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그자는 누구였는가?”
성하 마첼리노의 물음에 대신관 베네딕트가 답했다.
“미국의 51area요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건가?”
“…….”
라구엘이 전해 온 소식은 놀라웠다.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악이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과 그 악의 크기가 이미 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할 정도로 커졌다는 것.
하지만 그것보다 놀라운 것은 6천사인 라구엘에게 감시자가 붙어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말대로라면 감시가 아닌 사전 동의 없는 보호자 역할이라고 했지만, 루체 시국의 가장 강력한 7천사 중 하나인 라구엘에게 감시자가 붙어있었다는 것과, 그것을 루체 시국이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 성하 마첼리노와 성당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경우 화를 내야 하는 건가?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하는 건가?”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선 안 됩니다. 그들의 행동은 도를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뭐라 해야 하는가? 왜 구해주었냐는 말을 해야 하는가?”
“그건…….”
베네딕트가 당황하자 성하 마첼리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의 근심이 뭔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덮어놓고 화를 낼 수만도 없네. 영국 상계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로 사라진 뒤로 미국이 과한 행동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럼 상계이사국을 다시 선정하게 되는 겁니까?”
성하 마첼리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시간이 걸릴 걸세. 상계이사국은 그저 힘이 강한 이들의 모임이 아니지 않은가. 어디까지나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단체. 이미 악마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혹의 든 이상 그들이 이사국이 되는 것은 쉽지 않겠지.”
상계 이사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베네딕트는 조심스레 물었다.
“다른 이사국에선 어떤 말이 오가고 있습니까?”
“허허, 지금은 다른 상계라 할 곳이 없다네.”
“네?”
“이미 일본 상계와 중국 상계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않은 지가 오래야. 그동안이야 서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조약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영국까지 저리된 후에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네.”
“그럴 수가…….”
상계 이사국은 세계의 조율선이다.
상계의 힘은 하계의 절대적인 물리량을 넘어서는 경우가 다반사라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른다.
과거 마녀사냥 시대 때에 일이 그랬고, 일본의 야토가미가 그랬다.
세상은 이 물리량을 조절하기 위해 상계의 대표되는 세력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
이 절대적인 힘의 크기를 증명하는 회의기구는 단순한 단체 활동을 넘어 세계의 균형을 조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이런 회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내부적으로 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그,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이야기 해봐야겠지.”
성하 마첼리노는 그렇게 말하곤 고해소 안으로 들어갔다.
양쪽에 놓인 창문을 닫고 천정의 문까지 닫자 좁은 고해소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성하 마첼리노의 손이 있는 부분에서 한 줄기 야광빛이 그의 손을 스캔하고 지나갔다.
곧이어 성하 마첼리노가 있던 공간은 커다란 공간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어두웠지만 공간 안에는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어서 오게 성하.”
세 개의 빈자리 사이로, 성하 마첼리노 건너편엔 이십대로 보이는 금발의 사내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존.”
외형적으로도 60년 이상의 세월의 차이가 나 보이는 두 사람의 태도는 보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오랜만이라니…… 그렇게 살고도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지는가?”
“저도 존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보게 된다면 인사말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마첼리노는 새삼 새로운 눈으로 존을 바라봤다.
그의 머리가 아직 갈색일 적.
구품신관으로서 루체 시국에 방문한 존을 봤을 때도 그의 얼굴은 지금과 똑같은 이십 대의 풋풋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세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범접할 만큼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의 외형에는 헤어스타일 말고는 다른 변화가 없었다.
“언제든 말만하게 자네가 원한다면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주도록 하지. 우리 51area에는 여러 가지 기술이 많거든.”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전 그저 아버지께서 허락해주신 시간만큼만 일하고 싶습니다.”
“쯧쯧, 일이라 생각하니, 그만두고 싶은 거지. 진정한 신자라면 영생의 시간 동안 신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 아닌가?”
“후후,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왜 요즘 들어 영생을 포기하는 녀석들이 많은지 모르겠네. 우리 51area에서도 몇 놈들이 영생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했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죽어버린 탓에 구멍을 메꾸느라 정신없네.”
“근심이 많으시겠군요.”
“됐네. 잡소리는 그만하고, 이 참석자도 없는 상계 이사국 회의를 연 것은 우리 쪽 녀석 때문이겠지?”
“지금 51area의 감시자 때문에 루체 시국 내에선 난리가 난 상태입니다.”
“자네도 지금 아시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겠지?”
“네. 그 일 때문에 조사단을 파견했던 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보호자’를 붙인 것도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상대방도 모르게 하는 보호란 결국 감시와 다를 바 없습니다.”
존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줄 모르는군. 일본과 중국의 상계가 2년 사이에 완전히 흔적도 없이 무너졌어. 거기에 더불어 영국 상계에서는 당최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조차도 없는 상태네. 이 정도의 격변과 혼란은 2차 세계 대전 때에도 없었던 일이야.”
“루체 시국은 스스로를 충분히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있습니다.”
존은 말없이 성하 마첼리노를 바라봤다.
“알겠네. 천사들에게 붙였던 보호자들은 돌려보내도록 하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일에 대해선 일을 크게 키우지 말도록 하게.”
“한국을 상계 이사국의 회원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일본과 중국이 한국에 넘어갔네. 그들을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지.”
“제가 알기로 한국에는 무공의 힘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사이 새로운 힘이 생긴 겁니까?”
“……나를 떠보는 건가?”
“그들의 힘의 연원에 대해서 여쭙는 겁니다.”
“그대도 오랜 세월을 살아 왔지만, 나에 비하면 아직 청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게.”
“역시 제가 생각했던 것이 맞군요.”
“그래. 그들의 힘은 단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네.”
“그리고 그 힘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지요.”
“자네의 심경은 이해하나, 세상이 바뀌었어.”
“세상이 바뀌어도, 선악은 바뀌지 않습니다.”
“복잡한 세상에선 복잡한 법칙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거야. 세계의 조율선은 선과 악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만 알고 있게.”
“루체 시국의 입장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존은 마첼리노의 태도가 불쾌한 한편 이해가 되었다.
이미 유럽은 흑마법의 홍역을 한 차례 치렀다. 부정한 마법의 힘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 절반이 죽고, 상계와 하계가 모두 무너졌다.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몇백 년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은 대화로 풀도록 하게.”
“그가 협조한다면 루체 시국은 언제나 평화적인 방법을 우선합니다.”
“…….”
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 *
우빈은 한연맹 중심에 위치한 시우의 연구소로 향했다.
3단계의 자동 보안을 거쳐 지하실로 들어서자, 엘리베이터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자동으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린 곳은 시우의 개인 연무장.
연무장에는 작은 구체의 빌리언트와 이야기 중인 시우가 있었다.
“루체 시국의 사람들하고 만났다면서?”
우빈은 다짜고짜 말을 꺼내었다.
“만났다기 보단 싸웠지.”
“왜?”
“내가 악마라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던데?”
“이런 미친! 근데 놓친 거야?”
“기계와 접목시켜 마법을 사용하는 상계 세력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나도 잘은 몰라. 우리 세대에서는 서로 간의 교류가 철저하게 금지된 수준이니까. 다만 마법은 영국이 종주국이고 미국에서도 사용한다고 알고 있어.”
“종주국의 마법 발전은 그 정도인가?”
“무슨 소리야?”
“응. 내가 손을 쓸 수가 없었거든.”
시우의 말에 우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손을 쓸 수 없었다고?”
“그래.”
“……우리 뭔가 수를 내야 하는 거 아냐?”
“무슨 수?”
“아니, 너를 악마로 규정하고 너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서.”
“시끄럽고 이리로 오기나 해.”
“왜……. 또 뭔데. 지옥 훈련은 이제 끝났잖아.”
우빈이 주춤거렸다.
“빨리 안 오냐?”
우빈의 신형이 흐릿하게 사라지고, 곧장 시우 앞에 나타났다.
“팔을 내밀어 봐.”
“팔?”
우빈이 자연스레 팔을 들어 올린 순간. 시우의 손에서 번쩍 불꽃이 튀기더니 우빈의 입에서 비명이 세어 나왔다.
“으악! 미친! 뭐야!”
어깨에서 화끈거리는 열기와 함께 옷들이 타들고 있었다.
우빈은 욕지기와 함께 옷을 벗어 던졌다.
그의 상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우람하게 변해 있었다.
우빈은 시우의 불꽃이 닿은 어깨를 마구 문질렀다.
그곳엔 어느새 금색 인간의 형상을 띤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미친놈아! 이게 뭐야!”
“새로 만든 스킬이야.”
“스킬?”
“그래, 일단 내가 일러주는 구결을 외워.”
시우의 입에서 우빈이 알지 못하는 무공의 구결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얼떨떨함에 아무 생각 없이 구결을 외우던 우빈의 눈이 번뜩였다. 구결의 깊이가 심상치 않았음을 느낀 것이다.
“자, 잠깐.”
“시간 없어.”
우빈의 바램에도 시우는 계속 구결을 외었고, 우빈은 필사적으로 구결을 외울 수밖에 없었다.
시우의 입이 구결을 외는 것을 멈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빈은 멍하니 구결을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잠시 뒤 중얼거리는 것을 멈춘 우빈이 놀란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봤다.
“이, 이건…….”
“그래 소림사의 금강불괴신공.”
“!!”
“다 외웠어?”
“어, 근데 다 외웠다 해도 실제로 익히는 건 쉽지 않아. 내 내공의 근원은 태백심법이고, 도가 계열의 무공은 불가계열의 무공과 접목하기 쉽지 않거든.”
“그럴 필요 없어. 지금부터 내가 알려주는 주문을 외워.”
이번엔 시우의 입에서 우빈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언어가 흘러나왔다.
시우에게 특별과외를 받았던 우빈이 본능적으로 시우의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빈의 입에서 주문이 거듭될 때마다 우빈의 어깨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놀랐던 우빈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그렇게 주문이 끝났을 때쯤엔 문신에서 흘러나오던 빛도 차츰 잦아들었다.
“이거 뭐야.”
시우는 대답 없이 아공간에서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들었다. 라구엘에게서 빼앗은 그 검이었다.
“그건 또 뭐야?”
바스타드 소드는 시우의 마나에 반응해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내가 방금 알려 준 건 금강불괴신공에 대한 마나 유동을 이끄는 주문이야. 주문을 외면서 구결을 항시 상기하도록 해.”
“그게 뭔 소리야.”
“머릿속으로 구조를 만들면서 입으로 계산을 하라고.”
이전같았으면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이지만, 시우에게 특별 과외를 받으면서 비약적으로 상승한 두뇌 활용 능력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시우가 든 검에 힘이 모이기 시작했다.
위협적인 행태에 우빈이 본능적으로 주문을 외고 구결을 머릿속에서 운용했다.
“간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시우는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이미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시우의 검을 대비 없이 받아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빈은 양 손을 올려 머리를 보호했다.
쾅! 쾅!
시우의 검을 맞은 우빈의 몸이 튕겨 나가며 연무장 벽면을 50cm나 파고 들어갔다.
무너진 돌무더기를 털고 일어난 우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이야! 이 미친 자식아!”
하지만 시우는 우빈을 보기는커녕 자신의 검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 자식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흥분하며 다가왔던 우빈은 시우의 검을 보곤 말을 멈췄다.
“이건 버려야겠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는 검날이 심하게 갈린 데다 중앙이 크게 휘어 더 이상 검으로서의 가치를 유지하지 못할 듯 보였다.
“아까 얘기한 스킬이야.”
“설마…….”
우빈의 몸에는 아무런 외상도 없었다.
우빈은 주문을 외던 순간을 되새겼다. 검이 몸에 닿는 순간 잘릴 거라는 두려움이 없었다. 수수깡이 아무리 강하게 날아와도 몸이 다칠 리 없고, 솜뭉치론 어떻게든 상처 입을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검에 대한 두려움을 지웠었다.
“미친 자식. 설마 주문으로 무공을 쓸 수 있게 만든 거야?”
“문신을 새겨야 한다는 것과 주문이 긴 걸 생각하면 아직 개량의 여지는 있지.”
“다른 무공은 다른 무공도 이렇게 쓸 수 있는 거야?”
“당연히 아니지. 검술이나 신법 등은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건데. 이게 게임도 아니고 정신 차려.”
“이런 미친…… 이게 게임이 아니면 뭔데.”
우빈은 자신의 어깨에 새겨진 문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엘리베이터 쪽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저도 익힐 수 있을까요?”
“한 문주는 이미 이거 아니어도 충분히 강하잖아?”
“시우 님에 비하기엔 아직 한참 부족하죠.”
“아직 테스트 수준이라 그리 대단한 건 없어.”
“미리 준비해 놓으면 완성되었을 때 더 빨리 적응할 수 있겠죠?”
“알았어. 한 문주에게 접근 권한을 열어 놓도록 할게.”
“감사합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연무 중일 땐 들어오는 일 없었잖아?”
“아, 그게 지금 맹주님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네. 국정원을 통해서 시우 님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국정원? 당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국정원은 뭔가 알고 있는 듯한데 말을 하지 않고, 손님은 그저 강원도에서의 일은 유감이다. 어쨌든 약속대로 만나러 왔다고 이야기하시더군요.”
“!!”
“어디 있지?”
시우가 앞장서서 엘리베이터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