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지혜에게는 시우가 만들어 준 아티팩트가 있었다. 검은색의 보석이 박힌 수수한 반지.
서클을 개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시우가 몇 가지 마법을 담아 지혜에게 주었다.
위치 파악과 사용자의 감정을 파악하여 신호를 보내주는 간단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조합된 두 가지 정보가 보내지는 대상이 시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단순한 아티팩트 반지는 세상 그 무엇보다 지혜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지.”
연구소로 내려온 시우는 여전히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비록 낮은 서클의 보조 마법을 조합하여 만들긴 했지만, 간단한 만큼 더욱 강력하다. 미세한 살기도 감지하고 공포엔 더욱 민감하다.
시우는 때때로 지혜가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풍기는 살기에 반응해 텔레포트로 그녀에게 간 적도 있었고, 놀이동산 귀신의 집에서 느끼는 공포에 반응하여 그녀를 보호하고자 배리어를 친 적도 있었다.
만약 단순하게 반지를 뺀 것이라면 그 정보까지도 시우에게 전달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마치 이 세계에서 분리된 것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시우가 화를 꾹꾹 눌러 참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시우의 마법을 피해 그녀를 해하려면 단순한 능력만 갖고는 역부족이다.
최소한 인간 하나를 손쉽게 지우고 살릴 수 있을 정도의. 그래, 가령 예를 들자면.
“루체 시국이나, 미국의 존이겠지.”
현 상황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범인 후보는 금방 추려졌다.
연구소는 로봇 형상의 거체가 손을 넣었다 뺀 덕분에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시우는 순식간에 수십 개의 마법진을 소환해 냈다.
휘익! 쿠타타탕
쓰러진 집기와 부품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부서진 비커나 용액을 담는 유리잔들은 모두 쓰레기통용으로 만든 아공간으로 들어갔고, 마법으로 고칠 수 있는 것들은 간단하게 수리해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놨다.
부서진 벽면을 통해 수백 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흙이 연구소 안으로 잔뜩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시우의 간단한 손짓 몇 번에 제자리를 찾고 무너진 벽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 고치려면 1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단 몇 분 만에 피해를 수습한 시우의 마법을 보며 한세아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시우는 곧장 거대 패널 앞으로 다가가 기계를 조작했다.
세아는 이제는 빈자리가 되어 버린 빌리언트가 놓여 있던 곳을 살폈다. 엑사바이트 수준의 처리 능력이 있는 서버와 연결되어 한연맹 내부뿐만 아니라 오라클을 이용해 전세계에 통신망을 관리하던 빌리언트가 사라졌다. 당장 한연맹 내부에 구축해 놨던 정보망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우는 놀랄만 한 집중력을 발휘해 빠르게 기계를 조작해 오라클을 움직였다.
그사이 한연맹 내부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알머스트 제작 공정도 재가동 시켰다.
“한연맹에서 과거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을 뽑아서 공장으로 보내줘.”
“이미 조치해 두었습니다.”
“빌리언트가 빠진 덕분에 자동화되던 공정이 모두 올스톱되었어, 설계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따로 뽑아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세아는 이동식 드라이브를 컴퓨터 단자에 꽂았다.
오라클과 공장의 상황을 비추고 있던 패널이 한쪽으로 작아지면서 새로운 화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혜 씨가 실종된 날 아침부터의 행적을 뒤쫓은 기록입니다.”
서울 시내에 설치된 80만대에 가까운 cctv는 서울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한다. 지혜의 아침부터 실종될 때까지의 모든 영상과 사진이 있었지만, 그 자료들을 찾는 데는 삼 일의 시간이 소요됐다.
빌리언트가 있었다면 30분도 걸리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나마도 한세아가 김윤성 대통령을 통해 곽동원에게 압박을 넣지 않았다면 3일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사진부터 영상까지 모든 자료가 지혜를 쫓고 있었다.
“여기부터가 문제입니다. 지혜 씨가 그날 명동을 가는 바람에.”
서울에서 내·외국인을 포함한 가장 많은 인원이 오가는 곳이었다. 아무리 cctv가 많아도 지혜의 흔적을 완벽하게 잡아낼 수는 없었다.
느리게 재생되는 영상 한편에서 지혜의 얼굴이 슬쩍 나왔다가 다시금 가려졌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흘러 지혜의 모습은 사라지고, 붉은 화살표만이 지혜의 행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작게 번쩍하는 빛이 터진 후, 지혜는 자취를 감추었다.
“여기까지예요.”
시우는 화면을 되돌려 보았다. 여전히 지혜의 모습이 사라진 후 번쩍하는 작은 빛과 함께 지혜의 모습이 사라졌다.
“인천공항 cctv 연결 할 수 있나?”
갑자기 인천공항 이야기를 꺼냈지만 세아는 구태여 의문을 표출하지 않았다. 지금 시우는 누구에게 뭔가를 친절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사고가 일반인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을 알기에 그가 혼자서 어떤 답을 유추해 내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관람 허가는 받아 놨습니다.”
국정원 고위 직원급의 열람 허가를 미리 받아 놓은 세아가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고, 시우는 곧장 시간을 돌려 지혜가 사라진 당일 아침의 인천공항을 비추기 시작했다.
“…….”
한참이나 영상을 빠르게 돌렸다가 다시금 재생시키는 일을 반복하던 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루체 시국의 7천사 중 하나는 내가 먼저 처리를 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 애초에 국가 단위급 상계 세력 하나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천사라면 나 하나를 잡겠다고 다섯이나 몰려오지 않았을 거야.
그건 루체 시국이 나를 최고 등급의 위험인물로 선정했다는 말이고, 그 말은 곧 동원할 수 있는 천사 모두를 동원해야 한다는 말이지. 애초에 넷이나 셋으로 될 수 있었다면 다섯이나 데려오지 않았을 거고, 다섯이나 동원해야 한다면 차라리 여섯을 채웠을 거야.”
커다란 볼륨 조절 버튼 같은 것을 빠르게 돌리던 시우의 손이 우뚝 멈춰섰다.
“재미난 게, 난 처음 천사라는 녀석을 봤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호감을 느꼈거든? 알지도 못하는 녀석인데 말이야. 근데 아마도 그게 녀석들의 특성인가 봐.”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인 한 외국인을 비추고 있었다.
cctv는 이제 외국인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명동으로.
명동의 거리를 걷는 외국인을 쫓던 화면이 어느 순간 딱 멈췄다.
그리고 지혜가 사라진 사진이 그 옆에 나란히 섰다.
“저게 우리가 놓치고 있던 공간이야.”
“루체 시국이 지혜 씨가 시우 님과 관련된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걸 물어봐야지.”
“비행기를 준비할까요?”
“아니. 이걸로 충분해.”
이제 패널 화면에서는 사진과 영상들이 사라지고 대기권 밖에 떠 있는 위성 오라클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우는 오라클의 경로를 수정하였다. 목표는 루체 시국.
“지금 동원할 수 인원이 어떻게 되지?”
“정예로만 추린다면 오백 명까지 가능해요.”
“백 명까지 줄이면?”
“그건 반대입니다.”
시우가 고개를 돌려 세아를 바라봤다. 평소엔 시우의 말에 토달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반대의견이라니. 시우의 얼굴이 여전히 차가운 상태였다.
“시우 님이 보호 가능한 최소 인원으로 한정하시려는 거 알고 있습니다.”
“…….”
“지금은 저희의 목숨보다 지혜 씨의 안위를 더욱 걱정해야 할 때입니다.”
시우는 몸까지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시우 님은 저희의 맹주님이시고, 맹주님의 가장 가까운 분이 납치당하셨어요. 이건 맹주님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우리 한연맹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는 루체 시국이야. 무고한 사람이 피를 흘릴 필요는 없어.”
“저희의 피와 땀으로 쌓지 않은 성채가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요? 한연맹의 맹도들이라면 모두들 시우 님의 품 안에서만 살길 바라지 않을 거예요.”
시우가 훽 고개를 돌렸다.
시우의 모습에 세아가 실수를 한 건 아닌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옳은 말이라곤 하지만 듣는 이가 쓰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말만은 아닐 테니까.
“……삼백까지 줄여. 워프도 한계가 있고, 그 좁은 성당에 모든 인원이 들어갈 수 없을 테니까.”
시우의 말에 세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그때 연구소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청룡과 우빈, 곽동원이 후다닥 들어왔다.
“찾았어! 범인은 이 외국인이었어!”
우빈은 손 안에 든 사진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 곧장 외교부를 통해 범인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결과가…….”
곽동원이 벅찬 감정을 내비치며 이야기를 하다 세아에게 말을 빼앗겼다.
“루체 시국의 천사 중 하나예요. 한연맹에 오지 않은 천사.”
“네? 천사요? 어, 어떻게?”
“범인을 알았으니 구출할 방법을 강구해야죠. 안 가실 건가요?”
한세아의 말에 제갈청룡, 우빈, 곽동원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시우는 아무도 없는 연구소 안에서 패널 속의 외국인을 보며 이를 갈았다.
으드득.
“그렇게 악마가 필요하다면 보여주마.”
* * *
곽동원의 대응은 신속했다.
한연맹이 한국 상계에서 미치고 있는 영향뿐만 아니라, 한연맹 내부에서도 이번 사태에 관해서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곽동원 또한 그들과 같이 분노했다.
한연맹을 비롯한 시우 일행은 그동안 무고한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그것은 타국의 상계를 공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우는 매번 일반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그런 행동의 대가가 이런 것이라는 것에 더욱 분노한 것이다.
특히나 상대가 루체 시국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분노는 기름을 부은 듯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절대선을 표방하는 이들이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곽동원은 외교부와 상계 정보 세력들을 최대한 압박하여 루체 시국과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한연맹의 간부 회의실.
시우를 위시한 한연맹 내부와 상계의 대표인들이 양옆에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바빴겠지만 오늘은 그 누구의 얼굴에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잠시 뒤 회의실 정면에 위치한 패널이 켜지고 그곳에서 성하 마첼리노가 대주교와 나타났다.
-한국 상계의 분들은 처음 보는군요. 루체의 마첼리노라고 합니다.
“한국의 최시우입니다.”
-당신이 최시우군요.
“안면도 없는 사이에 거한 선물을 보내셨더군요.”
마첼리노가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유머 감각이 있으신 분이군요.
“내 보답이 성에 차셨기를 바랍니다.”
-덕분에 루체 시국엔 큰 축제가 열렸습니다.
마첼리노는 여전히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그쪽이 데려간 민간인은 돌려주시죠.”
시우의 말에 마첼리노는 답이 없었다.
대신 대주교가 마첼리노에게 뭔가 귓속말을 전했다.
-이번 기회에 루체 시국에 방문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계의 인간은 상계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불문율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대와 인연을 맺었을 때부터 이미 상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드득.
시우가 쥐고 있는 의자의 팔걸이 부분이 부서졌다.
세아는 놀라 시우의 얼굴을 보았지만, 시우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니, 절대선을 표방하는 것 치곤 참으로 얄팍하군요.”
-우리는 4백 년에 걸쳐 악마와 싸웠습니다. 그들이 어떤 족속인지는 잘 알고 있지요.
마첼리노의 말을 듣던 남궁혜자가 나섰다.
“아무리 루체 시국의 일이라 해도, 민간인을 건든 것을 알게 되면 전 세계의 상계 세력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마첼리노가 고개를 돌려 남궁혜자를 바라봤다.
대주교는 다시금 귓속말을 해왔다.
-우리가 주시하는 건 최시우 뿐만이 아닙니다. 한국 상계 전반에 걸쳐 그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도 조사하고 있습니다. 단지 이 일은 시작에 불과할 뿐. 그대들도 어서 악마의 유혹을 하루빨리 끊고 아버지의 품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감히!”
남궁혜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미스터 최. 당신이 얻은 힘은 인간이 가져서도 탐해서도 안 되는 힘입니다. 스스로 회개하여 용서를 구한다면, 우리 루체 시국은 그대의 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서 말입니까?”
-…….
마첼리노가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시우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말을 이었다.
“난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를 악마로 만든 것은 바로 그대들이란 걸. 그대들은 기억하기 바랍니다.”
마첼리노가 깊게 숨을 들이쉬는 모습이 보였다.
화면은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