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연구소 앞, 곽동원이 한 남자 옆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20대 초로 보이는 금발의 남자는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시우의 시선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평소의 그는 언제나 곽동원의 방문을 반겼지만, 지금처럼 외부인을 데리고 한연맹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불쾌감을 느꼈다.
곽동원 또한 자신의 행동이 시우에게 썩 유쾌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선 이 남자의 의견을 대놓고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무부 장관의 정식적인 요청을 통한 일이라…… 죄송합니다.”
사이에 낀 곽동원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무부라. 미국은 하계와 상계의 구분이 없나 보죠?”
시우의 물음은 곽동원을 향한 것이었지만 대답은 남자가 했다.
“그건 아니야. 그래도 다른 상계보다는 친정부 성향이 있는 편이지.”
“한국말을 할 줄 아는군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랍게도 한국어였다. 그것도 외국인이 구사하는 어색한 것이 아닌 토종 한국인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남북 전쟁 때 잠시 한국에 있었던 적이 있었거든.”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군요.”
“호오. 놀랍네. 땅속에다 연구소를 지은 건가?”
남자는 고개를 숙여 파란 잔디가 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알겠군요. 당신은 일전에 만난 그 사람은 아니군요.”
“아! 그건 그저 내가 어디 소속인지 밝히려고 한 것뿐이야. 그렇다고 아주 관련 없는 사람도 아니지.”
“답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분 같네요.”
남자는 그제야 웃으며 시우를 바라봤다.
“그쪽도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무슨 일로 온 거죠?”
“뭐지? 이건? 자아(自我)를 가진 기계라니.”
남자의 손엔 어느새 야구공만 한 빌리언트가 쥐어져 있었다.
[마스터. 이 자를 죽일까요?]
빌리언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 파공음이 빌리언트와 남자의 사이를 꿰뚫고 지나갔다.
툭.
빌리언트를 쥐고 있던 남자의 손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헉!”
“세상에.”
남자와 시우를 바라보고 있던 한연맹 맹도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자의 잘린 팔의 단면은 스파크를 튀기며 초록색 연료를 뿜어내고 있었다.
더불어 남자 옆에 선 곽동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남자는 떨어진 자신의 팔을 집어 들어 허탈하게 바라봤다.
“도럼프도 나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굴지 못 하는데.”
“미국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선 상대의 집에 놀러 가선 물건을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닙니다.”
“자아를 가진 기계를 어떻게 만든 거지?”
“한국어를 제대로 배운 건지 안 배운 건지 모르겠군요.”
“우리도 인공지능이라면 몇 개 가지고 있어, 시스템 전체를 관리하는 것부터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는 것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자아(自我)를 가지진 못하지. 어디까지나 프로그램과 기계로 만들어낸 것들이니까. 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네.”
“알려 줄 수 없는 건가?”
시우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곳엔 왜 온 거지?”
“……좋아. 내가 졌어. 이곳엔 너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온 거야.”
“미국 상계에서 당신의 위치는?”
“뭐, 쉽게 말하자면 도럼프가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정도?”
남자의 말에 한세아도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특히 옆에 서 있던 곽동원은 정말 딱 죽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단지 나의 정체가 궁금해서 왔다는 건가?”
“그것도 그렇고,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대화를 좀 하려고 왔지.”
“루체 시국을 말하는 거겠지?”
“그래.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 데 차라도 한 잔 주지 않겠나?”
“차를 마실 수 있는 기회는 이미 놓쳤어.”
“야박하네. 한국인의 정이 전혀 느껴지질 않아.”
“대화라 함은?”
“루체 시국과 싸우지 말았으면 좋겠어.”
“싸움을 바란 적 없어. 언제나 상대가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지.”
“이번엔 그렇다고 해도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미 너희를 비롯한 아시아 전체가 전력이 약화 되었거든. 이대로라면 세계의 균형선이 틀어져 버릴 거야.”
“그 이야기는 루체 시국에 하는 게 더 빠르게 해결될 텐데.”
“아, 이미 얘기했지. 그런데 그쪽은 들어먹지를 않아서 말이야.”
“농담이라도 하려고 온 건가?”
“아니 그건 아니고, 네가 루체 시국에 항복했으면 좋겠어.”
쐐애애액.
텅.
다시 한번 파공음이 울리고 다시금 남자의 다른 손이 잘렸다.
곽동원이 옆에서 울부짖었다.
“매, 맹주님!!!”
남자는 다시금 허탈한 눈으로 자신의 잘린 팔을 바라봤다.
“이거 꽤 비싼 몸인데.”
“헛소리의 대가치곤 저렴한 편이라고 생각해.”
“내 말은 진심이야. 일단은 항복을 하고, 그자들이 하고 싶은 하게 둬, 그다음에 일이 마무리되면, 내가 직접 한국을 상계이사국으로 선임하도록 조치할 테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군.”
“루체 시국은 무려 4세기에 걸쳐 흑마법과 싸워왔어. 그들이 흑마법에 반감을 가지는 건 당연한 거니까.”
“내가 왜 흑마법을 익혔다고 단언하는 거지?”
“나도 마법사니까. 네가 흑마법을 기반하여 마법을 익혔다는 것쯤은 알아.”
“뭐 제법 실력이 있다는 것은 알겠어. 그런데 내가 그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해?”
“역시…… 루체 시국의 힘을 잘 모르는군.”
“알아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도 루체 시국의 존재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는 것에서 새로운 단서를 알 수 있었다는 거지.”
“뭐??”
“지금 여기 당장에 엎드려 내 구두라도 핥을 기세인 남자의 표정을 봐. 루체 시국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이 사람이 보이는 반응을. 그리고 여기 주위에서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알겠지. 그들과 너의 가장 큰 차이점을.”
“…….”
“용기가 있거나 대범한 것과는 달라. 내가 힘을 가져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지. ……너는 다른 세계에서 왔구나.”
“그거 질문인가?”
“그래, 질문이라고 하지. 너는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냐?”
“내 답은…….”
한연맹 맹도들의 시선이 시우에게 쏠렸다. 그동안 그의 탈인간적인 강함에 대해선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쉽사리 물어보지 못 했다.
그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면 그것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거다.”
“역시 쉽게 대답해 주지 않는 건가?”
“나도 하나 묻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순순히 대답할 거 같나?”
“자아(自我)에 대해서 관심 있다고 하지 않았나?”
“질문이 뭐지?”
“루체 시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미국은 이 전쟁에 끼어드나?”
“…….”
남자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고민하는 듯 멍하니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이야기했다.
“미국이 너를 구해주는 일은 없을 거야.”
“참견하지 않겠다는 걸로 알지.”
“좋아. 내 차례지? 지능에 자아를 부여하는 방법은 뭐지?”
“설명보단 직접 느껴보는 것이 좋겠지. 빌리언트.”
[예쓰 마스터.]
“오! 이 충성심은 어떻게 부여할 수 있는 거지? 프로그래밍 같은 건가?
시우가 서늘하게 남자를 바라봤다.
“짓뭉개서 분리수거 해. 쓸만한 파츠들은 떼어두고.”
[예쓰 마스터.]
“어이! 이건 약속이……!”
하늘에서 거인의 손이 나타났다.
쾅!
남자의 모습은 압착 프레스기에 잘못 들어간 기계처럼 찌그러졌다.
부서진 파츠들 사이로 초록색 연료가 연신 새어 나왔고, 스파크가 일어난 부품과 연료에 불이 붙어 남자의 잔해와 함께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언어 기관이 부서진 건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프스스스, 이, 이런, 프스스, 여, 역시, 뇌를 열고 프스스 알아봐야. 했던가? 프스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프스스, 어쨌든 내, 내, 내, 내 소개는 프스스, 하고 가야 겠……? 난 존이다. 프스스, 다음번에 만나면 프스스 네, 네 머리를 열고 원하는 걸, 프스스 가져가겠다.”
쐐애액.
허공에서 마법진이 생성되고 거인의 손이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쿵!
남자의 형상은 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서졌다.
“안 돼!!!!!”
곽동원의 절규가 한연맹 전체를 울렸다.
* * *
금발의 사내가 휘파람을 불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금발에 커다란 키가 인상적인 여성이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걸어왔다.
“기분 좋아 보이시는군요.”
“재미난 녀석을 만났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야토가미 보고가 올라왔을 때 직접 가볼 걸 그랬어.”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땐 문제가 터졌으니 해결하라는 투로 이야기했잖아.”
“그렇게 섬세한 분인지 몰랐는데요?”
“내가 살아온 세월이 대체 얼마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면 왜 지금 제 심경은 알아채지 못하시는 거죠?”
“왜?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또 키 크다고 차인 거야?”
퍽!
여자의 주먹이 복도 벽면을 때렸다.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벽면이 부서지며 돌조각들이 복도 위에 튕겼다.
“전 키 크다고 차이지 않습니다.”
“그, 그럼 왜 기분이 안 좋은데?”
“안드로이드 인형 한 대에 투입되는 금액이 얼마인지 알고 계십니까?”
“아…… 난 또, 좀 봐줘라. 나 혼자 이 세계 전체를 다니는 건 한계가 있잖아.”
“이번에 가져가신 인형은 5세대 전투용 프로토 타입이었습니다. 배상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진짜…… 너무하네.”
“태평양에 가지고 계신 섬과 요트를 처분하겠습니다. 사인해 주십시오.”
“…….”
금발의 남자가 버티려 하자 여자가 내밀었던 서류를 다시금 회수했다.
“그렇다면 자금 부족으로 골렘 프로젝트에 영향이 가겠군요.”
“어디 사인하면 된다고?”
남자는 사인을 하면서 여자를 몇 번이나 죽일 듯이 바라봤는지 모른다.
“골렘 프로젝트는 어디까지 진행됐어?”
“현재 82% 완료 한 상태입니다.”
“왜 아직 그것밖에 안 됐어? 작년 말즘엔 세부 조정만 하면 될 거라고 했잖아.”
“그랜드 마스터께서 한 번씩 사고를 치실 때마다 에어리어의 운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미안하다.”
“알면 자중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한국에서 재미난 걸 발견 했거든.”
“……뭐죠?”
“혹시 자아가 있는 물건에 대해서 알고 있어?”
“에고(ego)를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에고 소드나 에고 보우 같은 거 말이야.”
“그건 환상 소설 속의 개념 아닙니까.”
“그걸 보고 왔어.”
“확실합니까?”
“그걸 골렘에 탑재하면 어떨꺼 같아?”
“……여전히 자동으로 움직이실 계획이시군요.”
“정말 멋질 거야.”
한참을 걷던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었다.
전면에 보이는 거대한 창 너머로 까마득한 깊이로 패여 있는 수직 동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수직의 동굴 안에는 어지간한 빌딩의 크기는 훌쩍 넘을 정도로 대단히 큰 로봇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