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시우의 아버지인 최창호가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집안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카, 카메라! 카메라 어딨지?”
“핸드폰으로 찍으면 되잖아!”
“그래도 카메라 화질은 못 따라오지!”
“거기 장롱 안에 봐봐.”
“이거 배터리 없는데?”
시우의 어머니인 김서영도 다르지 않았다.
“민서야! 이거 어때? 엄마 괜찮아 보여?”
민서는 어울리지도 않는 화장을 한다며 엄마의 옷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대충 대답했다.
“어어, 괜찮아. 괜찮아.”
“제대로 안 볼래! 그리고 넌 왜 그렇게 화장을 찐하게 해! 고등학생이!”
“엄마! 요즘 애들 다 이 정도는 해! 엄만 알지도 못하면서!”
“어쨌든 오빠 서울대 가는 거 봤지? 너도 눈치 있게 맞춰서 가야 할 거다!”
엄마의 엄포에 민서는 시무룩해졌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새벽 운동을 하고 돌아왔을 시우는 웬일로 부스스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라구엘과의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돼 존이 당당하게 한연맹에 다녀갔고, 그가 남긴 잔해를 분석하며 다음 상대 또한 쉽지 않을 것이란 게 확정됐다. 이 상황에서 시우는 그동안 준비해 왔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서 보내고 있었다.
“아함. 입학식은 안 가도 된다고 했다니까.”
시우가 하품하며 이야기하자 각자 바쁘게 준비하던 세 사람이 한꺼번에 답했다.
“안 가긴 어딜 안 가!”
“안 가긴 어딜 안 가!”
“안 가긴 어딜 안 가!”
시우는 잠이 확 깼다.
“히끅!”
* * *
입학식은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입구부터 인산인해였다.
분명 막힐 거니까 어찌 되었든 빨리 가야 한다고 아버지가 재촉하는 바람에 시우를 포함한 네 사람은 제대로 해가 뜨기도 전에 서울대로 출발했다. 덕분에 시우는 차 안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때워야 했다.
그렇게 일찍 출발했지만, 서울대 안으로 밀려드는 차량으로 인해 입구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서울대의 상징인 ‘샤’의 조형물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쩐지 차내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민서는 이제 곧 다가올 고3의 무게가 어깨를 잔뜩 짓누르고 있는 듯했고, 어머니는 자꾸만 뒤를 돌아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전석에선 코를 먹는 소리와 작은 흐느낌이 자꾸만 들려왔다.
“아버지 울어요?”
“어? 어. 아냐. 날씨가 아직 추워서 그런지. 콧물이 나오네.”
짐짓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에는 울먹임이 가득했다.
어머니인 김서영이 휴지를 건네며 최창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생 많았다. 아들아.”
최창호는 그 말만 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 전방을 주시했다.
시우는 머쓱함을 느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어색한 상황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 * *
입학식을 마치고 나오자 시우는 서둘러 돌아가려 했다.
입학식 내내 최창호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를 따라 지켜보던 몇몇 부모들도 같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최창호는 벌게진 눈으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성화였다. 결국 입구에 있던 꽃장수에게 산 꽃다발을 억지로 시우에게 안겨 주고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하아…….’
그렇게 최창호까지 시우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민서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진 촬영까지 모두 마치고 가족들을 이끌고 외식이라도 하려고 가는 찰나,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시우 가족의 발걸음을 멈췄다.
“시우야!”
한쪽에서 마찬가지로 입학식을 마치고 온 듯한 소혜가 손에 쥔 꽃다발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는 친구니?”
소혜가 다가오자 최창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같은 반 친구.”
시우가 건조하게 말했지만, 최창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입학식 잘했어?”
“응. 넌?”
“우리 부모님 사진 찍으시겠다고 바쁘셔. 나는 안중에도 없고.”
“아, 인사드려. 우리 부모님이야.”
“아, 안녕하세요. 시우와 같은 반에 다녔던 김소혜라고 합니다.”
소혜가 꾸벅 인사를 하자 최창호와 김서영은 입가에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은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요. 우리 시우 잘 부탁해요.”
“우리 시우랑 친해요?”
두 사람의 행동에 시우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우빈이는?”
“글쎄. 어딘가에서 기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지 않을까? 포털에 기사 많이 떴던데.”
“아아.”
시우, 소혜, 우빈 세 사람 모두 서울대에 합격이 결정되었지만 가장 시끄러웠던 건 우빈의 소식이었다.
1, 2학년 때의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 합격한 것을 두고 매스컴에서 문제 삼았던 것이다.
하지만 태백 그룹의 이미지가 다른 재벌 그룹에 비해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또한 우빈이 수시가 아닌 정시로 붙었기 때문에 논란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만나기 전에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네.”
“그치? 나도 그래서 일부러 연락 안 했어.”
키득거리며 웃는 소혜가 최창호와 김서영에게 인사를 한 후 자신의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소혜의 말대로 우빈을 만나면 더욱 피곤한 일이 생길 거라 생각한 시우는 가족들을 재촉했다.
그때, 다른 곳에서 쩌렁쩌렁하게 시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시우!”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시우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정순지를 비롯한 일가족 전원이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 게다가 사진을 찍으려는 취재진까지 대동하고 오는 바람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 탓이었다.
“시우야 아는 사람이니?”
김서영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우에게 물었고 최창호는 우빈의 일행을 보고 바짝 얼어붙었다.
“태, 태백…….”
“응? 당신 알아요?”
“태, 태백그룹…….”
“태백그룹이요?”
“태백그룹 일가족이잖아!”
태백그룹은 대한민국의 다른 재벌들과는 달리 대중에게 이미지가 좋았다.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가문의 역사가 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대표 기업 중 하나로서 언제나 선행을 베풀었던 과거 덕분에 사람들은 태백그룹을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가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턱걸이로 들어와 놓고는 입학식은 참석하고 싶었나 보네?”
시우가 툴툴거리며 이야기하자 최창호와 김서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상대의 부모가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있는 법.
그 정도를 넘은 말에 최창호가 먼저 사과를 하려는 찰나.
정순지가 허허 웃으며 최창호에게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시우 아버님 되십니까?”
“아! 아! 네! 네! 그렇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자식 교육을…….”
“허허!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시우 군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아이니까요.”
“네?”
“아? 모르셨습니까? 사실 우리 손자가 머리가 안 좋아서 대학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시우의 가르침을 받아 겨우 이렇게 턱걸이라도 들어오게 된 겁니다.”
“가르침이요?”
“허허, 시우 군. 아버님께 말씀 안 드렸나?”
최창호와 김서영은 답변을 바라는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봤다.
“저 꼴통 공부시키느라 까딱하면 이 학교 못 올 뻔했어요.”
다시 한번 최창호와 김서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을 때. 정형진이 최창호에게 다가왔다.
“이제서야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우빈이 애비인 정형진이라고 합니다.”
“네네.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말고요.”
정형진은 태백그룹의 실제적인 총수로 태백그룹의 전반을 이끄는 사람이었다. 샐러리맨인 최창호가 그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드님을 잘 키워주셔서. 저희 아들이 너무 많은 덕을 봤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정형진이 최창호의 손을 부여잡으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굴자 최창호는 더욱 정신이 없어졌다.
“아버지. 보는 눈들이 많아요. 조금 참으세요.”
“아아, 그렇지. 내가 참. 주책없이.”
소빈이 나서서 정형진을 말렸다. 최창호는 아름다운 처자가 기품 있게 자신에게 인사하자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소빈이라고 합니다. 시우……와는 친한 누나 동생으로 지내고 있어요.”
“아, 그, 그렇습니까?”
“이럴 게 아니라. 이렇게 된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하는 건 어떨까요? 저희가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정형진의 말에 최창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김서영과 시우를 번갈아 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했다.
“그렇게 하세요.”
시우와 우빈의 일행이 움직이려 할 때.
다시금 시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우야!”
인파에 파묻힌 목소리에 주인을 분간할 수 없었던 시우는 피곤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가 서서히 인상을 폈다.
그곳에서는 온몸에 환한 아우라를 풍기며 자신만큼이나 아름다운 꽃을 든 한 여성이 시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신입생들과 그들의 부모도 마치 연예인을 보듯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입학 축하해. 이제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네?”
여성은 이내 시우와 시우의 부모님을 번갈아 보며, 시우에게 눈치를 주었다.
“아, 인사드려, 우리 부모님이셔.”
“안녕하세요. 홍지혜라고 해요.”
두 사람은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심지어 민서 또한 옆에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소빈도 어느 곳에 가건 눈에 띄는 미녀라 할 수 있었지만, 홍지혜는 그녀와는 또 다른 강렬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율 좋은 몸매와 조화를 이루는 얼굴, 맑은 피부와 목소리까지. 그녀는 일반인은 가질 수 없는 아우라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최창호와 김서영은 설명하라는 듯 시우를 노려보았다.
“아, 여자 친구야. 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
“!”
“!!”
“!!!”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시우의 태도에 최창호와 김서영은 두 눈을 부릅뜨며 놀랐다.
특히나 한쪽에선 정소빈이 놀란 표정을 쉽사리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가, 같은 학교에 다녔던 거니?”
“아니, 원래 이 학교 다니고 있었는데.”
“뭐?”
“아, 제가 시우보다 2살 많아요.”
“!”
“!!”
“!!!”
“!!!!”
이제는 두 사람을 넘어 우빈의 가족들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특히나 정순지를 비롯한 우빈의 가족들은 소빈의 마음을 알고 있는 만큼 이 자리가 편하진 않았다.
“흠흠. 저, 시우 아버님. 우선 우리는 좀 빠져주는 것이 어떨까요?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그,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갑자기 쿵짝이 맞는 듯 썰물처럼 어른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우빈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 소빈이 홍지혜 쪽으로 움직였다.
우빈이 다급하게 전음을 보냈다.
-누나! 죽이면 안 돼! 절대! 살인은 나쁜 짓이야! 어!
소빈은 가볍게 지풍을 쏘아 우빈의 마혈을 짚었다.
소빈이 지혜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지혜 또한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소빈이 지혜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안녕하세요. 시우 친한 누나인 소빈이라고 해요.”
어쩐지 소빈이 시우를 부르는 호칭이 어색해지지 않은 것은 우빈만의 착각은 아닌 듯 보였다.
“친한…… 누나요……?”
지혜가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시우를 바라봤다.
‘왜 나를 보고 그래.’
시우는 공간이동 마법을 쓰고 싶은 기분을 강하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