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꽤 넓은 공동 안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공동 크기에 비해 월등히 적은 양의 빛.
그나마 이 방안을 가시적으로 구분 지을 수 있게 하는 건, 공동 중앙에 놓인 원통형의 또 다른 유리방이었다.
유리방 안엔 간소한 집기만이 놓여 있었다.
침대 하나, 탁자에 놓인 물병 하나.
침대엔 여성이 누워 있었는데, 은은한 불빛에 비추어 주는 모습이 꼭 그려 놓은 듯 아름다웠다.
“으음…….”
유리방의 빛이 너무 강했던 걸까. 여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났나?”
잠에서 깬 여성, 그러니까 지혜는 낯선 음성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자신이 난생처음 보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누, 누구세요? 여긴 어디죠?”
“일단 진정하고 물 한잔 마시지 그래? 아마 목이 탈 텐데.”
안 그래도 여성은 목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거기다 몸은 며칠간 혹사를 당한 사람처럼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밀려 왔다.
“으윽.”
“괜찮나?”
여성은 고개를 휙 돌려 유리 밖의 미남자를 바라보았다.
“당신, 그때 그 이상한 외국인…….”
“이거 참…… 여성들이 나를 지칭할 때 잘 쓰지 않는 단어가 ‘이상한’인데.”
“대체 무슨 목적이죠? 설마…….”
여성은 파리한 안색으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난 그런 파렴치한이 아니야.”
“사람을 납치해 놓고 파렴치한이 아니라고요!”
여성의 날 선 시선이 미남자에게 향했다.
미남자는 머쓱한지 손가락으로 볼을 긁을 뿐이었다.
“일단 진정하고 이야기하지.”
“…….”
“그 반지, 어디서 난 거지?”
“남자 친구가 준 거예요.”
“남자 친구? 최시우가 남자 친구인가?”
“……그쪽 정체가 뭐죠?”
“그 반지가 뭔지는 알고 차고 있는 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반지가 반지지…….”
“확실히 하계인간인가…….”
“하계?”
“네가 자고 있는 동안 반지를 빼 내보려 했지만, 빠지지 않더군.”
지혜는 자신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가 넣어보았다.
“안 빠진다고요?”
“역시…….”
“이봐요! 뭐가 역시란 거죠?”
“최시우의 정체를 알고 있나?”
“잘 알죠. 그쪽 나한테 이런 짓 한 거 알면, 시우가 가만 안 둘 거예요. 위험해지기 전에 어서 풀어줘요.”
미남자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그는 마법사다. 알고 있나?”
“에……?”
지혜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저기요……? 혹시 정신병 같은 거 가지고 있어요?”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악질인 흑마법사. 과거 유럽 인구의 절반의 목숨을 빼앗은 적도 있었다. 우리 루체 시국은 그들을 박멸하기 위해 4세기에 달하는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지.”
“……혹시…….”
“……뭔가 알고 있나?”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녜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런? 중2병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건 아니죠?”
지혜는 한쪽 팔에 깁스를 한 것처럼 고정하고 한쪽 눈을 가리며 말했다.
“믿지 않는군.”
“아니…… 믿을 리가 없잖아요. 그럼 해리포터 장르가 판타지가 아니라 다큐멘터리고 반지의 제왕은 역사서겠네요?”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과는 엄연히 다르지. 조앤은 그녀의 소설의 표현에 따라 머글일 뿐이고.”
“……미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라고 이야기했더니, 환상을 현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지혜는 자신이 진짜 미친 사람과 한 공간에 있다는 생각에 도리어 자신을 감금하고 있는 유리막이 자신을 보호해준다 느꼈다.
“최시우의 반지는 조금씩 너를 좀 먹고 있었다. 네 영혼에 침식하여 마기로 물들이고 끝내는 너를 악마의 하수인으로 만들려 했겠지.”
“…….”
“아직도 믿지 않는가?”
지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보여주지.”
[천사 강림]
[7번째 소멸의 천사]
미남자의 등에서 여섯 장의 날개가 솟아 나왔다. 그의 가슴과 어깨에는 검은빛의 육중한 갑옷이 생겨났고, 그의 잘생긴 얼굴은 뿔이 달린 투구로 가려졌다.
“흐에에엑!”
지혜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미남자의 모습이 천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평소에 지혜가 상상하던 성스럽고 아름다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섯 개의 날개는 흰색과 검은색이 번갈아 입혀져 있고, 손에는 거무튀튀한 대검을 들고 있다.
성스러운 한편, 무서운 투기도 느껴졌다.
그의 모습은 변명할 바 없는 천사의 모습이 분명했다.
― 이게 진짜 ‘현실’이다. 넌 악마에게 유혹당한 타락한 영혼이다.
지혜는 부들부들 떨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도 없었다.
― 걱정 마라. 너를 해하기 위함이 아닌 너를 구원하기 위해 너를 이리로 데려온 것이다.
“……구, 구원?”
― 그래. 그 반지를 다오. 그것은 너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지혜는 무심결에 반지에 손을 대었다.
처음 시우를 만나고, 시우와 지내면서 시우에게 빠져들었다. 모든 상황에서 시우가 자신을 유혹한 기억 따위는 없었다. 언제나 자신이 먼저 시우에게 다가갔을 뿐.
그렇다면 그것 또한 시우가 벌인 작전이었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반지를 빼려던 지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것은 인간으로서 지독한 이기심에 의한 것이었다.
트라우마로 고통에 몸부림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일상 생활을 할 수 없었을 때 시우가 옆에 있는 동안은 그녀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안락함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지혜는 호감과 사랑이라는 핑계로 일방적으로 접근했고, 시우는 결국 그것을 받아주었다.
스무 살의 어리고 이기적인 자신의 섣부른 행동에도 더 어린 시우는 그것을 감내했다.
그것 또한 계산된 바였을까?
“시, 싫어요.”
― 뭐?
뿔 달린 투구가 갸우뚱 움직였다.
“제가 직접 시우에게 이야기를 듣고 그때 뺄게요.”
― 어리석구나. 너의 그 미련이 결국 너를 좀먹다 타락시킬 것이다.
“미련을 갖겠다는 게 아니예요. 제가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거예요.”
이상하게도 두려운 상황임에도 생각보다 공포스럽지 않았다. 말을 하면서도 지혜는 스스로 놀라는 중이었다.
― 눈앞의 진실을 보고도 눈 돌리는 것이 바로 미련이다.
라파엘이 손을 들자 지혜의 손이 번쩍 하는 빛을 내며 라파엘에게로 향했다.
지혜가 급하게 주먹을 쥐고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당신 천사 아니예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렇게 억압해도 되는 건가요!”
― 타락하는 이는 언제나 스스로 원한다고 생각한다.
“거짓말……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아요! 시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면서!”
― ……역시나 안 되겠구나. 조금 아플 것이다.
라파엘의 손에서 뻗어 나온 빛무리가 유리막을 지나 지혜의 몸에 닿았다. 지혜는 미증유의 힘에 얽매여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빛무리가 지혜의 몸에 스며든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친 것처럼 온몸의 신경들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으아아아아악-!”
지혜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몸 곳곳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지혜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고 흐르는 눈물에는 핏물이 섞였다.
스르륵.
옴짝달싹하지 않던 반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지혜는 끝까지 반지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 지독하구나.
라파엘은 더 많은 성력을 쏟아부었고, 그럴수록 지혜의 비명은 커져 갔다.
툭, 핑그르르.
손에서 반지가 빠져나오자, 지혜의 몸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널브러졌다.
반지는 스르륵 떠올라, 배식 구멍을 통해 라파엘의 손에 들어갔다.
― 너무 걱정 말아라. 악마를 처리한 후에 너를 집으로 데려다줄 테니.
라파엘은 그렇게 공동을 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지혜는 온몸을 스쳐 지나간 고통보다. 반지가 빠지는 게 더 무서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니 고통을 느끼면서도 이겨내리라 다짐했던 단단한 마음가짐은 반지가 빠진 후에 모래로 만든 성이 부서진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혜는 공포감에 몸을 더욱 움츠리며 두 눈을 감았다.
“시우야…….”
* * *
중력을 타고 낙하하는 존의 몸 위로 나노 입자로 이루어진 갑옷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금색의 경량 갑옷처럼 생긴 마법 무구는 그의 마법과 어울려 초인적 파괴력을 선사했다.
[브레스]
수식이나 주문도 필요 없었다.
갑옷을 타고 흘러나가는 마나들이 스스로 마나를 재조립하여 방사한다.
그의 손에서 용암의 온도만큼이나 뜨거운 브레스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들을 흔적도 없이 태워버렸다.
끼아아아아악!
몬스터들이 제거되자, 전투기들이 선회 비행을 하며 항공모함과 바다에서 뛰어 올라오는 몬스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존의 등 뒤로 강철의 날개가 활짝 펴지며 그의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아이스 블라스터]
존의 등 뒤로 사람 키만 한 수십 개의 얼음송곳이 생겨나 화살처럼 아래로 쏘아졌다.
쐐애애액!
퍼퍼퍼펑!
바다가 얼며 날카로운 빙하를 만들어 내고, 귀신과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항공모함 갑판 위에서 있던 아크 데몬은 존의 얼음 송곳을 손으로 잡아내고 가루로 만든 다음 흉폭한 흉성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악!
그 기세에 다른 아크 데몬들 마저 더욱 흉폭하게 소리를 지르며 항공모함 이곳저곳을 파괴하고 다녔다.
존은 날개를 걷고 양손에서 거대한 칼날을 뽑아냈다.
날개 덕분에 줄었던 낙하 속도는 다시금 빨라졌지만, 존은 두려움 없이 가속도에 몸을 실어 기민하게 몸을 움직였다.
아크 데몬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존의 몸이 순식간에 열두 번 움직이며 아크 데몬을 조각조각 내었다.
스스슥.
끄억.
아크 데몬은 그 흉폭한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한 채, 그대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쿵!
엄청난 속도로 내려앉은 탓에 강화 소재로 만들어진 활주로가 움푹 파였다.
하지만 존은 아무런 영향이 없는 듯 저벅저벅 일어나 아크 데몬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아크 데몬을 처리한 존은 요원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데스 나이트들을 보았다.
존의 손 끝에서 뻗어 나오던 검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의 온 몸에서 현대식 병기들이 튀어 나왔다.
대물급 파괴력을 자랑하는 중병기 이지만 상계인들에겐 통할리 없었다.
그럼에도 존의 무기에서 마나탄이 터지자 순식간에 데스 나이트들의 뼛조각이 산화했다.
겨우 10분.
항공모함 위에 난립하던 몬스터들을 모조리 처리한 시간이었다.
“어디 있냐! 최시우!”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시우를 비롯한 한연맹의 무인들도 몇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감정을 잊은 그의 가슴을 타고 불안감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존은 항모 위에서 가장 커다란 마나의 힘을 가진 존재 앞으로 갔다.
통제실의 꼭대기에는 마나를 발산하는 불온한 기운의 수정구와 그것을 둘러싼 마법진이 새겨진 판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항모의 선장이 손과 발, 입이 결박된 채 부릅뜬 눈으로 존을 보고 있었다.
존은 선장 앞에 놓여진 편지로 손을 뻗었다.
― 이봐 존, 설마 이런 어설픈 함정에 빠져 든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빨리 돌아오라고, 당신 아지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존이 수정구를 박살 내었다.
항모 주변에 남아 있던 몬스터와 귀신들이 일거에 사라졌다.
존은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최시우-!”
그의 음성이 지중해 바다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