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워프를 통과하자, 후덥지근한 날씨와 시큼한 바람이 느껴졌다.
워프 바깥은 다른 세상이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고딕 양식의 석조 건물과 10세기 전에 만들어진 도로. 그 위에 현대식으로 세워진 가로등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뤄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워프를 처음 겪는 무인들은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잠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다.
척. 척. 척. 척. 척.
딱 맞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거대한 주도로를 가득 메우는 집단이 등장했다.
선봉에서는 루체 시국을 상징하는 황금 독수리가 새겨진 깃발을 들었고, 기수의 뒤로 황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투구 안으로 눈빛을 숨긴 채 한연맹의 무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뭐, 뭐야.”
그들의 삼엄한 기세에 움찔한 무인들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설 때. 뒤에서도 발걸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척.
주도로의 앞뒤를 막아선 기사들은 일정한 거리를 남겨둔 채 제자리에 섰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일시에 울리며 그들의 모습엔 움직임이 없어졌다. 오직 기수가 든 깃발만이 바람에 살짝 휘날리고 있었다.
뿌우우우우우.
한 건물 위에서 거대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선 다섯 줄기의 빛기둥이 쏟아져 내렸다.
여섯 개의 날개를 펄럭거리며 내려오는 그들의 모습은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한연맹의 무인들을 중심으로 각각 건물의 옥상에 내려앉은 다섯 천사들은 고고하게 한연맹을 바라보고 있었다.
“똥 싸고 있네. 싸움에 진 새 새끼 주제에. 그렇게 연출하면 구겨진 자존심이 좀 회복이 되나?”
“…….”
시우의 말에 미카엘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지혜 어딨어?”
“그 하계 인간은 왜 찾는 거지?”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네놈은 소중한 사람도 악에 물들게 하나?”
“위선자로 남는 거 보다는 적당히 어두운 게 더 인간적이지.”
“그 인간은 이미 정화 의식에 들어갔다.”
시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안 좋은 선택이야. 적당히 맞고 끝날 일을 성당 기둥뿌리 하나 남기지 않을 만큼 키웠어.”
“네놈이 여기서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 같더냐?”
“내가 여기 왜 왔을 거 같아?”
시우의 말에 미카엘은 서늘함을 느꼈다. 천사가 된 뒤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이었다.
“신의 사자들은 들으라!”
미카엘의 목소리가 루체 시국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저자가 바로 이 세계를 악으로 물들이려는 마왕의 화신이다!”
창!
검을 뽑는 소리가 마치 한 사람의 내는 것처럼 동일하게 울렸다.
“성지를 범한 악의 노역자들을 하나도 남기지 마라!”
“우아아아아!”
커다란 검을 뽑은 성기사들이 일제히 한연맹의 무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정신 차려라!”
남궁혜자의 사자후에 한연맹의 무인들도 검을 뽑아 들었다.
“짐짝이나 되려고 이곳까지 쫓아 온 것이더냐!”
그녀의 말에 무인들은 정신을 차리고 각자 자신의 소속을 찾기 시작했다.
“태백검진을 펼친다! 태백정가의 무인들은 남쪽을 방어하라!”
“오행진을 펼치겠다! 미화문의 무인들은 북쪽을 방어하라!”
두 개의 커다란 진이 커다란 줄기를 막았다.
챙챙챙챙챙.
성기사들의 검에 비하면 무인들의 검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지만, 검기가 충만한 검의 강성은 밀도 높은 성기사의 검을 극복하고도 남았다.
남은 무인들은 진의 빈틈을 채우며 검을 휘둘렀다.
“……?”
“……?”
“뭐지?”
성기사들과 검을 나누던 무인들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소와 달리 크게 힘을 쓰지 않아도 성기사들의 검을 막아 냈고, 기세 등등한 성기사들의 힘은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정가의 무인 하나가 검기를 잔뜩 불어 넣어 검풍을 날렸다.
쐐애애애액.
탕, 탕, 탕, 탕, 탕.
콩알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성기사들의 투구와 검들이 날아가고, 검풍을 제대로 막지 못한 성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치명상을 입으며 쓰러졌다.
성기사 무리에 공간이 생겨 버리자 성기사측도, 한연맹측도 당황하였다.
“하, 함정인가?”
태백검진을 이루던 정가의 무인들도 검진에 따라 맞추던 발을 멈추고 일제히 성기사들에게 검풍을 날렸다.
태백기가 잔뜩 들어간 무서운 위력의 검풍이었다.
“으아아악!”
“크어억!”
“아악!”
마치 짚단이 넘어가는 것처럼 성기사들이 일제히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오행진을 이룬 미화문의 영역도 다르지 않았다.
성기사들이 속절없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미카엘을 제외한 천사들이 일제히 눈을 감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 리스벨리오risveglio(천사의 각성)
성기사들에게 일제히 금빛 빛무리가 쬐여지더니, 물러나던 성기사들이 용기백배하여 다시금 밀려들기 시작했다.
새로이 각성한 성기사들은 더 이상 무인들의 검기에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았다.
- 리나쉬따rinascita(천사의 숨결)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쓰러진 성기사에게도 금빛 빛무리가 쬐여졌고, 충격으로 기절했던 성기사들까지도 피를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푸르떼forte(천사의 보은)
연달아 퍼붓는 버프에 무인들이 순식간에 밀리기 시작했다.
미화문과 태백정가는 다시금 검진을 짜기 시작했다.
“니들은 나하고 붙어야지.”
[거인의 손][오버 더 아머]
천사들의 머리 위로, 갑주를 착용한 거인의 손이 내리꽂혔다.
쾅! 쾅! 쾅! 쾅!
기도를 올리던 천사들이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헬 버스터]
수십 개의 불꽃이 공중으로 비산하여 천사들을 공격했다.
퍼퍼퍼퍼펑!
다섯 천사들이 빛무리를 뿌리며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그 뒤를 헬 머스터가 빠르게 쫓아가며 공중을 불꽃으로 수놓았다.
“어디까지 도망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시우의 손에서 예의 커다란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천사들을 골로 가게 할 뻔하게 했던 예의 그 마법이었다.
헬 버스터를 피해 날아다니던 가브리엘이 손 안에 빛의 창을 들고 시우에게 빠르게 날아들었다.
시우의 마법이 거의 완성되기 직전이었지만 가브리엘의 움직임이 좀 더 빨랐다.
가브리엘이 빛의 창을 시우의 심장에 꽂아 넣는 순간.
시우의 몸이 흐릿하게 사라졌고, 가브리엘의 빛의 창은 허공을 지나 땅속에 처박혔다.
“가브리엘!”
레미엘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가브리엘은 뒤에서 나타난 시우의 모습에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순진하네.”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가브리엘을 덮친다.
가브리엘이 온몸에서 성력을 발산하자 검은 그림자는 멈칫거렸다. 하지만 이내 가브리엘에게 끈적하게 눌어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가브리엘의 온몸을 옥죄어 어둠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
가브리엘이 그렇게 시우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천사들과 성기사들이 시우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은 누구지?”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미카엘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다른 천사들도 미카엘의 주문을 그대로 따라 외우기 시작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그렇게 천사들의 손에서 거대한 빛의 브레스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온전한 인간마저, 악으로 규정하여 지울 수 있는 순수한 성력의 힘.
절대선의 의지를 담은 소멸의 빛이었다.
일말의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는 것이었기에 하계의 인간이 조금이라도 닿을 위험이 있다면 절대 쓰지 않았을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 루체 시국엔 성당의 기사들과 한연맹의 무인들 뿐. ‘무고한 인간’이란 없었다.
네 줄기의 거대한 빛무리가 사방을 휩쓸었다.
빛을 보는 순간 성기사들도 자신들의 눈 앞에 펼쳐질 끔찍한 광경에 모두 눈을 감았다.
쿠콰콰콰콰콰콰쾅.
빛 자체의 압력으로 도로가 뒤집어지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굉음과 모래 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리고, 조금씩 소음이 잦아들었을 즈음 성기사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이는 건물 위에서 소멸의 빛을 쏘아낸 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번쩍이는 은색의 갑주을 입고 있는 삼백의 무리들.
아마도 한연맹의 무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은색의 조각들로 이뤄진 갑주를 입고 오연하게 서 있었다.
“…….”
“어, 어떻게…….”
미카엘은 눈앞의 광경에 이미 넋을 잃은 상태였고, 우리엘은 설명이라도 바라는 듯 시우를 바라봤다.
“이런 걸 흘리고 다니니까. 약점을 들키는 거야.”
시우는 아공간에서 라구엘이 쓰던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어 던져 주었다.
“성력과 성력은 서로 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 있더군. 국가를 지울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성력도 작은 상처를 치유할 정도의 성력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게 참 재미있었어.”
“설마…….”
“그래, 저들이 입고 있는 건, 루체 시국의 성력이 포함된 알머스트야, 너희들이 쏘는 성력은 저들에게 아무런 해도 되지 않지.”
“이럴 수가.”
우리엘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대로 항복할 생각은 아니지? 난 이곳 루체 시국을 지울 생각으로 온 거거든.”
시우의 손에서 미티어 스웜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마법진이 완성되려는 찰나, 하늘에서 빛이 검이 떨어져 내리며 시우의 마법진을 산산조각 내었다.
펑!
충격파로 인해 자리에서 몇 걸음이 뒤로 물러난 시우가 고개를 들었다.
성기사들 사이로 성하 마첼리노와 대주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만하십시오.”
“이제야 기어 나오는군.”
“그대의 방문을 바라긴 했지만, 아버지의 땅에서 이런 소란은 큰 죄악입니다.”
“이 모든 일을 시작한 건 그대들이야. 그건 분명히 하도록 하자고.”
“그대의 힘은 충분히 강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힘을 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풋. 악을 소멸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거치곤 우스운 꼴을 보이는군.”
“악의 힘이 우리가 못 본 사이에 너무 커졌고다 느낄 뿐입니다.”
“결코 좋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말이군.”
“우리는 선과 악이지 않습니까.”
“지혜는 어디 있지? 그녀만 돌려준다면 돌아가도록 하지.”
시우의 말에 천사들은 굴욕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시우와 한연맹에 압도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하인 저에겐 숙명이 있습니다.”
“…….”
“그 숙명은 바로 악과 공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대와 그 어떤 거래도, 약속도 할 수 없습니다.”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대의 신이란 건 말야. 그렇게 악이 혐오스럽다면 인간에게 악을 만들지 않았어야지?”
“인간은 모두 죄지은 존재. 그 죄를 씻는 자만이 아버지의 자식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천국과 지옥에 갈 사람은 이미 정해졌군.”
시우의 손에서 수십 개의 마법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것은 불꽃을 소환하고 어떤 것은 얼음 송곳을, 어떤 것은 검은 창과 검으로, 어떤 것은 거대한 거인의 손으로.
그 압도적인 위용에 성기사들마저도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그 신에게 안부 전해줘.”
시우의 손이 뚝 떨어지는 순간.
성기사와 천사들, 위로 투명한 막이 생겨나 마법들을 소멸시켰다.
“이런 이런,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시우의 얼굴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또 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