 세아를 도와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줘.”
빌리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얼굴 좀 빨리 어떻게 하고, 재수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뭐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십니다.”
“괜찮아.”
빌리언트는 존의 인형을 통해 시우의 몸을 스캔하고 그의 몸 상태를 파악했다. 그의 몸은 생각보다 위중한 상태였다.
“신체 기능이 30% 미만까지 떨어졌습니다.”
“드래곤 하트의 부작용이야. 타이탄을 매개체로 썼다 해도,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니까.”
“당장 회복부터 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아냐.”
시우는 전장을 돌며 시체 수습과 환자들 치료를 도왔다. 이미 마법의 후유증으로 인해 직접적인 치료 마법은 쓰지 못했지만, 포션 등을 건네며 환자들을 독려했다.
단순한 시우의 행동만으로도 무인들에게 조금은 자극이 되는 모양이었다.
지쳐서 퍼지기보다는 스스로 움직여 수습을 돕는 이들이 조금씩 많아지고 있었다.
대충 전장을 수습한 시우가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던 지혜에게 다가갔다.
“늦었지?”
“괜찮아?”
시우의 미안한 표정에도 지혜는 시우를 먼저 생각했다.
그 마음을 아는 시우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응.”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조금 무리해서 그래.”
“고생했어.”
지혜가 시우의 품에 파고들었다.
시우는 지혜의 온기가 차가웠던 자신의 몸을 조금씩 데워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우의 어깨에 얼굴을 댄 지혜가 그대로 물었다.
“시우 넌…… 계속 이 세계에 살아가야 하는 거지?”
지혜의 음성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지혜는 시우와 자신이 얼마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시우를 따르고 있는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응…….”
시우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어쩐지 그녀의 질문과 자신의 대답이 한 가지 답을 구하기 위한 공식 같은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답은 결코 즐겁거나 유쾌한 답이 아닐 것이라.
“그럼 함께할 수 없는 거야?”
함께 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관계는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할 것이다.
“아냐…… 함께할 수 있어. 앞으로도 계속.”
시우의 말에 지혜가 몸을 일으켜 시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 때문에 생긴 이마의 흉터, 치열한 전투로 인해 온몸에 묻은 핏자국, 하얗게 파리한 안색과, 무엇보다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씁쓸한 표정까지. 그가 입에서 내뱉은 말보다 그가 보여주는 행동이 그의 진심을 더 잘 보여주었다.
지혜는 입술을 물며 말했다.
“그럼 나도 가르쳐줘.”
“뭘?”
“마법!”
“뭐?”
“마법 말이야. 얍! 하고 불이 나가고, 물이 나가고 하는 거.”
“…….”
“내 어렸을 적 꿈이 호그와트에 가는 거였다는 거 얘기 안 했나?”
“…….”
“그럼 우리 헤어지지 않아도 되잖아.”
“……흐흐흐.”
시우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기 싫은 거야? 이 핑계로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야?”
“하하하, 아니, 호그와트에 들어가고 싶다는 이야기 때문에 거긴 영국에 있고, 지금 입학하기엔 너무 나이를 많이 먹지 않았어?”
지혜가 양 볼에 잔뜩 바람을 불어 넣고 말했다.
“됐어…… 가르쳐 주기 싫음 싫다고 얘기해. 소빈 언니한테 얘기해서 장풍이라도 배울 테니까.”
장풍이라는 말에 시우가 꺼억꺼억 웃음을 터트렸다.
가뜩이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마당에 남은 기운을 쓰며 웃으려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냐, 가르쳐 줄게, 넌 몸 쓰는 것보단 머리 쓰는 게 더 어울려.”
“……앞으론 다 얘기해줘. 상황 때문에 비밀 때문에 멀어지고 싶지 않아.”
지혜가 다시금 시우에게 기대며 말했다.
한참 웃은 시우도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알았어.”
그리고 그렇게 시우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어어!”
지혜가 깜짝 놀라자 빌리언트가 재빨리 달려와 시우를 부축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조금 무리하신 거 같습니다.”
“괜찮은 거예요?”
“일단은 지켜봐야겠군요.”
빌리언트는 시우를 51area 기지 안으로 옮겼다.
한연맹과 51area의 종전 합의는 수월하게 이뤄졌다.
51area의 항복 선언에 미국 전역에 퍼져 있던 상계의 세력과 인물들이 반발하였고, 51area 내부에서도 한연맹을 치겠다는 인원들이 속출했다.
대부분의 인원은 캐시 수준에서 막을 수 있었지만, 어디에서나 그렇듯 자신의 실력에 과한 자신감이 있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삼일 만에 깨어난 시우는 자신에게 도전한 이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은 채 단숨에 목숨을 빼앗았고, 그런 시우의 신위에 질린 이들은 자신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51area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먼저 51area를 비롯한 미국 상계는 한국 상계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당초 전쟁을 시작한 것이 미국이었고, 전쟁에 패한 이상 그들에게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다음으로 기존 51area는 해체함과 동시에 미국 상계 관리 기구인 peace keeper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향후 pk는 자국 상계의 보호를 위한 것 이상의 무력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고, 무기와 기술 개발도 한연맹과 합의하에 진행하기로 약조했다.
더불어 그동안 51area가 모은 자료와 시설물(위성과 마나 저장소)등을 전리품으로 챙긴 것은 덤이었다.
메인룸에서 51area 측의 협상을 맡았던 캐시의 안색은 파리한 상태였다.
협상을 위해 며칠간 잠도 자지 못하고 일에만 매진했던 그녀의 몰골은 썩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존의 죽음이었지만, 그녀는 존의 죽음을 잊기 위해서라도 더욱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에 반해 한연맹 측의 협상 담당자인 한세아는 길게 휴식을 취한 사람처럼 뽀송함을 잃지 않았다.
중간에 앉아 협상을 지켜보는 시우는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람의 상태에 작게 놀랐다.
“왜 영국 상계에 대한 자료가 업데이트되어 있지 않은 거죠? 혹시 일부러 빼놓은 건가요?”
촉촉하게 물광이 나는 것 같은 얼굴로 세아가 말했고, 다크서클이 깊게 박힌 캐시가 답했다.
“작년부터 영국 내부의 상계들이 하나둘 연락이 끊기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일부러 업데이트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영국 왕실 마법 협회의 자료가 끊긴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데요. 미국이 가만히 있었을 리도 없잖아요?”
“물론 저희 측에서도 계속 조사를 해왔어요. 하지만 작년부터는…… 다른 큰일 때문에 더 이상 신경 쓸 여력이 없었어요.”
“다른 큰일이요?”
“……한연맹…….”
캐시의 말에 한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자료가 없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닌가요? 51area 입장에선?”
“재작년부터 시작해 영국 상계에서 계속 사건이 있었어요. 작은 마법사 길드부터 시작해 연금술 협회와 주술 협회까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거든요.”
“사라졌다고요?”
“네. 말 그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어요. 마지막에 영국왕실 마법협회까지 사라졌을 때는 저희도 조금 멘붕이었고요.”
“그때까지도 미국에서 모르고 있었다고요?”
“아뇨,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시우 님에게 이목이 집중된 상황이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시우 님의 일을 해결하면 영국 상계의 상황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캐시는 머뭇거리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시우는 가만히 캐시를 기다렸다.
“사실 영국 상계에 이변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영국 상계에서 최시우 님의 이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어요.”
“…….”
한세아가 최시우를 바라봤다.
시우는 여전히 캐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영국 상계의 어떤 세력이 최시우 님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어요.”
캐시의 말에 한세아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시우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