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어떻게 된 것이냐?”
존은 항모의 선장을 결박하고 있는 끈과 천을 손짓으로 소멸시키고 물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보이는 존의 분노에 선장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급하게 대답했다.
“바, 방금 전까지도 여기 있었습니다.”
오딘 함대는 시우에 대항해 결사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루체 시국을 박살 내던 거대한 악마들이 순식간에 항모에 떨어져 시설과 요원들을 짓이겼고, 뒤이어 갑옷을 입은 수백의 무인들이 기민한 움직임으로 항모 전체와 맞붙었다.
오딘 함대의 선장은 그 시간 동안 무전으로 보고를 멈추지 않았기에 존은 오딘 함대의 피해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비행체가 보이자마자…….”
뒷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뻔하다.
애당초 시우가 루체 시국까지 워프로 이동했다는 것을 간과한 스스로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실수를 인정하기엔 분노가 너무 컸다.
“으아아악!”
이토록 분노가 인 것은 2세기 만이다.
존의 가슴 속에 가득 자리한 분노가 기어코 머리까지 치솟았다.
51area 안의 요원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이카루스의 날개’까지 출격한 이상 전면전은 피할 수 없었다.
단순히 상대가 항복한다 해서 끝나는 전쟁이 아니다.
이 일을 일으킨 원흉을 찾아, 그와 그에 관계되는 모든 이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끝나는 전쟁이다.
‘이카루스의 날개’는 최후의 병기.
그것이 출격했음에도 불구하고 51area는 후방 지원을 위해 자신들이 보유한 오버테크놀로지 기술로 만들어진 병기들의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 너무 넓네요. 찾을 수 있을까요?
―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51area의 커다란 복도 천장에는 융화 기능을 갖춘 알머스트를 착용한 소빈과 세아가 각각 벽호공과 자기장을 이용해 천정에 붙어 있었다.
― 아까 그 사람 천사 맞죠?
― 한연맹에서 봤던 사람들이랑 동류인 거 같아요.
― 그쪽으로 가 볼까요?
전음을 받은 세아는 말없이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 잠깐만 기다려 보실래요?
― 방법이 있나요?
― 정령을 보내 볼까 하고요.
― 괜찮을까요? 여기도 자체적으로 마법 보안이 되어 있을 텐데.
한국 상계에 전에 없던 새로운 연맹이 창설 된 뒤, 한연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으로부터 빈번한 사이버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때마다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건 시우와 빌리언트의 뛰어난 감지 시스템과 방화벽 덕분이었다.
일반적인 사이버 공격과는 달리 마나 네트를 타고 들어오는 사이버 공격은 무인들의 입장에선 별세계 이야기였다. 그래서 소빈은 사이버 공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연맹이 만들었던 것들을 생각하면 세계 최강국이라는 51area에 침입자를 감지하는 시스템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 지금으로선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거 같아요. 맹주님이 주신 탐지기는 작동도 안 하고.
― 그럼 일단 퇴로를 확보할게요. 어차피 곧 있으면 한연맹 본대가 들이닥칠 거예요. 그 전에 목표물을 확보하지 않으면 저희 작전도 실패로 돌아갈 테니까요.
― 네.
세아는 자신의 정령을 아주 작게 소환하여 51area 안에 펼쳐진 전류에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최대한 시스템과 연결되지 않는 전류를 통한 검색이었다.
커다란 정령을 수백 조각으로 나누어 천천히 51area를 훑는 세아의 얼굴에 땀방울이 가득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 찾았어요.
― 다행이네요. 경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걸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봐야겠죠?
― 운이 좋았어요.
두 사람은 한참을 내려가서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문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벽은 기계식 장치를 복잡하게 달고 있었으며 육중한 무게를 자랑했다.
아무래도 문 옆에 설치된 작은 패널과 버튼들이 문을 여는 장치인 것 같았다.
이곳까지 내려온 뒤엔 인적도 드물어져 두 사람은 조금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 이것도 열 수 있을까요?
― ……정령이 자긴 기계치라고 이야기하는데요?
― 스파이 노릇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소빈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본격적으로 은신술을 익힌 적은 없었다. 하지만 천살지존검의 성취가 올라가면서 다방면으로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고 그에 따라 잠행과 은신에도 자신이 붙었다.
하지만 실전에선 단순히 잘 숨는 것 만이 대수가 아니란 걸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 기다릴까요?
― 너무 늦어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녀가 보기에 소빈은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직하게 머리가 좋다고 할까? 잔머리를 쓰거나 상황을 응용하는 모습은 소빈과 어울리지 않았다.
세아는 그런 그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소빈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 행동을 했다.
“어, 어! 소빈 씨!”
세아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소빈은 주먹에 태백기를 가득 품고 패널을 냅다 때려 버린 것이었다.
퍽!
세아가 말릴 틈도 없이 소빈의 손에 패널이 완전히 박살 나고, 소빈의 주먹은 벽 안으로 움푹 파고들었다.
“…….”
얼빠진 세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소빈을 바라봤다.
“기계들은 보통 망가지면 제 기능을 상실하지 않나요? 가둬놓는 기능이었으니까. 아마도…….”
“아니, 그렇다고…….”
볼멘소리를 하려던 세아가 옆에서 기압이 빠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벽처럼 단단했던 문이 양옆으로 조금 벌어진 것이었다.
“헐…….”
“거봐요. 제 말이 맞죠?”
소빈은 힘으로 문을 마저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지혜는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침대에서 한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끼긱거리는 기계 마찰음과 함께 억지로 문이 열리고 검은색의 특이한 슈트를 입은 여성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덜덜덜.
지혜는 미남자인 라파엘이 들어올 때보다 두 여성이 들어올 때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의 손은 자연스레 사라진 반지가 끼워져 있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으로 향했다.
반지가 없어진 손가락을 만진 그녀는 마치 마음의 위안을 주고 공포감을 사라지게 해 주었던 단단한 뒷배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
지혜는 아무 말 없이 방안에 들어온 두 사람을 바라봤다.
“지혜야.”
그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검을 든 여성이 지혜에게 다가왔다.
“…….”
지혜는 공포감을 보이지 않으려 매서운 눈초리로 여성을 바라봤다.
“아, 참. 이걸 계속 쓰고 있었네.”
여성이 목 부위를 잠시 만졌더니 얼굴을 덮고 있던 얇은 철판들이 차례로 벗겨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소빈……언니?”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잘 지냈냐니…… 언니가 여긴 어떻게? 그것보다 그 복장은…….”
“할 얘기가 많은데, 지금은 차근하게 이야기하기 좀 그렇고. 어때요?”
소빈이 세아에게 묻자, 세아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방탄유리에다 특수 가공까지 한 제품이에요. 벌써 몇 번이나 열로 녹여 보려 했는데, 열을 다른 곳으로 빼내는 기능까지 있나 봐요.”
“흐음. 지혜야 이쪽으로 물러나 볼래?”
소빈이 한쪽을 가리키자, 지혜는 소빈의 말대로 움직였다.
“언니, 어떻게 하려고…….”
지혜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소빈은 발도 자세를 취한 뒤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공동 전체의 공기가 무거워진 것처럼 자욱한 기운이 가득 차올랐다. 지혜는 점점 숨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언니…….”
지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빈의 검이 뽑히며 번개같이 움직였다.
스르릉.
검이 검집으로 돌아가고 뒤이어 유리막이 부들부들 떨렸다.
뻥!
유리막의 중간엔 사람 하나가 겨우 오갈 크기의 구멍이 생겼다.
“여기로 나올 수 있겠어? 이게 한계거든.”
소빈의 말에 지혜는 답하지 못하고 얼이 빠져 있었다.
자신보다 가녀린 소빈이 검 하나로 두께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유리막을 잘라낸 것이다.
“어, 어떻게…… 언니 정체가 대체 뭐예요?”
“일단 대화는 나중에……!”
지혜가 유리막에서 나오자 세 사람은 곧장 공동 밖으로 움직였다.
“……!”
“―!”
하지만 탈출은 성공하지 못 했다.
공동을 나가는 입구에서 라파엘이 복도에 등을 대고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51area도 이제 끝났나 보군. 쥐새끼들을 허용하다니.”
한세아가 앞으로 나섰다.
“한연맹이 뛰어난 거란 생각은 하지 않나 보군요?”
“아류(亞流)는 언제나 한계가 있는 법이지.”
소빈이 엄지손가락을 밀어 발검을 준비했다.
“한연맹은 더 이상 아류가 아니예요―!”
캬옹!
세아의 손에서 황소만 한 크기의 전격의 늑대가 쏘아져 나갔다.
쐐애액!
동시에 뽑힌 소빈의 검이 허공에 붉은 궤적을 남겼다.
“어리석다.”
라파엘이 양손을 크로스하여 두 기운을 막았다.
“크로차네라croce nera(검은 십자가).”
라파엘의 손 앞에 단단한 두께의 검은 십자가가 생성되며, 전격의 늑대와 천살지존검을 막아냈다.
쾅!
파괴력이 어찌나 강력한지, 복도를 이루던 콘크리트들이 터져나가며 흙먼지를 만들어 냈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라파엘은 두 팔을 반대로 교차하며 검은 십자가를 반대로 돌렸다.
“크로츠 인베스croce inversa(역십자).”
검은 십자가는 음울한 기운을 풍기더니 곧장 세 사람에게 검은 기운을 쏟아 내었다.
소빈은 본능적으로 지혜를 안았고, 세아는 전(電) 속성의 배리어를 만들었다.
쾅!
라파엘은 고작 두세 걸음 밀려났지만, 세 사람은 공동의 입구까지 날아갔다.
지혜 대신 충격을 완화한 소빈은 바닥에 쓰러지며 기침과 함께 핏물을 뱉었다. 내상의 증거였다.
“괘, 괜찮아요? 언니?”
일상생활에서도 그다지 피를 볼 일이 없던 지혜에게 소빈의 상태는 극히 위중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소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지혜를 자신의 뒤로 세웠다.
세아는 라파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마기에 알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루체 시국에서 왜 천사에게 마기를 허용한 거죠?”
검은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순간 느꼈다. 피부를 타고 들어오는 따끔함, 온몸을 감싸는 무겁고 음울한 기운, 이것은 시우가 쓰는 마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양에 이독제독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그보단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거 같은데요?”
“그대들은 모른다. 우리 루체 시국이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해왔는지.”
소빈이 입가의 핏물을 닦으며 말했다.
“루체 시국은 이미 끝났어요. 이런 행동은 그저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밖에 주지 못해요.”
“알고 있다. 이미 루체 시국이 끝났다는 것은.”
“그렇다면 이런 행위가 당신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한 줌의 악을 소멸하기 위해서라도 네 모든 것을 바쳐라.’, 내가 천사가 되었을 때 받은 신탁이었다.”
소빈이 꿀꺽 침을 삼켰다.
기존의 천사들도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마기까지 사용하는 라파엘은 차원이 달랐다.
“끝까지 하겠다는 말이군요.”
“너희 또한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저 아이야, 민간인으로서 악마의 유혹에 저항하지 못했을 뿐이지만, 너희는 스스로 악마의 하수인을 자처했으니 너희 또한 악이다.”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지혜는 살려 주겠다는 말에 소빈과 세아는 내심 안도했다. 어찌 되든 자신들이 맡은 임무는 완수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저희도 맘 놓고 싸워야겠네요.”
세아의 말에 소빈도 한 손에 쥐고 있던 검집을 놓아 버렸다.
고개를 끄덕인 라파엘의 몸이 슬쩍 바닥에서 떠올랐다.
[천사 강림]
[7번째 소멸의 천사]
주위의 기운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던 산소가 무겁게 느껴지고, 사방에서 목을 죄는 듯한 압박감까지 느껴진다.
단순히 지혜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세아의 양손에선 연신 스파크가 튀고, 소빈의 검 주위론 붉은색 기류가 수증기처럼 피어올랐다.
세 사람이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려는 그때.
쿵!
커다란 충격음이 51area 전체에 울렸다.
또다시 혜성이 떨어졌음인가?
아니다, 그 정도의 충격은 아니다.
라파엘이 애써 충격음을 무시하고 다시금 몸을 날리려는 그때 쿵! 쿵!
연속된 충격음이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쿵! 쿵! 쾅!
종국엔 복도 천정이 무너지고, 자욱한 먼지와 함께 한 인형이 나타났다.
라파엘의 역십자가가 다시금 생성되며 다크 브레스를 인형에게 쏘아 내었다.
“크로츠 인베스croce inversa(역십자).”
엄청난 파괴력의 브레스가 쏘아져 나갔지만, 브레스는 마치 안개 속에 흡수된 듯 아무런 파괴음도 생성하지 못했다.
대신, 라파엘이 쏘아 낸 것보다 더욱 진한 브레스가 쏟아져 나오며 라파엘을 덮치고 그를 수 미터나 날려 보냈다.
쾅!
방어할 새도 없이 브레스에 맞은 라파엘이 복도에 부딪히며 먼지 속의 인형을 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먼지 속을 걸어 나오는 인형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저벅, 저벅, 저벅.
“뭐야, 이 잡기는? 이따위 걸 마기라고 쏘아내는 거냐?”
먼지를 가로지르며 나타난 인물.
그건 다름 아닌 최시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