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시우는 소빈과 세아가 필사의 각오로 상대했던 라파엘을 가볍게 제압했다. 그런 그가 라파엘 따위완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적을 앞에 둔 것처럼 주춤거리며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내가 좀 늦었지?”
소빈과 세아는 그 질문이 자신들의 것이 아님을 알고 슬쩍 옆으로 물러나 주었다.
소빈의 얼굴엔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났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이 상황은 뭐고? 너…… 너…….”
지혜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운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시우는 천천히 기다려 주었다.
“……너 정말 마…… 하아. 마법사야?”
시우는 머쓱한지 손톱으로 볼을 긁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대’ 마법사야, 그냥 마법사라고 하기엔 실력이 너무 좋거든.”
“너어…… 진짜…….”
“미안해 너에게 이런 일 다시는 겪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또 이렇게 되버렸네.”
“……왜, 얘기 안 한 거야?”
“믿기도 힘들고, 또 상계랑 하계는 완전히 분리된 세계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하하.”
지혜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웃음을 내뱉고도 지혜는 스스로 놀랐다.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공포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덜그럭 쿵.
라파엘이 파묻혔던 콘크리트 더미가 들썩였다.
“미안, 자세한 이야기는 밖에 나가서 하도록 하자.”
시우는 곧장 라파엘에게로 걸어갔다.
“싸우러 왔으면, 곧장 내게 올 일이지 민간인을 인질로 잡어?”
시우가 왼손이 한 번 휘둘러지자 라파엘을 덮고 있던 콘크리트가 종잇장처럼 날아갔고, 휘두른 손으로 허공을 쥐자 라파엘의 몸이 붕 떠올랐다.
“커억.”
“절대선을 표방하는 이들이 이따위 짓이라니, 스스로가 부끄럽지도 않더냐?”
“단 하나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크윽.”
라파엘은 어떻게든 무형의 기를 벗어나려 발버둥 쳐 보았지만, 그의 몸은 마치 꽁꽁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 했다.
“저기다! 침입자가 저기 있다!”
뒤에서 51area의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대열을 갖춘 병사들은 곧장 들고 섰던 소총의 조정간을 자동으로 맞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타타탕―!
총열이 불을 뿜으며 수백 개의 총알을 발사했다.
시우의 손에서 만들어진 마법진이 배리어를 펼쳤다. 하지만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는 총알인지 그중에 몇 개가 배리어를 뚫고 그대로 시우에게 직격했다.
꿀렁.
그러자 시우의 코트가 그림자처럼 변환하여 남은 총알들을 모두 삼켰다.
[헬 버스터]
시우가 소환한 헬 버스터가 병사들에게 날아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재로 변하고, 복도는 화염으로 가득 찼다. 그 사이로 총알과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쯧, 귀찮게.”
시우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는 공격이었지만, 지혜를 비롯한 세 사람에겐 그렇지 않다.
시우는 뒤편으로 마법 몇 개를 더 뿌린 뒤 라파엘을 바라봤다.
“루체 시국에서 네 몸에 장난을 쳤구나.”
“……이건, 악을 멸하기 위한 악…… 네놈과 같은 것으로 보지 마라.”
마녀사냥이 있은 뒤로 7천사의 자리는 언제나 악의 승계와 함께 이뤄졌다.
악의 소멸을 위한 필요악이 바로 그의 존재 이유였다.
“뭐, 네놈을 개종시키러 이곳에 온 건 아니니까.”
어깨를 으쓱 한 시우는 루체 시국에서 성당인들에게 시전했던 마법을 라파엘에게 쏘았다.
처음에 극심한 고통을 예상하고 이를 물던 라파엘은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음에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동시에 자신을 제압하고 있던 무형의 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곧장 검을 들어 시우에게 달려가려 했다.
기이하게도 시우에게 풀려 난 이후부터 에너지가 샘 솟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신체는 물론, 사방의 모든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열리면서 시우가 얼마나 대단한 적인가를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력인가!’
하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에는 이제껏 자신이 느껴보지 못했던 힘이 폭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르르르.
“―?”
기이한 일이었다. 아무리 숨이 차다고 한들, 자신의 입에서 짐승과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게 매우 낯설고 불쾌했다.
“마기를 제한하던 성력을 제거했으니,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 거다. 살고 싶으면 몸 안의 마기를 억누르거나, 너의 신에게 기도나 해봐.”
그렇게 말하며 복도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시우.
라파엘의 이성은 분명 그를 따라가라 했으나, 그의 눈과 발은 불길 너머로 달려드는 51area의 병사들에게 향했다.
“라, 라파엘 님!”
한 병사가 라파엘을 알아보고 그를 멈춰 세우려 했지만 라파엘의 동작이 더욱 빨랐다.
“크아아악!”
대동맥이 지나가는 목덜미를 한 움큼이나 물린 병사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죽었다.
동시에 사람 키만 한 대검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체 무엇이든 썰어버리고 있었다.
“쏴! 쏴! 천사가 미쳤다! 쏴버려!”
총열이 휘어질 만큼 수없이 많은 총탄이 복도를 가득 메웠지만, 라파엘은 멈출 줄 몰랐다.
아직 그의 몸에는 조금의 성력이 남아 있는지, 상처가 생길 때마다 저절로 수복되고 있었다.
“여긴 시끄러우니까. 일단 나가자.”
시우의 말에 지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우는 말없이 지혜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혜는 머뭇거리며 손을 뻗지 못했다.
“너에게 말하지 못한 건, 상계란 하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부분이 있기 때문이야. 내가 처음에 마법사라고 한 말을 믿을 수 없었지?”
“…….”
“아마 앞으로 보고 느끼는 것 모두가 그럴 거야. 하룻밤만 지나도 어제의 일이 현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 이해 가지 않을걸?”
“……난, 난.”
사방에 사람들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와 더불어 총열이 불을 뿜는 소리, 살점을 꿰뚫고 잘라내는 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지혜를 혼란스럽게 했다.
시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상계에 대한 일 외에 내가 너에게 솔직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어?”
“어―?”
시우의 말에 지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시우의 손이 지혜에게 더욱 다가갔다.
지혜는 무심결에 시우의 손을 잡았고, 네 사람의 몸은 번쩍 빛을 낸 후에 복도에서 사라졌다.
* * *
몇 달 전 캐시는 소개받은 남자 앞에서 욕지기를 했고, 그 때문에 남자가 떠나버렸던 일이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캐시는 남자가 마음에 들었었다는 점일 거다.
“저런 미친……!”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욕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캐시였으나, 그녀는 현재 다짐이 무색할 만큼 FXXX이 들어간 단어를 찰지게 남발하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검은 새 새끼는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모니터 안에선 라파엘이 이성을 잃은 듯 51area의 병사들을 척살하며 다니고 있었고, 동료가 죽어 나가는 꼴을 못 보는 아메리칸 전우애를 가진 병사들은 자기들이 마치 람보라도 된 양 가망 없는 상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연구원으로 있는 마법사가 말했다.
“최시우를 만난 후에 저렇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가 정신계통의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천사는 성인(聖人) 그 자체야. 정신계통의 마법을 거는 것보다 필로폰을 가져다 꽂는 게 쟤들을 미치게 하는 데 더 효율적일걸.”
“……그, 그럼 필로폰을 준비하라고 할까요?”
마법사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캐시가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51area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하계의 과학자들보다 더 폐쇄적인 생활을 한다. 51area에서 분기마다 파티를 열고 소속 인원들을 강제로 참석시키는 파티를 꾸준히 여는 것은 저렇게 사회적인 뇌가 제대로 자라지 않은 놈들을 개화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파티의 텀이 너무 길었나 보다.
“시발 지금 나랑 장난해? 아이언 나이트 준비시키고, 오리엔탈 부대에 비상 때려, 가서 그냥 영혼을 바로 뽑아 버리라고 해!”
“……하, 하지만 라파엘은 루체 시국에서 가장 중요한…….”
“Fxxk 저 새 새끼 제압 부대 지원 나가고 싶어?”
캐시의 말에 마법사는 무전으로도 가능한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메인룸을 신속하게 빠져나갔다.
캐시가 그렇게 도망치는 마법사의 목에 바람의 칼날을 던져 버릴까 말까 고민을 할 때, 패널이 켜지며 존의 얼굴이 나타났다.
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무기질적으로 보였다.
― 현 상황은?
“한연맹의 무인들이 외부에서 들어오고 있고, ‘잠자는 미녀’는 탈취 당했습니다.”
― 퇴로는 확보한 상태겠지?
존의 물음에 캐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언제나 긍정보단 부정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전통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 킥, 이제 겨우 공간을 접는 수준에 있는 우리가 최강국이라니. 키키킥.
존의 웃음소리에 메인룸의 요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가장 화가 많이 났을 때 저런 괴상한 모습이 나오곤 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어요.”
캐시가 절박하게 말했다. 존이 저런 상태가 되어 버리면 당최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다.
2차 세계 대전에 관심도 없던 존이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진주만 습격을 받고 그 이후 전 세계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일본 상계의 지배자인 야토가미가 소멸 직전까지 갔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그건 의미가 없어. 결국 놈은 살아남을 테니까.
“그래도, 그에게 심리적 타격은 줄 수 있어요.”
― 내가 겨우 그놈 신경을 건드리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여?
존의 무감각한 어투에 캐시의 입이 얼어 버렸다.
― 빌리언트, 놈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일부 지역에 한해서 가능합니다.]
― 어디까지 가능하지?
[51area 중심으로 네바다 절반 정도에 워프 스파이더를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주요 시설물 접근 명령과 군사 위성 사용 명령이…….]
― 허락한다.
“…….”
존의 폭주에 캐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어떤 불똥이 자신에게까지 튈지 알 수 없었다.
[군사 위성 접속. 접근 권한을 격상합니다. 접근 격상 완료. 위성과 주요 시설물을 이용한 워프 스파이더를 펼칩니다. 카운트 3, 2, 1. 워프 스파이더가 작동합니다.]
캐시는 묵묵하게 빌리언트가 일을 해내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 골렘을 준비시켜.
“골렘도 빌리언트에게 운용하게 하실 건가요?”
캐시의 어투가 날카로웠다.
― 아니, 내가 직접 한다.
* * *
지상으로 나온 네 사람은 네바다의 뜨거운 햇살을 맞닥드려야 했다.
지혜는 갑작스런 햇살에 눈이 부신 듯 눈을 감았고, 시우는 그런 지혜를 위해 아공간에서 선글라스를 하나 건네주었다.
“이것도 마법으로 만든 거야?”
“그건 직접 산 거야. 보관하는 건 마법으로 했지만.”
“…….”
네 사람의 시야에 51area의 전투 부대와 싸우고 있는 한연맹의 사람들이 보였다.
51area 기지 안에선 탱크와 헬기 등 중장비까지 나와 있었고, 한연맹의 무인들은 대부분 검기를 뽑아 중장비와 싸우고 있었다.
지혜의 시선엔 그 모든 것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온몸을 갑옷으로 덮은 인원이 피칠갑을 한 채 다가오자 놀란 지혜가 시우의 뒤로 섰고, 갑옷을 입은 이는 투구 부분의 갑옷을 벗므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누나. 고생 많으셨어요.”
“너…… 너…… 너도…… 마법사였니?”
우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전 마법사는 아니라, 도…… 도 닦는 도인이라 해야 하나…….”
“도인이라 하기엔 속세를 너무 좋아하지 않냐?”
“하하하, 전 검사예요. 검사. 이건 너무 판타지스러우니까. 무사라고 하면 되겠네요. 무협지에 나오는 무사.”
피유우우웅!
공기를 가르는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시우가 있는 곳으로 떨어지려 했다.
시우가 손을 뻗자 마법진이 생성되며 허공에 강철의 배리어를 만들었다.
쾅!
고막이 터질 듯 거대한 폭음과 함께 하늘을 감쌀 듯 불꽃이 허공을 수놓았다.
“중장비에 무슨 마법을 범벅을 한 건지. 진입을 못 하고 있어. 빨리 지워해 줘.”
우빈의 말에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지혜도 구했고, 이제 돌아갈 거야. 제갈청룡은 어딨어?”
우빈이 가리키는 곳엔 제갈청룡이 사막을 종이 삼아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완성했어?”
마법진을 보며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제갈청룡을 보며 물었다.
“스승님, 제가 뭘 놓친 거죠? 이미 완성을 했는데, 구동이 안 되고 있어요.”
제갈청룡은 거대한 마법진의 중앙에 놓인 드래곤 하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붉은색 결정의 모양을 하고 있는 드래곤 하트는 마나의 정수이자 마법사들에게 있어선 왕국과도 바꾸지 않을 보물이었다.
특히나 인간이 쓸 수 없는 한계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드래곤 하트를 대체할 만한 것이 없었다.
시우는 당초 지혜를 구하는 것과 한연맹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네바다 사막에 떨어진 순간부터 제갈청룡에게 마법진을 만들라고 명령했었다.
“놓친 거 없어.”
“네?”
시우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일행들의 시선도 시우를 따라 하늘로 향했다.
“이미 우리를 잡기 위한 그물이 펼쳐진 모양이야.”
시우의 시선 끝에, 구름을 가르며 날아오는 타원형의 물체가 보였다.
지혜를 제외한 안력이 일반인의 몇 배 수준인 무인들 또한 그 타원형의 물체를 보고 있었다.
“그가 결국 제시간을 맞췄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