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시우는 지혜를 마주 보며 말했다.
“나 믿지?”
“……응.”
지혜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널 안전하게 돌려 보내 줄게.”
“……같이 가는 거지?”
“응.”
지혜는 시우의 품에 안기고 싶은 것을 꾸욱 참았다.
“청룡.”
“네!”
“이 사람에게 티끌만 한 상처도 나지 않게 보호해라.”
“네? ……어, 저는 전투에 참여 하는 게…….”
“임무를 완수하면 스승님이라는 호칭을 허락하겠다.”
“네!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소빈도 나섰다.
“저도 함께 있을게요. 어차피 대인전에만 특화된 제 힘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시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은 사막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자신이 알고 있던 제갈가의 ‘진법’과 ‘야토가미의 술’ 그리고 시우의 ‘마법’을 이용한 새로운 진이었다.
“그럼 가동하겠습니다.”
제갈청룡의 말과 동함께 세 사람의 주위로 반투명한 막으로 된 방이 생겨났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 사막의 뜨거운 날씨는 사라지고, 청량감이 느껴지는 바람이 불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제갈청룡은 방 안에 생성된 의자에 두 사람을 안내했다.
“아니에요. 그냥 서서 볼게요.”
결연한 전투를 하던 도중에 안락함을 추구하는 게 죄책감이라도 드는지 지혜는 고개를 저었다. 소빈도 제갈청룡과 눈을 마주치며 지혜에게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는 사라지고, 세 사람이 자리한 방은 지면으로부터 서서히 떠올랐다.
세 사람의 시선은 격렬한 전투가 진행되는 투명한 막 밖으로 고정되었다.
시우의 양손에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가볍게 휘두른 손짓에 검은 불꽃은 곡사포처럼 허공을 유영하며 날아 각각 전차와 헬기에 직격 했다.
쾅! 쾅!
마법 한 방에 단단했던 전차와 헬기가 고철이 되어 버리고, 시우의 복귀를 알아차린 한연맹의 무인들은 기세등등한 기합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시우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와서 돌아가고 싶다는 어리석은 이들은 없겠지?”
“없습니다!”
“예정에 없던 일이 생겼을 뿐이다. 예정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었을 뿐이고. 언제고 맞닥뜨렸어야 할 상대다. 오늘 밀린 숙제를 한다고 생각해라.”
“알겠습니다!”
“이제 이 세계의 최강이 될 시간이다. 가라. 저들에게 우리의 각오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줘라.”
[다크스킨]
[스트롱 업]
[스위프트 임펄스]
[널브 엑셀러레이션]
[헤이스트]
삼백에 가까운 인원들의 몸이 밝게 빛났다. 대단위 버프 마법에 지쳐가던 무인들은 다시금 기력을 되찾고 51area의 병사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쾅! 쾅! 퍼퍼펑!
곳곳에서 마법병사들의 신체가 부서졌다. 한연맹 무인들 중에 더러는 검강으로 전차와 헬기를 베어내는 이들도 있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는 무인들의 뒤에서 시우는 혼자 지원부대 역할을 다 하듯 시의적절한 광역 마법으로 51area의 병사들을 휩쓸어 버리고 있었다.
결국, 중앙이 뚫려 버린 51area의 진영은 산개하여 한연맹의 무인들을 포위하려 했다.
마법공학으로 빠른 기동력을 확보하고 있는 마법병사는 단단한 방어력으로 무인들을 몰아붙이며 사방에서 빠르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연맹 측은 생각보다 큰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이 또한 무수히 많은 시나리오와 경험으로 이미 겪은 바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화문은 앞으로 나서라!”
김준상의 외침에, 정령을 대동하고 무인을 서포트하던 전투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무인들 또한 그들의 길을 열어주는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오행진]
[오행륜]
화. 토. 금. 수. 목.
다섯 가지의 조화에 맞춘 60명의 인원이 한 개의 진이 되어 정령의 힘을 끌어모은다.
주변의 마나까지 흡수한 거대한 톱니바퀴같이 생긴 륜은 황금처럼 밝게 빛나며 51area 기지로 쏘아졌다.
쿵쿵. 쿠콰콰콰콰―!
마법병사는 물론이고, 전차와 방호벽까지 모두 쓸어 버린 오행륜이 곧장 기지 안으로 들어가 51area에 큰 피해를 주려 할 때였다.
끼이이약―!
기지 안에서 거대한 도마뱀의 울음과 함께 바실리스크가 나타나 오행륜을 입에 물어 버렸다.
콰콰콰콰콰―!
끼이이이약―!
모든 것을 소멸하며 나아가던 오행륜은 점점 사그라들며 사라졌고, 오행륜을 받아 냈던 바질리스크는 입에서 살점과 초록색 핏물을 토해내며 서서히 죽어갔다.
“거기까지입니다.”
기지 안에서 캐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실리스크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엔 그리폰, 드레이크, 와이번 수십 마리가 떠 있었다. 거기에 기지 내부 어디에 그런 공간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듀라한, 오우거, 사이클롭스, 트롤, 리자드맨까지. 판타지 속에서도 중상급 이상의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지요. 최시우 씨만 남는다면 다른 분들은 모두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피식 웃으며 시우가 앞으로 나설 때, 한연맹의 무인들이 하나둘 된 소리를 내뱉었다.
“저 여자가 뭐라는 거야?”
“우리 맹주님만 남고 다 꺼지라는 데?”
“저런! 미친년(?)이 있나!”
“무슨 개 헛소리야!”
“필요 없어! 다 죽여버려!”
“와아아아아아!”
한연맹의 무인들은 시우의 말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새로이 나타난 몬스터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는데?”
시우가 캐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결국 피해를 키우는군요.”
“누구 피해가 더 클지는 모르는 거지.”
“존이 10분 안에 도착할 거예요.”
“10분 안에 51area가 사라지면 존이 많이 열 받을까?”
“당신은 자신의 실력을 너무 과신하고 있어요.”
“과신인지 확신인지 보고 판단하라고.”
[소환][다크 나이트][데스 나이트]
일백에 가까운 검은 기사들이 바닥에서 일제히 일어나 몬스터들에게 돌격했다.
검기와 검강을 줄기줄기 내뿜는 기사들의 기세는 순식간에 몬스터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하지만 캐시는 검은 기사들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단순한 숫자는 무의미할 뿐이에요.”
[소환][몬스터 유니버스]
공간이 움찔거리며 찢어지기 시작했다.
찢어진 공간 사이로 온통 검붉은 조명의 세상이 드러나고, 지구의 환한 햇살을 받은 몬스터들은 불을 쫓는 불나방처럼 공간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쿠아아아악!
끝도 없는 몬스터의 행렬에 수적으로 밀린 한연맹이 뒤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른 사람이네.”
[무인의 시간]
시우의 손이 워프 마법진을 만들던 드래곤 하트로 향했다.
무형의 기운에 이끌린 드래곤 하트가 시우의 머리 위에 자리 잡고는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밝게 빛나는 드래곤 하트는 자신의 마나를 기로 바꾸어 무인들에게 직접 쏘아내었다.
거대 몬스터를 상대로 싸우느라 검기와 검강을 남발하던 무인들은 단전에 내공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 두려움 없이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었다.
[매스 힐링]
붉은빛을 발하는 드래곤 하트는 시우의 다음 마법에 더욱 강한 빛을 내뿜고, 상처 입은 무인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트롤의 손톱에 팔을 감싸던 갑옷이 날아가며 깊은 상처를 입었던 무인은 자신의 팔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후의 초식을 트롤에게 쏟아 내었다.
어지간한 검기로 상처도 나지 않던 트롤의 몸이 여섯 조각으로 분리되어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다.
오우거도, 사이클롭스도 마찬가지였다.
팽팽하던 양쪽의 진영은 한명맹이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모양새로 바뀌기 시작했고, 한연맹은 그 기세에 힘입어 뒷걸음질 없이 오직 전진만을 계속하였다.
마치 청소기가 지나간 곳에 먼지가 남아 있지 않듯, 한연맹의 진영이 지나간 곳에 더 이상 서 있는 생명체는 없었다.
캐시는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차라리 쉬운 상대였다면 더 좋았을 것을.”
캐시의 시선은 이미 51area 상공에 도착해 있는 이카루스의 날개로 향했다.
거대한 원판형태의 비행체가 다다르자, 일대는 뜨거운 햇빛이 사라지고 거대한 그늘이 생길 지경이었다.
원판 테두리 전체에 사출구가 생성되며, 마법병사를 끝도 없이 뿜어내었다.
그리고 원판의 중심에서 존이 파란빛을 타고 내려왔다.
“늦었네?”
시우가 능청을 떨며 말했다.
“재미있었어, 지난 과거 동안 나를 이렇게 농락한 인간은 네가 처음이거든.”
“그 정도의 시련도 없었다니, 그동안 그 오랜 시간을 무슨 재미로 살아온 거야?”
“시간의 제약을 초월한다는 건, 순간의 감정에 대해서도 초연해진다는 거지.”
“그런 거 치곤 조금 화가 많이 나 보이는데?”
시우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존을 보며 키득거렸고, 그 모습을 본 존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만큼 네가 큰 잘못을 했다는 거지.”
“아! 네 심기를 건드린 게 그렇게 큰 잘못이다?”
“넌, 이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고, 균형을 깨트렸다. 그 죄는 단지 죽음으로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인간은 본래 자신을 억제하는 것으로부터 극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야. 그 본능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죄라면, 가장 큰 죄인은 바로 너겠지.”
“너의 근원은 어디지? 어디서도 너의 근원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이 세상 사람이 맞기는 한가?”
“나의 근원은 지옥, 난 운명과 신에게 버림받은 자식이었다.”
“그런가? 태생부터 우리와는 공생할 수 없는 관계였군.”
“그건 너희 머릿속에 뿌리박힌 아집 때문이지. 공생할 수 없는 관계란 건 없어.”
“그건 틀린 말이야. 태초부터, 서로 간의 공생할 수 없는 존재들은 분명히 있어 왔다. 생태의 변화가 파충류의 시대를 종말시켰고, 인간의 진화가 지구의 생태를 변화시켰지.”
“역시 침입자의 후손다운 발언이군. 아니 침입자 그 자체인가? 여기서 개척 시대에 얼마나 많은 이를 죽였는지 물으면 미국 예절에 어긋나나?”
“S.O.B라는 욕을 들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한 질문이군.”
“말장난은 그만하지. 51area의 피해가 점점 더 커지니까.”
시우의 말에 존이 피식 웃었다. 정말 말로는 상대하기 벅찬 상대다.
51area 일대를 가리고 있던 이카루스의 날개가 서서히 움직였다.
다시금 지상엔 그늘 대신 환한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리고 존과 시우의 사이로 작은 점이 생겨났다.
작은 점은 점점 커져 그림자로 변했고, 종국에는 다시금 커다란 그늘을 만들기 충분했다.
시우가 놀라 외쳤다.
“모두 피해! 그 고철이 떨어진다!”
시우의 말에 무인들이 피해를 감수하고 몸을 날렸다.
하늘에는 태양을 가리고 나타난 거체가 지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쿵!
굉음과 함께 모래의 쓰나미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한연맹 무인은 물론이고, 51area의 마법병사, 마법전단, 51area의 기지까지 모두 모래로 덮어버렸다.
모래 쓰나미에 덮힌 인원들이 필사적으로 동료의 손을 잡고 모래 더미에서 끄집어내고 있었다.
쿵, 쿵, 쿵.
모래 쓰나미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체가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렸다.
― 굳이 꺼내는 수고를 하지 마라. 이곳이 곧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시우 앞에 섰던 존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고, 골렘은 존의 어투 그대로 말을 하고 있었다.
부악!
골렘의 팔에서 화염 브레스가 쏟아졌다.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모래더미들이 뜨거운 불길에 단단한 결정을 변해버릴 지경이었다.
[콜드 스톰]
시우의 몸이 떠올랐다. 그는 하늘을 구름으로 가득 감싸고 네바다에서 볼 수 없는 하얀 눈을 내리게 했다.
본래 살을 애일 듯 차갑게 내려 상대를 얼어붙게 만드는 마법은 골렘의 마법과 격돌하여 사람이 딱 좋게 활동할 수 있는 온도까지 올라와 무인들에게 시원함을 선사했다.
― 그따위 임시방편으로 뭘 할 수 있지?
골렘의 왼손이 하늘을 가리키자, 파란 브레스가 터져 나와 구름들을 소멸시켰다.
“단지 시간을 끌기 위해서야.”
― 크하하하! 이곳에 다시 운석이라도 떨굴 생각인가?
“그건 안 되지, 우리 식구들이 몇인데. 대신에 다른 걸 좀 준비해 놨거든.”
― …….
시우의 말과 함께 51area 기지가 덜커덕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골렘과 캐시가 고개를 돌려 기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이 이곳에 있는 한 기지를 변형시킬 만큼 중대한 명령을 내릴 사람은 없었다.
“전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았어요.”
캐시가 고개를 저었다.
“아! 내가 지시했어! 내가!”
골렘이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마치 초등학교 저학년이 선생님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듯 손을 쭉 뻗으며 아장아장 뛰었다.
― 네가 지시했다고?
“어, 잘 봐.”
기지의 변형 형태는 대장갑 병기를 사출해 낼 때 쓰는 형태였다.
하지만 대장갑 병기 자체가 생산도 되지 않을뿐더러, 51area 안에서도 운용되는 부대가 없기에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지금 운용되는 부대 또한 중장갑 병기 사출구로 충분이 오갈 수 있기에 대장갑 병기 사출구는 더욱이 쓸 일이 없을 터였다.
쉬이이이익!
그런 대장갑 사출구에서 로켓이 분사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로 치솟는 한 줄기의 검은빛.
아니 환한 빛을 뿜어내는 검은 기체.
아득한 하늘까지 치솟았던 검은 기체는 소닉붐을 일으키며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펑, 퍼퍼펑.
쿵!
바닥에 내려앉은 검은 기체.
골렘에 비하면 4분의 1도 되지 않는 크기였지만, 역동적인 디자인과 단단해 보이는 외갑의 형태. 골렘처럼 단순한 형태가 아닌 다양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관절까지. 환상적인 모양의 거대 기체에 한연맹의 사람들도 51area의 사람들도 넋을 잃을 정도였다.
검은 기체는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 위와 투구 부분을 열어 시우를 맞이했다.
시우는 붕 몸을 뛰어 검은 기체 안으로 들어갔고, 검은 기체는 기다렸다는 듯 가슴과 투구를 닫았다.
존의 골렘이 이를 가듯 으르렁거렸다.
― 그것은 뭐지?
골렘과 마찬가지로 검은 기체에서도 커다란 기계음이 시우의 어투와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 대(對) 마신(魔神) 병기(兵器) 타이탄(TITAN).
타이탄의 등장에 혼란했던 전쟁터가 일순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