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검은 창들은 집요했다.
마치 있지도 않은 부모의 원수를 만난 것처럼 맹렬하고 집요하게 날아가 키메라의 사지를 꿰뚫었다.
처음에 공포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키메라들도 어느샌가 주춤주춤 두려워하는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엑!
그것을 시작으로 한 키메라가 비명을 지르듯 울부짖자, 다른 키메라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른 키메라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에엑!
뒤이어 울음을 내뱉은 키메라가 한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끝없는 모래 언덕이 펼쳐진 사막이 있는 곳이었다.
키메라들은 더 이상 누군가를 공격할 의사 자체를 버린 듯, 미친 듯이 사막 쪽으로 달렸다.
사지가 마신의 창에 박혀 꼼짝 못 하는 골렘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 키메라가 공포를 느낀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타이탄에 탑승한 시우는 마법진을 조정했다.
키메라들을 하계에 풀어 놓을 생각은 없었다.
저 끝없는 사막을 지나면 언젠가 인간의 마을과 도시가 나온다. 키메라들은 그곳을 기점으로 끝없는 증식을 통해 결국 이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넣을 악의 씨앗임이 분명했다.
타이탄의 가슴에 박힌 붉은 보석이 더 환한 빛을 내뿜었다.
촤르르르르르.
빛에 동조하듯, 하늘에 만들어진 마법진 또한 빛을 발산했다. 마법진에서 쏟아져 나오는 검은 창의 숫자는 두 배나 늘어났다.
새까맣게 하늘을 칠한 검은 창들이 키메라들을 덮쳤다. 키메라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검은 창들은 키메라를 다 덮는 것으로도 모자라 모래만이 가득한 사막을 검게 칠했다.
세상을 뒤덮는 검은 창의 물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키메라는 단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끝났다…….”
한 무인이 나직이 외쳤다.
더 이상 움직이는 키메라 따위는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얼음 결정으로 분한 시체 조각만이 사막에 가득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엄청난 숫자를 보고 두려움 가득했던 무인들은, 초월적인 능력으로 키메라를 압도해버린 상황에 환호했다.
전쟁은 끝난 것이다.
한연맹의 무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장면을 목도했던 51area의 병사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한연맹의 무인들은 적을 제압하세요.”
한세아의 말에 무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51area의 측은 전차를 버리고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고, 공중을 지원하던 비행체들은 저마다 방향을 바꾸어 사방으로 갈라졌다.
한연맹의 무인들은 그들을 놓칠세라 물러났던 방향의 반대로 달려가 51area의 병사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무고한 살생은 금합니다. 하지만 저항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마세요!”
한세아는 일부러 영어로 말했다.
“하,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51area의 병사들은 하나 같이 무기를 버리고 양손을 들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고한 살생은 자제하라!”
“무고한 살생은 자제하라!”
한연맹의 무인들은 스스로를 단속하듯 명령을 사방으로 전달했다.
이런 와중에 무의미하게 저항하여 불필요한 피를 흘리는 병사들은 없었다.
타이탄의 기체가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골렘은 아직도 제자리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타이탄의 머리가 열리며 시우의 모습이 드러났다.
“감상이 어때?”
― 잘 봤다! 역시나 그대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존재다.
“이제야 제대로 평가해주니 고맙네.”
시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존은 그런 시우의 태도에 불안감을 느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 그대가 원하는 바대로 평화조약을 맺도록 하자.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그대와 한국을 상계이사국으로 인정하겠다. 대우는 미국과 동등한 위치다.
“호오…… 꽤 괜찮은 조건인데?”
― 이제 세계는 그대와 우리가 함께 경영하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힘을 합친다면 이 세계뿐 아니라, 그대가 겪은 세계 또한 우리의 손 안에 들어올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시우가 한세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격의 늑대에 몸을 싣고 전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까지도 저희를 죽이려 했던 자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는 군.”
― 이봐! 제대로 생각해라. 이 세계에는 언제나 커다란 위기가 오곤 했다. 하계와 상계를 분리하고, 상계보다 몇십 배나 커다란 규모의 하계를 온전하게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우리 같은 상계의 거대 세력이 존재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 마저 없다면 혼란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 혼란이란 건 방금 저의 키메라와 같은 건가?”
― …….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계의 희생을 당연시했던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을 수 없군.”
― 이봐! 우린 마법사다. 새로운 법칙을 연구하고, 이 세상에 법칙을 적용시키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던가!
“차라리 목숨을 구걸했다면 다시 생각해 봤을 텐데.”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거대한 마법진의 모양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이전의 불온한 기운을 가득 품고 있던 검은 마법진이었다.
― 이런 머저리 같은! 제대로 생각해! 너 혼자선 아무것도 해 낼 수 없다!
“누가 혼잔데? 이 많은 동료들이 보이지 않나?”
마법진에서 마신의 창이 슬쩍 머리를 들어 냈다.
거대한 크기의 마신의 창은 그렇게 크고 거대한 자태를 모두 내보인 뒤 지성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 크아아아아!
골렘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존은 골렘의 머리 부분에서 나가려는 듯 해치를 열고 안간힘을 썼지만 마신의 창격에 부품들이 뒤틀렸는지 탈출이 쉽지 않았다.
쾌애애애액
공기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마신의 창이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 안돼!!!!
빠르게 떨어지던 마신의 창이 골렘의 머리 부분에 내리 꽂혔다.
쾅!
작은 단발마와 함께 골렘은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지축을 흔드는 충격음에 다시 한번 정적이 감돌고, 승리를 확신한 무인들이 저마다 환호를 내뱉었다.
“와아아아아아!”
“이겼다!!!”
사방에서 승리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최일선에서 싸우던 우빈은 더 이상 꼼짝 하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 벌러덩 누웠다.
그 옆으로 소빈이 가지런히 앉아 숨을 골랐다.
“휴…… 이제 싸움이라면 지긋지긋해…….”
“수고 많았어.”
소빈의 말에 우빈이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매우 지쳐 보였음에도 완전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우빈은 이런 상황에서도 절제된 행동을 하는 소빈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힘들어?”
“힘들지.”
“그래도 아직 싸울 힘이 남아 있나봐?”
“어떤 싸움이냐에 따라 다르지.”
소빈의 시선이 지혜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우빈은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았다.
‘아…….’
진즉부터 누나가 시우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애초에 누나가 누굴 사귀건 마음에 두건 그건 우빈이 참견할 바도 아니었고, 또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시우나 소빈이나 두 사람 다 자신이 존중해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설사 시우가 누나를 좋아해서 두 사람이 사귄다 해도, 우빈이 시우에게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불편함을 느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우에겐 애인이 있고, 소빈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시우를 따랐다. 그게 사랑의 감정인지 동료애로서의 감정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녀의 감정이 점점 시우에게 깊어져 가는 것은 눈에 띄게 알 수 있었다.
“지혜 누나, 어떤 사람인 거 같아?”
“……여리지만 강하고, 똑 부러지지만 착한 사람.”
“저 복도 많은 새끼…….”
“맹주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시우는 의리를 지킬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남자애들이 또래에 하는 그런 사랑은 아닌 거 같아.”
“알아……. 잘 알고 있어.”
“누나가 부디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대신 때려주기엔 저 새끼가 너무 강하거든.”
“푸흡.”
“저희 이제 나가도 될 거 같네요.”
“…….”
기다렸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인간의 상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그 존재는 기존의 사고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부수고 재정립해야 한다.
지혜는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새로운 것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혜 님?”
“네? 네.”
정신을 차린 지혜를 보며 제갈청룡이 웃었다.
“저희 나가도 될 거 같습니다.”
“아아…… 그, 그런가요?”
“네, 방을 열겠습니다.”
“괘, 괜찮나요? 다 정리 된 뒤에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 까요? 이때 괜히 나가면 방해만 되진 않을지.”
사려 깊은 사람이다.
인간은 모두 같은 기관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모습은 천차만별이듯 성격 또한 그렇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성격 중에 상대를 배려하면서 불편하지 않게 하는 성격은 흔하지 않았다.
제갈청룡은 지혜가 그런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 안에 있을 때도, 지혜는 제갈청룡의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몇 번이나 봤다. 그럼에도 과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이 제갈청룡을 편하게 해 주었다. 그런 배려를 받자니 제갈청룡 또한 그녀를 위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위험한 상황은 다 지나갔으니까요 ……어라?”
제갈청룡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무슨 일 있나요?”
“그게, 방이…….”
제갈청룡이 당황하자 지혜도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그때 방안으로 기계음이 들려왔다.
― 잠깐 기다리고 있어.
“스승님?”
전투가 끝났음에도 시우가 타이탄에서 내리지 않자, 세아가 시우에게 다가왔다.
“맹주님. 더 하실 일이 있으신 건가요?”
― 크흐흐, 노란머리가 잔머리를 좀 쓴 모양이야.
“네?”
― 이런 녀석은 처음이라 재밌는데.
“그게 무슨.”
타이탄이 손을 뻗자 하늘의 마법진이 색깔과 문양을 바꾸었다. 이번엔 붉은 색의 복잡한 모양이었다.
[인피티니 웹]
마법진에서 마나의 거미줄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51area의 병사는 물론이고, 한연맹의 무인들까지 달라붙는 거미줄에 몸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특이한 것은 한세아는 물론이고 그녀가 소환한 전격의 늑대 조차도 거미줄이 몸에 붙자 꼼짝하지 못하고 끼잉― 소리만 냈다는 것이다.
“맹주님. 이게 무슨.”
― 저기.
타이탄이 가리키는 곳은 지혜와 제갈청룡이 있는 방 쪽이었다.
방 아래에선 작은 도마뱀으로 보이는 형체가 거미줄에 걸린 채 버둥거렸다.
도마뱀은 무형의 기운에 끌려 타이탄 앞까지 날아갔다.
“이게 무슨.”
한세아의 질문에도 타이탄은 도마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교활하기 그지없네. 이런 식으로 도망가려 하다니.
도마뱀의 형체가 뒤바뀌더니 키메라처럼 변했다. 하지만 작은 형태인 건 그대로였다.
― 어떻게 안 거냐!
― 골렘을 제압했을 때. 시간이 그렇게 남았는데도 도망치지 않길래 뭔가 속셈이 있겠다 싶었지. 아니나 다를까. 뜬금없이 야토가미의 술을 쓰기에 네놈이구나 했다. 크하하하하― 빌어먹을!! 개 같은 새끼!
― 크하하하하 네놈은 개도 못되고 마는구나!
타이탄이 단숨에 도마뱀을 짓이겼다.
도마뱀은 작은 단발마도 내뱉지 못하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