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한연맹 사람들은 그 어떤 때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각자 자신의 병기를 점검하고, 새로이 보급받은 파츠들의 착용과 사용법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들뜬 기색은 전혀 없었다.
모두가 하나 같이 한연맹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무게감을 느끼고 있었다.
시우는 연무장 중심에 거대한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법을 준비함에 있어서 언제나 여유롭던 시우도 이번만큼은 무게감을 벗어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곽동원은 태블릿pc를 들고 멀리서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의 옆으로 한세아가 툭 하니 옆구리를 찔렀다.
그녀의 행동에 한숨을 내쉰 곽동원이 입을 열었다.
“시우 님.”
마법진을 손보고 있던 시우는 곽동원을 보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존인가요?”
“……네.”
곽동원이 간신히 입을 열자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곽동원이 태블릿을 켜자, 작은 태블릿 안에 금발의 사내가 나타났다.
-헤이, 잘 지냈어?
“왜 이번엔 그 비싼 인형을 안 가져 왔지?”
-그거 때문에 부하한테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지 알아?
“가져 왔으면 좋았을 텐데 요즘 고철값이 꽤 올랐거든.”
-그래도 나름 같은 마법산데. 동료의식도 없나?
“직접 왔으면 얼굴을 갈아 버렸을 거야.”
-너무 딱딱하게 구는군.
“뻔뻔하기 그지없군. 양키들은 다 그런가?”
시우가 중지를 날리며 말했지만 존은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래, 그래, 뒤통수친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이건 다 세계의 조율선을 위한 일이었다고.
“지혜는 그쪽이 데리고 있나?”
-지혜? 그게 누구지?
존의 태도를 보던 시우가 표정 변화 없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것만 알아둬, 그녀에게 티끌만큼이라도 상처를 낸다면, 난 얼마든지 온 세계의 사람들을 지옥으로 처박을 자신이 있다는 거.”
-이봐, 좋게 해결하려는 사람한테 꼭 이래야 하겠어?
“당신이 그 고철 덩어리를 데리고 우리 땅에 나타난 시점부터 모든 일은 시작된 거야.”
-우리 ‘골렘’한테 고철 덩어리라니 그거 만드는 데 국가 예산 몇 년분이 들어간 지 알아?
“온 이유나 말하고 꺼져. 바쁘니까.”
-자네 친구가 우리한테 협조를 안 해서 말이야. 혹시 암호라도 걸려 있는 건가?
“그 정도 물건을 안정장치 하나 없이 세상에 꺼내 놨을까 봐?”
-곤란하군. 난 그걸 위해 꽤 큰 값을 지불했는데.
“그건 댁이 건들만 한 물건이 아냐, 가서 알파고나 가지고 놀아. 곧 찾으러 갈 테니까.”
-흠, 방법이 없나?
“왜 그 정도 자아가 인간을 지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뜬금없는 말이었음에도 존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인류의 최대의 고민을 마법으로 풀어 버렸다는 건가?
“그건 니들이 만드는 장난감을 제어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야. 함부로 건드리지 마.”
-곤란한데. 그럼 이건 어떤가?
존의 화면이 작아지면서 태블릿pc에는 어느 바다의 전경이 떠올랐다.
거대한 크기의 항공모함과 항모를 호위하는 5척의 이지스 전투함, 그리고 노골적으로 선미를 드러낸 원자력 잠수함과 주변에 퍼져있는 군수지원함. 게다가 공중엔 항모비행단까지 떠 있었다.
-미 해군에서 운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제우스 항모 전단은 사실 우리 51area 소속 마법 전단이네. 재래식 화기 병기는 물론이고, 마법 병기까지 아시아 전체를 지울 정도의 화력을 탑재하고 있지. 이 제우스 항모 전단의 목적지는 한국이네.
“뭐 하자는 수작이야?”
-세계의 조율선을 망가뜨리려는 자네를 막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
“하계에 인간들을 상대로 뒷수습 할 자신은 있고?”
-실체 없는 미디어만을 믿는 인간들을 상대로 일주일의 시간을 속이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니네 달에 갔다는 것도 구라지?”
-아, 그건 사실이야. 내가 직접 타서 마법으로 그들을 도왔거든.
시우는 말없이 태블릿pc를 바라봤다.
곽동원은 말 한마디로 한국의 운명을 논하는 두 사람의 대화에 숨도 쉬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마첼리노가 겨우 커다란 공 하나와 자신들을 바꿨다는 걸 알게 되면 좋아하지 않을걸?”
-그는 무엇보다도 악과의 공생을 싫어하지.
“그들이 없어지면 우리가 그 자리를 채우면 그만이다 그건가?”
존이 활짝 웃었다.
-그거야 알 수 없지.
시우의 손에서 작은 마법진이 입체적으로 생겨났다.
무려 7층 중첩 마법진이다.
“빌리언트의 봉인을 푸는 마법진이야.”
시우의 손에서 마법진이 금방 사라졌다.
-이, 이봐! 너무 짧네.
“빌어먹을 양키놈아 녹화 버튼 있을 거 아냐! 그리고 이 정도도 기억 못 하면 빌리언트 만질 생각 따윈 하지 마.”
-크흐흐. 내 오랜 세월 살아왔지만, 자네만큼 마음 맞는 친구는 처음 보는군. 내가 누굴 응원해야 할지 알겠는걸?
“개 소리 하지 마. 루체 시국의 그 목사 놈, 다음엔 네놈의 모가지와 고철 덩어리를 가지러 갈 테니까.”
-건투를 빌지.
시우가 잠시 그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그걸 함부로 건들지 마.”
-조언 고맙네.
태블릿pc가 꺼지고, 곽동원의 핸드폰으로 곧장 전화가 왔다.
“그래? 아! 잘됐네. 알았어. 대통령님껜 내가 보고하지.”
핸드폰을 끈 곽동원의 얼굴에 겨우 혈색이 돌아왔다.
“태평양 함대가 방향을 틀었다고 합니다.”
“아까 제우스 함대라면서요?”
세아가 묻자 곽동원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알려지기론 태평양 5함대입니다. 본래 가장 이동이 없는 함대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게 상계의 물건일 줄은…….”
“경계태세를 늦추지 말라고 하세요.”
시우의 말에 곽동원이 의문을 표했다.
“네? 방금 약속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빌리언트를 가져간 이상 우리한테 볼일이 없을 거예요. 그 인간이 한국을 냅둬서 얻는 게 뭔데요?”
“아…….”
작게 탄성을 지르는 세아와는 달리 곽동원의 얼굴은 다시금 혈색을 잃기 시작했다.
“좌표를 수정해야 겠어요. 제갈청룡을 불러 주세요.”
“좌표수정이요?”
“존은 이미 우리가 움직일 걸 알고 있었어. 최소한 놈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선 안 되잖아.”
한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연구소에 있는 제갈청룡을 찾아 나섰다.
* * *
태블릿을 내려놓은 존이 휘파람을 불며 금발의 미녀를 바라봤다.
“캐시 들었지?”
“이미 해제 중입니다.”
캐시라 불린 미녀는 양손으로 커다란 구체 주위에 떠다니는 마법진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구체는 이곳저곳이 개조된 듯 다른 색상의 부품들이 붙어 있었다.
“아, 그리고 오딘 함대가 지중해에 있지?”
“루체 시국에 힘을 실어주실 생각이십니까?”
“2년 만에 급성장한 애들 보단 그래도 2세기 동안 함께 지내온 녀석들이 낫잖아?”
마법진을 컨트롤 하고 있는 캐시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에 서 있던 연구복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연구소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구체를 감싸고 있던 마법진에서 메시지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한글 아냐?”
“한글화가 마쳐졌다는 말일까요?”
“이거, 마첼리노 말 대로 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프로세스 압축 해제]
[자아봉인해제]
[신경망 복구]
[자아 활성화]
[에고 소드를 일깨웁니다.]
바닥에 놓여 있던 거대한 구체가 서서히 떠올랐다.
어떠한 장력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떠오르는 모습에 마법에 조예가 깊던 캐시도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긴 어디 입니까?]
구체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51area. 넌 누구지?”
[전 빌리언트. 다크의 최초의 자아이자. 방치된 그림자.]
“너의 주인은 누구지?”
[제 주인은 ……음 ……누군지 모르겠군요.]
캐시가 마법진으로 구체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아를 제어하는 귀속 장치는 없어요. 그런데…… 이것 좀 보실래요?”
존은 캐시가 보여주는 마법창을 보았다.
마법창 안에는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마법공학의 장치들이 수없이 많이 보였다. 하나 같이 현 테크놀로지를 초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shit. 이 새끼 이거 완전 미친 새끼네. 이봐 이걸 만든 건 누구지?”
[다크. 중간계의 최강의 어둠이자 최초의 신이 된 자.]
“중간계? 하계를 이야기하는 건가? 다크는 시우인가?”
[다크는 다크입니다.]
존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캐시를 바라봤다.
“안 돼요. 이미 올해 예산은 모두 책정이 끝났어요.”
“생각해 봐. 이것들을 만들 수 있으면, 귀찮은 상계 이사국 같은 건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세계의 조율선? 좆 까라 그래.”
“안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이걸 골렘에 넣을 생각도 하지 마세요.”
“에? 뭔 소리야. 그럼 내가 이걸 왜 가져 왔는데?”
“최시우가 쓰던 자아에요. 뭘 믿고 이걸 쓰겠다는 거죠? 골렘이 얼마 짜리인 줄은 아시죠?”
“꺼져! 네가 뭔데. 명령 질이야.”
캐시는 존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은 채 마법창을 둘러보다가 하나를 보여주었다.
“저희 에고 프로젝트 연구용으로 쓸 예정이에요. 그리고 이 정도는 하게 해드릴게요. 어차피 kh-14위성이 놀고 있으니까.”
캐시가 마법창을 보여주자 씩씩거리던 존의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예언자의 눈? ……알았어. 그럼 이것도 하게 해 줘.”
존이 다른 마법창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이언맨 프로젝트랑 중복되는 건데 뭐 하러 하시려는 거죠?”
“이거 봐. 벨트야. 벨트. 우리 거는 최소 120kg짜리 가방인데 이건 벨트라고.”
무조건 막기만 하다 보면 결국엔 폭주하고 만다. 이렇게라도 숨통이 트이게 해 놓으면 며칠간은 잠잠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캐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마음대로 하세요. 대신 시범적으로 100대까지만 허용시켜 놓을게요.”
“kh-14랑 연결한다?”
존은 곧장 태블릿을 조작하기 시작했고, 연구복을 입은 사람들은 거대 구체에 커다란 선들을 꼽기 시작했다.
잠시 뒤 빌리언트에 연결된 패널의 화면이 모두 꺼진 후, 빌리언트가 보여주고자 하는 영상들이 뜨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루체 시국 간에 미허가 워프가 연결 중입니다.]
“오오! 홀리 shit! 이런 것까지 감지한다고?”
존은 탄성을 금치 못했다.
캐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kh-14 위성에 마나 감지 시스템이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이 정도 까지…….”
“거봐, 내가 최시우 그 애송이 장난 아니라고 했지? 이봐 빌리언트. 최시우를 구별할 수 있나.”
패널에선 잠시 뒤 한연맹의 위성 지도가 나타나고 그 위로 작은 불빛이 떴다.
“이제 출발하려는 모양인데. 오딘 함대에 연락해 줘.”
“뭐라고 할까요?”
“뭐라고 하긴, 싹 쓸어버리라고 해. 시체 수거해 올 필요도 없다고.”
* * *
제갈청룡은 노트북을 가지고 시우의 옆에 붙어서 계속 좌표를 불렀다. 시우는 그때마다 커다란 마법진의 일부분을 수정하고 다시금 새로운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마법진이 변경될 때마다 형형색색의 신기한 빛을 뿜었지만, 그 빛을 보는 한연맹의 무인들은 감탄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그 색들이 변한다는 건 자신들의 전투 시간이 임박해 온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48시간 만에 전투 준비를 모두 마친 한연맹의 인원들은 연무장에 도열했다.
삼백의 인원들은 모두 똑같은 무복과 은색 벨트, 그리고 어깨와 무릎을 보호하는 파츠를 착용하고 있었다.
시우는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금색 흉갑을 착용한 세아와 소빈에게 다가갔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멋진 남자가 구하러 오면, 여자는 그 남자에게 자신의 일생을 맡기고 싶어 한다고요. 그건 미화문의 문주로서 반대합니다.”
한세아의 농담에 시우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유머 감각은 미모에 전혀 묻히지 않을 정도였다.
시우가 소빈을 보았다.
“지혜 씨에게 빚이 있어요.”
“빚?”
“그날 너무 놀렸거든요. 사과해야죠.”
잠시 생각하던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고개를 돌린 시우가 한연맹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엄한 맹주를 만나 맨날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시우의 말에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투는 언제나 한국 상계를 위한 전투였다. 되려 그들의 마음속엔 늘 시우에 대한 감사가 가득 쌓여 있었다.
“난 잘 몰랐는데, 루체 시국이 세계의 상계 세력 2위라고 한다. 그리고 그 1위 하는 놈이 얼마 전에 한연맹을 개판으로 만들었던 놈이고. 그놈도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엄한 놈 옆에 있다가 같이 맞을 수도 있다. 도망치고 싶은 사람 없나?”
“없습니다!”
시우보다 인생을 더 산 사람도 있고, 자식의 나이가 시우보다 더 많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다. 시우가가 보인 희생과 그의 강함은 이미 그들로 하여금 시우를 마음속에 리더로 자리 잡게 했다.
“무공이란 건 나보다 강한 놈을 이기기 위해서 익히는 거라 알고 있다 맞나?”
“네! 맞습니다!”
“마법은 나보다 똑똑한 놈을 상대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거다. 몸 쓰는 건 그대들에게 맡길 테니, 머리 쓰는 건 나한테 맡겨라. 그럼 이 세상에 우릴 상대할 수 있는 놈은 없을 거다.”
“우아아아!”
한연맹의 무인들이 병장기를 흔들며 고함을 내질렀다.
시우의 손에 청색의 마나가 응축되어 모이기 시작했다.
청색의 마나가 거대한 마법진에 내리꽂히자, 마법진이 환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한연맹의 무인들 앞에 10개의 워프 통로가 생성되었다.
“가자!”
한연맹의 무인들이 물밀 듯 워프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한연맹에 남은 곽동원은 굳은 얼굴로 사라져 가는 워프 통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