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단단한 두 다리가 빌딩처럼 서 있다. 그 위로 이어진 거대한 몸통과 트레일러를 이어 붙인 듯 단단해 보이는 팔까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크 데몬이 귀여워 보일 정도로 엄청난 위용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쐐애애액.
단지 가볍게 팔이 움직였을 뿐인데, 공기가 찢어 발겨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콰콰쾅!
거체의 주먹이 아크 데몬을 때렸다.
콰드드득.
아크 데몬이 서 있던 곳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처참하게 파인 상태였다.
“모두 피해요!”
넋을 잃고 있던 한연맹의 사람들에게 한세아가 절규하듯 외쳤고, 한연맹의 무인들은 전력을 다해 발을 놀렸다.
한세아의 정령이 거체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정소빈의 살기 가득한 검이 거체의 팔을 공격했고,
우빈의 태산과 같은 검이 거체의 발을 공격했다.
다시 몸을 일으킨 거체는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보고만 있을 뿐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공격이 거체에 닿기 직전, 거체의 두 눈이 번쩍거렸다.
펑.
퍼퍼펑.
퍼퍼펑.
흐릿한 형체의 기류가 거체에게서 흘러나와 정령과 두 사람을 공격했다.
정령은 그 자리에서 풍선처럼 터져 버렸고, 소빈과 우빈은 날아들었던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소문주님과 도련님을 잡아!”
이미 정신을 잃은 듯 핏물을 뿜으며 날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 태백정가의 무인들이 필사적으로 발을 놀렸다.
“재미난 장난감을 가지고 있구나.”
거체가 시우를 바라봤다.
그때 거체의 뒤로 파공음이 울렸다.
피요요옹
거체가 급작스레 몸을 돌렸다.
하늘의 구름을 대해처럼 가르며 미티어 스웜이 작렬하고 있었다.
펑! 펑! 펑!
거체가 양손을 들어 교차하자 미티어 스웜이 반투명한 막에 막혔다.
곧이어 계속되는 공격에 막이 깨어지고, 몇 개의 미티어 스웜이 거체를 때렸다.
그때마다 거체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비틀 거렸다.
[거인의 손][오버 더 아머]
거체의 사방에서 마법진이 생성된다, 단단한 갑주를 낀 거인의 손은 그대로 거체와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졌다.
저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거인의 손이 때리는 부위들은 모두 거체의 관절 부분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거인의 손이 사라질 때마다 거체의 몸이 휘청거렸다.
바닥에 남아 있던 아크 데몬 두 마리가 거체의 발에 찰싹 붙었다.
갓난아이가 다 큰 어른의 다리에 매달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아크 데몬의 끔찍한 비명과 함께 거체가 휘청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거인의 손][오버 더 아머]
뒤로 넘어가려는 거체의 전면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거체는 그대로 무력하게 뒤로 넘어가려는 듯 보였다.
그때, 거체의 상반신이 180도 회전을 하더니 넘어가는 것에 저항을 했다.
그리고 두 팔로 바닥을 차고 벌떡 일어나 다시금 몸을 돌렸다.
육중하고 거대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기민한 그 움직임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시 대단하군.
거체에서 커다란 기계음이 울렸다.
“역시 미국이었나?”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건 없어. 그러려는 의도만 있을 뿐이지.”
-그런가?
거체도 그닥 아쉬움이 없다는 말투였다.
“원하는 대로 되진 않을 거다. 청룡!”
시우의 외침에 뒤에서 방을 만들고 있던 제갈청룡이 곧장 진법을 전개하려 했다.
-그렇겐 안 되지.
거체의 음성과 함께 시우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몸이 붕 떠올랐다.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에 무인들은 천근추를 써보거나 초상비를 시전해보았지만 자신들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부유 마법을 펼치고 있던 시우는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지 날아가려는 제갈청룡을 잡았다.
“방을 펼치겠습니다.”
“어서!”
제갈청룡이 거체에게 방을 쏘려는 찰나 거체가 손가락을 퉁 튕기더니 시우와 제갈청룡의 몸 또한 빠르게 뒤로 날려버렸다.
-오늘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말리러 온 거지.
거체는 쓰러진 다섯 천사들을 수습하여 자기 몸체의 문을 열어 넣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좋은 관계로 발전하긴 힘들 것 같군.
쐐애애애액 쿵!
거체의 팔이 땅바닥 깊숙한 곳에 박혔다.
거체는 깊은 상자 속의 물건을 찾듯 버둥거리다가 땅속 깊숙한 곳에서 손에 간신히 들어오는 구체를 꺼내었다.
-이건 내가 잘 사용할게.
거체가 바닥을 박찼다.
거체의 영향으로 무거운 흙과 바위가 쓰나미처럼 솟아올라 한연맹을 덮쳤다.
한연맹의 무인들은 순식간에 매장당할 위기였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함에 질끈 눈을 감은 무인들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슬며시 눈을 뜰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피해!!!”
한연맹 전체를 가득 메웠던 흙과 바위가 공중에 뜬 채였다.
황금빛 빛 무리가 그 거대한 흙과 바위를 떠받치고 있었고, 시우는 양손을 든 채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어서!!!”
“모두 전력을 다해 피해요!”
무인들이 자신이 피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흙과 바위가 그대로 한연맹을 덮어 버렸다.
무인들을 대피시키다가 시우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한세아가 불안한 듯 외쳤다.
“맹주님! 맹주님!”
대답은 없었다.
“피했겠죠?”
소빈이 불안한 듯 말을 이었다.
“순간이동 마법이 있잖아.”
시우를 믿는 우빈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한세아의 표정은 펴지질 않았다.
“고서클 마법을 연달아 펼치고도 괜찮을까요?”
설마 하는 생각에 내뱉은 말에 소빈과 우빈의 눈동자도 놀라움으로 커졌다.
한세아는 곧장 미화문의 전투 인원을 불렀다. 이미 한 차례 정령이 역소환 당하여 재소환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 터였다.
“헙! 아, 안에 계십니다!”
토(土)소성의 정령을 가진 박철호가 놀란 듯 외쳤다.
“숨은?”
“숨은 쉬고 계시고요!”
“뭐해요! 당장 꺼내세요!”
“그, 그게, 제가 들기엔 너무 무겁습니다…….”
“맹주님, 공간 일부를 확보할 수는 있죠?”
“네, 이미 했습니다.”
“뭐하세요! 다들 빨리 흙과 바위를 치우세요!”
한연맹의 무인들이 필사적으로 새로 생긴 흙산에 달려들었다.
한세아, 우빈, 소빈은 마치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미친 듯이 흙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된다니까.”
병실에 누워 있는 시우가 말했다.
한세아의 손이 찰싹 시우의 팔을 때렸다.
“얼마나 놀란 지 아세요?”
“어쩔 수 없잖아. 마나 고갈은 오랜만이라.”
시우가 머쓱하게 이야기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는 남궁혜자를 비롯한 사람들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무인들이 자네한테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 아는가? 자신들 때문에 맹주님이 위험할 뻔 했다고.”
하루를 꼬박 흙산을 파고 들어가서야 시우를 발견한 무인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친 듯 초췌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젊은 청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인들은 하나같이 스스로가 나서서 시우를 병원으로 옮기려 했다. 제갈청룡이 나서서 그냥 기절한 거라 이야기하자 그제야 다들 한숨을 돌렸다.
“제가 지켜야 할 사람들인데요. 뭐.”
시우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런 소리일랑 하지 말게. 그들도 무인이야. 자신들의 몸 하나 쯤은 지킬 수 있네.”
“이제 괜찮으니 돌아가라고 하세요.”
시우의 병실 밖에는 무인들이 하나같이 빼곡하게 복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정을 찾아야 한다는 제갈청룡의 말에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무인들이었다.
정순지가 무인들을 해산시키느라 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못 간다. 맹주님이 무사한 걸 보기 전까지 움직일 수 없다! 등의 소리를 하던 무인들은 남궁혜자의 엄한 소리에 깨갱하며 모두 물러갔다.
“근데 정말 대단하더라. 그 로봇 미국 상계 거였지?”
우빈이 전날의 일을 상기했다.
적이기에 앞서 그 정도로 거대한 물건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놀람과 더불어 약간의 동경을 가진 모습이었다.
“미국 상계의 힘은 어느 정도나 되죠?”
시우가 남궁혜자에게 물었다.
이미 상계간의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 현재 가시화된 전력 차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이 있는 남궁혜자의 정보가 가장 최신의 것이었다.
“반세기 전에 이미 최강이었다. 유럽과 일본의 상계들이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미국의 힘 때문이었으니까.”
“어떤 힘을 쓰는 거죠? 아까 보니 마법을 쓰는 것 같던데.”
“기계에 마법을 접목시킨 마법공학이 그들의 주력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게다.”
마법공학이라는 말에 우빈이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 우빈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무슨 소리죠?”
“전쟁이 끝난 후에, 아니, 전쟁이 끝나기 전에도 미국은 세계의 모든 상계의 힘을 연구하곤 했었다.”
“모든 힘이요?”
“그래, 유럽의 마법으로 시작해, 중국의 무공, 일본의 야토가미의 술, 소련의 원소마법과 인도의 브라만까지. 전쟁을 틈타 세계의 모든 힘을 미국으로 가져갔다고 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교류가 없었기에 그들이 뭘 어떻게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
“결국, 그 모든 힘에 가지고 있다는 거군요.”
“……그렇겠지.”
남궁혜자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낮아졌고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우는 그들의 분위기를 읽고는 웃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야토가미도, 중국 상계도 우리에게 쉽지 않은 상대였어요.”
“한연맹 소속의 모든 무인들이 모이고 있네.”
남궁혜자가 말했다.
“그들 모두 현 사태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
“쉽게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 존이란 인간도 크게 전쟁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럼 다행이네만, 우리가 당한 피해는 쉽게 보상 할 수 없을 거야.”
“피해가 어떻게 되지?”
“건물이 열여덟 채, 자산 피해액은 오십 억이 조금 넘어요. 가장 큰 피해는 빌리언트고요.”
“……비싸게 값을 받아야겠네.”
“어찌 할 텐가? 당장이라도 모두 전쟁을 준비시킬 수 있어.”
“일단은 조금 지켜보겠습니다. 루체 시국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거고, 무엇보다 우리측의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건 유의미한 결과니까요.”
“우리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네.”
정순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시우는 대의보다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가 한국 상계의 중·소 세력까지 껴안고 무한정 지원을 하는 것은 그들 하나하나의 생존력을 더욱 키우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한국 상계 전체는 시우 이전보다 이후에 두 배 이상의 무력상승이 있었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이들은 때때로 생명보다 대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 무의미한 전쟁이 많이 일어나고, 무고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는다.
정순지는 최소한 시우가 있는 동안은, 또한 그가 변하지 않는 동안은 무고한 전쟁으로 생명이 죽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겁이 많아서요.”
그때, 시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소빈이 시우의 핸드폰을 시우에게 건넸다.
“여보세요?”
시우를 지켜보던 이들은 시우를 위해 하나둘 병실을 나가고 있었다.
“네…… 네. 안녕하세요. ……네 제가 시우입니다. ……언제부터요? 아뇨, 연락은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시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링거를 꽂아둔 주사 바늘을 단숨에 뽑아내었다.
시우의 팔에서 피가 흘렀고, 한세아는 사색이 되었다.
“괜찮아.”
시우의 손에서 하얀빛이 흘러나왔다. 피를 쏟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시우의 팔에는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핏자국만이 남았다.
“더 쉬셔야 해요.”
“지혜가 어제부터 연락이 안 된대.”
“네?”
시우는 말없이 잠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시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한세아와 소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