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인천공항에선 또다시 때아닌 인파의 집중에 직원들이 진땀을 뺐다.
연예인이나 월드 스타가 방한한 것도 아니었고, 몰려든 인파들 대부분이 여행객의 차림을 한 젊은 사람들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들은 정체불명의 앓는 소리를 내며, 핸드폰 셔터 버튼 누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과열되는 인파에 직원들이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아 보지만 소용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공항 안전을 담당하는 여직원은 사람들을 막아서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금발의 머리, 백옥을 깎아 놓은 듯한 하얀 피부, 그리스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듯한 완벽한 비율의 콧대와, 수정을 박아넣은 듯 아름다운 눈망울. 거기에 알게 모르게 퇴폐미를 발산하는 미소까지.
인파를 막아서던 여직원은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를 꺼내어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있던 남자가 헤드폰을 벗으며 말했다.
“지워라.”
그가 나직하게 읊조린 말에 사람들이 멍한 눈동자로 자신의 핸드폰에서 사진을 지우기 시작했다.
“돌아가라.”
여행객들은 줄에 이끌려 가듯 터벅터벅 걸으며 자신의 캐리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어디로 오라 그랬지?”
귀찮은 표정으로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에 붉은 깃털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핸드폰을 꺼내며 함께 떨어진 듯했다.
깃털을 집어 보던 남자는 여전히 피곤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미 다섯이나 왔는데, 나까지 갈 필요 없겠지.”
남자는 깃털을 주머니에 넣곤 핸드폰의 전원을 꺼 버렸다.
“한국에 오는 외국인들은 명동에 꼭 들려야 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남자는 곧장 공항 밖에 대기 중인 택시에 몸을 실었다.
기다리던 외국인의 탑승에 싱글벙글하던 기사가 환하게 인사를 했다.
“헬로~ 웰 두유 원트…….”
“명동 가주세요. 아저씨.”
“…….”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던 기사의 귀에 왠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미터기 안 켜세요?”
유창한 한국어에 기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가 원하던 호갱이 아니었다.
* * *
광채는 온통 검은빛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주변의 기류까지 뿌리고 있었다.
분명 미카엘의 성력에 의한 것이 분명했음에도 그 효과는 이미 미카엘의 의지를 벗어난 듯 제멋대로 폭주하고 있었다.
“왜 그러지? 당신이 바라던 모습이 바로 이것 아닌가?”
“전투 준비!”
미카엘이 말과 함께 품속에서 커다란 창을 꺼내었다.
다른 천사들도 즉각 그와 행동을 함께했다.
[천사강림]
[1번째 지배의 천사]
미카엘의 몸이 붕 떠오르며 그의 주위로 환한 광채가 어렸다. 그의 등에선 여섯 장의 날개가 나타났고, 온몸이 황금빛 갑옷으로 휩싸였다.
투구까지 갖춰 쓴 미카엘의 모습은 상상 속에서나 보던 치천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천사강림]
[2번째 결정의 천사]
레미엘을 비롯한 다른 천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6번째 천사인 라구엘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우가 발산하는 끔찍한 마기에 두려움을 느낀 천사들의 본능적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천사가 강림한 한연맹의 부지는 마치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미화문도들은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한세아의 외침에 미화문의 전투원들이 일제히 진법을 펼치며 모여들었다.
“정가의 무인들은 정렬하라!”
남궁혜자의 외침에 태백 정가의 무인들도 검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빈아, 넌 검진에 안 들어갈 거지?”
제갈청룡이 우빈에게 물었다. 우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미 제가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어요.”
소빈이 한세아에게 다가갔다.
“문주님, 문주님과 함께 움직여도 될까요?”
“그럼 제가 영광이죠!”
한세아가 빙긋 웃었다.
한연맹의 일사불란한 행동에 당황한 것은 되레 천사들이었다.
천사의 강림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엄청난 파급력을 미친다.
성심이 선하지 못한 자는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 끔찍한 고통에 빠져들고, 상계의 대단한 무력을 가진 자도 스스로의 무력감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들은 언제나 싸우지 않고 이겼었다.
하지만 한연맹은 그런 그들의 예상을 가볍게 뒤엎고 차분하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미리 작전을 짜 놓은 것처럼 다섯 천사를 상대하기 위한 다섯 개의 진영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떤 진영은 기백에 달하고, 어떤 진영은 한 명뿐이었다.
혼자서 오연히 서 있던 시우가 말했다.
“지옥에 가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죽이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미화문의 전투원 중 누군가 말했다.
“맹주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난 아마도 지옥이 이미 확정된 거 같은데요?”
“그럼 따라가겠습니다!”
그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일어났다.
“안 올 건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시우가 미카엘에게 말했다.
미카엘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의 몸이 수평으로 뉘어지며 들고 있던 창끝이 시우의 심장을 향했다.
“악을 소멸하라!”
한 줄기의 빛으로 현현한 미카엘이 시우를 관통했다.
쐐애액. 펑!
번쩍하는 순간 미카엘의 신형이 한연맹의 건물에 처박혀 있었다.
미카엘의 창에 꿰뚫렸던 시우의 신형은 마치 연기처럼 퍼졌다가 스르르 본래의 형태를 찾았다.
“건물 부순 거 말이야, 루체 시국에 청구하면 보상해 주겠지?”
“닥쳐라! 간악한 악마야!”
미카엘의 신형이 다시금 시우에게 쏘아졌다.
쇄애액. 퍼퍼퍼퍼퍽!
시우를 꿰뚫었다고 생각한 미카엘의 창은 검은 연기만을 헤집어 놓고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어찌나 빠른 속도였던지,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바닥이 갈색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잔디도 비싼 건데.”
“이익!”
미카엘의 투구 사이로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다시금 떠오른 그의 몸이 빛으로 현현하려 할 때, 사방에서 거인의 손이 불쑥 튀어 나왔다.
텁. 텁. 텁. 텁.
마치 손 쌓기 놀이를 하듯, 일제히 미카엘을 감싼 네 개의 거인의 손이 미카엘을 움직이지 못하게 옥죄었다.
“끄아아아악!”
미카엘의 황금색 갑옷이 들썩거릴 때마다 거인의 손이 조금씩 풀릴 듯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쿠르르르릉.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검은 구름으로 가득해졌다.
커튼을 친 듯 어두워진 하늘은 태양 대신 뇌전을 뿜기 시작했고, 몇 번의 숨을 쉬는 사이 푸르른 번개가 내려쳐 미카엘을 공격했다.
번쩍. 콰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미카엘의 외침과 함께 느끼한 탄내가 사방에 퍼졌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미카엘의 외침에 검은 구름을 뚫고 황금색의 빛무리가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를 비췄다.
그의 갑옷 사이사이에서 눌어붙은 살점들이 뿜어내던 연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화상으로 다쳤던 피부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미카엘의 외침과 함께 그의 사지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작은 미카엘을 잡고 있던 거인의 손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결국 그를 풀어내고 사라졌다.
거인의 손에서 빠져나온 미카엘이 순식간에 창을 들어 시우를 향해 찌르며 외쳤다.
-쏘피오soffio(빛의 브레스)
창끝에 모인 응축된 성력이 폭발하듯 시우에게 쏘아져 나갔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무서운 기세에 한연맹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미카엘이 쏘는 빛에선 설명하지 않아도 무척이나 고귀하고 성스러운 느낌이 났다.
아마도 악을 멸하는 신의 빛.
그리고 그것이 진짜라면 시우에겐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마왕의 현신과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안 돼!”
저 멀리서 남궁혜자가 절박하게 외쳤다.
하지만 너무도 빠른 빛의 움직임에 시우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온몸으로 빛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찰나의 시간.
단 몇 초 상간에 다른 천사들을 상대하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시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우는 거대한 빛의 완전히 먹혀 버린 뒤였다.
* * *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본능적인 끌림을 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명동의 한복판을 걷는 이 남자는 인간이 마땅히 끌릴 수밖에 없게끔 아름답게 만들어진 피조물이었다.
마치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의인화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보석 같은 남자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남자는 가판에서 산 닭꼬치 하나를 씹으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워낙 사람이 많았기에 양념이라도 묻힐까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어쩐지 사람들은 이 남자를 은근히 피해가고 있었다.
“악마가 현신한 것 치곤 너무 평화롭군.”
이 남자에게 한국은 언제나 그런 곳이었다.
별 특색은 없지만, 발전한 나라. 편리한 시설이 갖춰져 있고, 범죄율도 높지 않다.
마땅히 말썽을 부리는 상계의 세력도 없었고, 악의 자취는 더더욱 그러했다.
한국은 몇 번 와보지 않았지만, 그에겐 심심한 나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나라에 어떻게 악이 생성될 수 있겠어.”
악은 인간을 통해서 현신한다.
악이 현신하기 위해선 인간 또한 그만큼의 토양이 되어 주어야 한다.
절망, 고통, 비탄, 질투, 살의, 탐욕 등등. 극한값 이상의 악의가 악을 형성한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악이 자라기엔 너무 평화로운 나라였다.
“화병이 있는 걸 보면, 악의를 스스로의 가슴 속에 품고 다녀서 그러는지도 모르겠지.”
화병으로 기반한 악마가 현신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는 그였다.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지나가는 그의 시선에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흑요석처럼 검은 머릿결에 마치 천사의 피부처럼 하얀 얼굴. 서구인의 선명한 이목구비는 아니지만 동양인의 기준에선 충분히 선명한 이목구비까지 참으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천사로서 인간의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천사인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건 다른 것 때문이었다.
‘내 착각인가?’
이야기를 해 보면 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남자는 여성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자 여성이 잠시 자신의 뒤를 보곤 뚱하니 그를 바라봤다. 자신을 부른 게 맞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네. 그쪽한테 말 건 거 맞아요.”
“네. 안녕하세요.”
여성 또한 가볍게 인사를 했다.
남자는 당황했다. 통상 자신이 이 정도 나이대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을 때 나오는 반응이 아니었던 것.
‘아아, 최면을 너무 강하게 걸었나?’
남자가 묶어 두었던 자신의 매력을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남자 주위로 지나가는 여성들이 하나둘 남자를 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시죠?”
매력을 풀었지만 여성의 태도는 그대로였다.
남자가 말이 없자, 여성은 다시금 자신이 보고 있던 남자 옷을 하나둘 유심히 살펴보았다.
‘말도 안 돼.’
남자는 조금 더 자신의 매력을 풀어내었다.
여성들의 발걸음이 하나둘 멈추고, 남자들도 남성에게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남자가 성력의 기운을 여성에게 쏘아 내었다.
마음을 굴복시켜 진실을 얻어 내는 힘이었다.
“뭔데요?”
남자는 시험 삼아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죠?”
“제가 알려 드려야 하나요?”
그녀의 대답에 남자가 다시금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성력을 쏟아부었다.
남자의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여성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에 껴 있던 반지가 반짝이더니 그녀의 눈앞에 흑색의 반투명한 막을 만들어 내어, 빛을 막아 내었다.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번개처럼 손을 뻗어 여성의 손목을 잡았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남자가 손에 끼인 반지를 보다가 여성을 보며 말했다.
“타락한 악마와 무슨 관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