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처참한 광경이었다.
마나네트를 통해 쏘아지는 의식 코어는 오직 존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인형에 안착하고, 그렇게 발현되는 한 개체와 한 개념의 동화는 일반인이 가지는 의식보다 더 높은 동화율을 자랑한다.
그 동화율이 처참한 광경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성기사들의 고통에 찬 신음, 값비싼 슈트에 짓눌려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법병사,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무기력하게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천사들까지.
머리만 남은 존은 그 끔찍한 광경을 두 눈에 생생하게 담았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존의 머리는 분노보다는 허탈감이 더 컸다.
세계의 조율선을 지키기 위해 지난 수 세기 동안 얼마나 노력했던가.
“루체 시국이 무너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냐?”
시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이제 일요일에 성당을 안 가도 된다는 건가?”
빠드득.
안드로이드 인형은 실감 나게 존의 기분을 표현했다.
모르긴 몰라도 수천 킬로 넘게 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존의 이빨도 성치 않으리라.
“루체 시국은 세계의 조율선의 중심을 잡는 자들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선과 악을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
그 절대적인 법칙은 마법을 아무리 연구하고, 성력을 아무리 연구해도 깨지지 않는다.
이른바 절대 법칙 중에 하나인 것이다.
조율선의 무게 추는 언제나 악을 향해 달려간다.
인간은 언제나 본능적으로 선보다 악에 끌리고, 악을 향해 달려가는 묘한 성질이 있다.
이는 상계인들에게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성질이다.
하계의 법칙과 규칙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때부터 상계인들은 더 큰 힘과 권력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거대한 전쟁이었다.
루체 시국은 유일하게 그 악을 제거하는 힘이다.
이미 미국 혼자서 전 세계의 상계를 지배할 수 있을 만큼의 무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언제나 루체 시국을 동일 선상에 두고 대우하는 것은 루체 시국의 힘이 그만큼 조율선에서 필요불가결한 힘이기 때문이었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누가 다짜고짜 시비를 걸래?”
안드로이드 인형의 머리만 남은 존은 더 이상 얼굴에 웃음을 띠지 못했다.
“역시 네놈은 성하의 말대로 인간사에 있어선 안 될 존재구나.”
“웃기는 새끼들이네. 몇 번이나 평화적으로 해결 보려 했던 건 루체 시국이 아닌 나야. 아직 수습도 안 뗀 상계 사람들을 전쟁통으로 몰아넣기 싫어서 최대한 양보해보려 했던 게 바로 나라고. 근데 지금 꼴이 어떻지? 봐.”
시우가 존의 머리통을 잡고 엉망이 된 현장을 보여주었다.
“네놈들은 네놈들이 이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 성하가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들에게 굴복할 거라 생각해서 아니었나?”
“…….”
“네놈도 마찬가지지 중립인 척 개지랄했던 것도 어차피 성하가 이기지 못해도 네가 참전하면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해서가 아니었나?”
시우가 존의 머리통을 휙 던졌다.
“조율선? 까지 마, 네놈들 힘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억제 기구에 불과할 뿐이지. 결국 너희들은 말을 잘 듣는 개가 필요했던 거 아니었나?”
“네놈의 이런 행동은…….”
“꺼져! 항모를 한국으로 향했을 때부터 네놈들의 정의는 산산이 부서졌으니까.”
콰직!
시우는 존의 말이 이어지지 않도록 머리를 밟아 버렸다.
* * *
커넥팅룸을 나온 존은 곧장 메인룸으로 향했다.
메인룸에 있던 캐시가 존에게 뭔가를 보고할 틈도 없이 존은 병사를 밀치고 자리에 앉아 패널을 급하게 조작하기 시작했다.
[오딘 함대에 출격을 명령합니다.]
[공격 명령 전달]
[공격 수위 지정]
[공격 수위 ‘섬멸’]
[오딘 함대가 명령을 수행합니다.]
연달아 들려오는 빌리언트의 음성에 캐시가 정신을 겨우 다잡았다. 빌리언트와 동화된 명령체계는 기존보다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잠깐 정신을 놓치면 큰일이 벌어지고 만다. 캐시가 가까스로 존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섬멸이라뇨!”
‘섬멸’은 ‘점령’이나 ‘전멸’의 명령과는 다르다.
‘섬멸’ 명령은 유형화된 인간의 지도를 직접 지운다.
당연히 그로 인해 발생되는 상계의 혼란은 그 어떤 것보다 위험하다.
“이거 안 놔?”
캐시가 흠칫 놀라 손을 놓고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캐시는 자신이 물러난 거리를 보며 한 번 더 놀랐다. 자신 또한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을 정도의 강자다. 그런 자신을 음성만으로 물러서게 한 것이다.
새삼 자신이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섬멸은 안 됩니다. 루체 시국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세상에 물리적 변화를 가져올 거예요.”
“성하와 천사들이 없는 루체 시국은 관광지에 불과해. 하지만 지금 한연맹 놈들을 잡으면 세상의 악이 다시 자랄 일은 없겠지.”
“루체 시국은 성지에요. 성하와 천사들이 사라져도 언제가 사람들의 신앙이 모여 다시금 성역을 이룰 거예요. 하지만 국토 자체를 지우면, 이 세계에 성력은 다시 돌아 오지 않을 거예요.”
“…….”
패널을 빠르게 만지던 존이 갑자기 멈추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캐시는 1초 1초를 1시간처럼 느끼며 가만히 그를 보고 있었다. 지금은 한 마디의 실수에도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저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빌리언트 넌 어떻게 생각하지?”
[루체 시국을 대가로 최시우를 잡을 수 있다면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빌리언트의 말에 캐시가 머리를 잡고 비틀거렸다.
“아아…….”
이제 상계는 물론이고 하계까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계의 재래식 무기와 저수준의 마법군단이 그를 제거할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98%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울 확률이 높습니다.]
“……?”
빌리언트의 말에 캐시의 정신이 멍해졌다. 과연 이 심각한 상태에서 저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가 농담을 한 것인가? 아니면, 기계적 확률을 이야기하는데, 한국의 속담을 써먹은 것인가?
분위기가 무겁다 못해 추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때. 푸칵 하는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그 웃음을 최대한 참아 보려 끄억끄억 소리를 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 버렸다.
“크하하하하하.”
캐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 웃음의 주인은 존이었다.
“나참 미치겠군. 어떻게 인공지능이 이런 유머까지 갖출 수 있는 거지? 빌리언트. 그 유머는 네 주인이 남긴 건가?”
[전 근본적으로 인공지능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저의 퍼스널리티는 저의 세월이 저에게 남긴 것이지요. 제 경험상 가장 중대한 선택을 내릴 때에 유머가 필요합니다.]
“좋아. 그럼 네 생각에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은?”
[비행군단을 통해 루체 시국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최시우는 헛되이 사람을 죽이지 않지만, 충분히 이용해 먹을 정도의 인간입니다.]
“네 주인에 대한 평가가 박하군.”
[에고 소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애착을 느끼지 않습니다.]
“좋아. 이번엔 내가 직접 간다.”
캐시는 뭐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고 비행군단을 준비시켰다.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캐시는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구체를 바라봤다.
무기질적인 구체는 왠지 자신을 지그시 보고 있는 듯했다.
* * *
존의 입에선 테이프가 늘어난 듯한 음성이 들리며 천천히 빛을 사그라뜨렸다.
시우는 고개를 돌려 성하에게 향했다.
성하와 대주교는 구속구에 묵인 채였다.
“그대들이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가?”
“무슨 소리지?”
“미국 상계의 힘은 그대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이제는 아버지를 안 찾고 미국을 찾는 건가? 그거 신앙인으로서 괜찮은 태도인가?”
“……이 땅에 악의 힘을 남겨 둔다는 것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인간에겐 모두 어두운 면이 있지. 심지어 성자에게도.”
“악마는 언제나 그런 인간의 어두운 면을 좀먹는다. 바로 그대처럼!”
“아까 존에게 한 말을 들었겠지만, 애초에 너희가 시작한 일이야.”
“우린 악과 양립할 수 없다!”
“말이 뱅뱅 돌기만 하네.”
시우의 손에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성하는 마지막까지 시우의 얼굴을 보겠다는 듯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버지시여!”
마법진에서 하얀빛이 흘러나와 성하의 얼굴에 상처를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성하는 얼굴과 목에 닿는 하얀빛에서 성력 특유의 따뜻함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랐다.
“어, 어찌!”
악마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을 대가로 어떤 소원이든 이뤄 주지만 악마가 딱 하나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성력의 발현이었다.
루체 시국에서 성력의 발현은 곧 선함의 증거이고, 신탁의 증거이다.
“당신도 천사들에게 제대로 보고를 못 받았나 보네. 천사들 특징인가?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게?”
성하가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미카엘을 바라봤지만, 미카엘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 그것이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성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간에게 선함이 있다면 악함도 있는 거지. 자연스러운 것을 가지고 실망할 필요도 없는 거지.”
“…….”
“애초에 그대들이 절대선이라는 시점부터 잘못된 거야. 너희들은 결국 절대선을 표방한 하나의 이익집단에 불과한 것뿐이지. 인간의 몸으로 신을 행세하려 하니 눈앞이 가려질 뿐인 거고.”
“…….”
“앞뒤 상황만 적당히 살폈어도, 너희가 이렇게 무대포식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겠지. 내가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너희에게 필요했던 건 정황이 아닌 목표. 너희를 정당하게 만들 악뿐이었던 거지.”
“…….”
“선을 표방하는 인간이 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하니 그 순간부터 위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위선이 선을 표방하면 악마가 난립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세상이 된 것이고.”
성하는 말없이 시우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엔 분노도 수치도 없었다.
그저 무기질적인 무언가를 보는 무감각한 눈이었다.
“오딘 함대만으로도 나라 하나가 지워진다. 자네는 그들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시우가 고개를 들었다.
사방에서 아름다웠던 루체 시국을 부수고 망가뜨리던 아크 데몬들이 일제히 시우를 돌아 봤다.
시우가 손짓하자 아크 데몬의 등 뒤에서 박쥐와 같은 커다란 날개가 솟아 나왔다.
펄럭 펄럭
건물이 부서지며 떨어진 흙먼지가 루체 시국을 가득 메웠다.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을 때쯤 아크 데몬은 저 먼 곳에서 불길을 뿜으며 오딘 함대의 마법병사와 마법전단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성하의 눈동자엔 아무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우를 볼 뿐이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맞아, 자세히 이야기할 순 없지만, 절망적인 곳에서 방치되어 있었지.”
“기간은?”
“글쎄, 한 120년 정돈가?
“저것들은 그곳에서 얻은 건가?”
“유일하게 나를 지켜준 것들이지.”
“…….”
성하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윽고 다시 벌어진 그의 입에선 공손한 어투가 흘러나왔다.
“한국에서 잡혀 온 여자분은…….”
“성하!”
“어찌 그런 말씀을!”
대주교와 미카엘이 절절하게 몸을 누에처럼 기며 움직였다.
“그대들은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성하의 일갈에 대주교와 천사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성경을 쫓되 그것에 파묻히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였는가! 그대들이 믿는 건 아버지인가, 아버지의 힘인가!”
더 이상의 꾸지람은 듣고 싶지 않았는지, 두 사람이 고개마저 숙였다.
마첼리노는 그제야 다시 시우를 보며 말했다.
“그 여자분은 이곳에 없습니다. 그 여자분은 루시퍼와 함께 미국으로 옮겨졌습니다.”
마첼리노의 말에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오히려 놀란 것은 마첼리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