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말도 안 되는…….”
13세기 전후로 마법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상계에서 성행하던 마법의 영향력은 하계에도 퍼지게 되었다.
귀족, 왕, 성직자, 상인 등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로부터 시작된 마법은 하계 전반에 퍼졌다.
하지만 독점적 지식은 하위 계층에는 퍼지지 않았고 하위 계층은 자신들만의 마법을 연구하고 개발했다.
그렇게 성행한 것이 연금술과 흑마법이었다.
악마와의 계약으로 막대한 힘을 얻은 흑마법사들은 권력층을 위협했고, 연금술이 빚어진 금은 사회 시스템 전반을 무너뜨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14세기 후반부터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사람을 위해 성스러운 마법을 부릴 수 있게 하고 병자를 치유하던 신성력은 흑마법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때문에 연금술과 흑마법을 지우기 위한 마녀사냥에 신성력을 가진 위대한 신관들이 나서게 되었다.
무려 4세기에 걸쳐 신관들은 흑마법을 지웠다.
악마 계약과 관련한 책들은 종이 한 장 남지 않게 모두 태웠고, 연금술에 관한 연구 자료 또한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마녀사냥이 끝나고 수 세기가 지난 현시대에 남아 있는 흑마법은 없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작은 저주나 타락한 영혼을 송환하는 강령술에 불과했다.
그렇게 알고 있던 라구엘의 눈앞에 그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 했던 존재가 나타났다.
“악마…….”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짙은 어둠에 라구엘은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태생적으로 신성력에 친화적인 몸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단지 시우의 마기를 느낀 것만으로도 온몸에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라구엘은 땅을 박차고 거리를 벌렸다.
시우의 손에선 이미 두 개의 마법진이 생성된 뒤였다.
[거인의 손]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거인의 손이 번개같이 나아가 라구엘을 구속했다.
“스꾸도scudo(가시 방패)”
라구엘의 양옆으로 가시 방패가 생성되었고 라구엘을 구속했던 거인의 손이 부서졌다.
“이런 건 생각 못 했는데.”
거인의 손은 소환체를 구현화한다.
타격을 받아 부서지거나 저지 당할 수는 있지만, 지금과 같이 가루로 부서질 수는 없었다.
[헬 버스터]
다른 손에서 준비되어 있던 작은 마법진에서 붉은 불덩이가 날아갔다.
퍼퍼펑!
굉음과 함께 폭발한 불꽃은 내리는 눈을 순식간에 증발시켜 버렸다.
살을 에는 추위는 헬파이어의 불꽃을 저지했다.
한바탕 검은 연기가 지나간 곳에서 검댕이가 이곳저곳 묻은 라구엘이 팔을 내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시우는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양손에 보이지 않은 창을 든 것처럼 마법진을 쥐고 쏘아 보냈다.
[다크 자벨린]
수십 개의 검은 창이 라구엘의 전신을 꿰뚫을 듯 쏘아졌고 라구엘은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힘껏 휘둘렀다.
“프레치아freccia!(빛의 화살)”
바스타드 소드의 검로를 타고 빛의 화살들이 반짝이며 쏘아졌다.
빛의 화살들은 검은 창과 부딪치며 동시에 산산조각 부서져 버렸고, 남은 빛의 화살들은 곧장 시우에게로 향했다.
[배리어]
위협적으로 쏘아져 나가던 빛의 화살들은 시우의 배리어에 막혀 사라졌다.
“신성력에 약한 건 세계관에 상관없는 건가?”
알게니하 대륙에서도 흑마법사들이 소드마스터보다 두려워했던 건 성기사와 이단심판관이었다.
절대적인 힘에 관계없이 신성력 앞에선 힘을 못 쓰는 성향에 따른 약점 때문에 흑마법사들은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도 단 한 번도 거대한 세력을 일구거나 대륙 지배를 하지 못 했다.
“내가 그것이 두려웠다면 흑마법 같은 걸 익힐 생각은 하지도 못했겠지.”
[다크 나이트]
[데스 나이트]
시우의 양옆으로 다크 나이트 10기와 데스 나이트 2기가 나타났다.
흑과 백의 검을 든 나이트들은 쏜살같이 라구엘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베어 내려 했다.
챙! 챙! 챙!
바스타드 소드가 불꽃을 내뱉고 라구엘의 손에선 빛나는 신성력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신성력이 다크 나이트를 휩쓸면 다크 나이트의 팔이 떨어지거나 머리가 날아갔다.
시우는 그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다크 나이트들을 소환하며 라구엘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마기만 아니라면 다른 마법이 아주 영향이 없는 것도 아니고.”
[파이어 볼]
[윈드 커터]
[라이트닝 볼트]
수십 개의 마법들이 라구엘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가 작렬했다.
파지직 파지직.
눈에 젖은 몸이 라이트닝 볼트의 높은 전력 공격에 속수무책이 되었다.
머리카락은 꼬불꼬불 올라가고 피부는 과한 전력으로 인해 이곳저곳에 화상 자국이 심하게 났다.
“큐어cure”
상처로 인해 행동에 제약이 생길 때마다 라구엘은 스스로에게 치료마법을 시전했다.
신기하게도 데스 나이트에게 베었던 상처들이 깨끗하게 치료되고 화상을 입었던 피부가 되살아났다.
흉터 하나 남지 않는 신성력의 힘에 시우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힘은 반칙이야. 대가 없는 회복이라니.”
투덜거리는 시우의 말투와는 달리, 데스 나이트들은 더욱 빠른 몸놀림으로 라구엘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신성력을 제외하면 일류 이상의 검사는 되지 못 하는 라구엘은 데스 나이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챙.
데스 나이트의 검이 바스타드 소드를 한쪽으로 몰아넣고 그대로 검면을 발로 찼다.
“큭!”
라구엘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바스타드 소드를 떨구었다.
데스 나이트는 검면을 발로 차올려 바스타드 소드를 시우에게로 던졌다.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가던 바스타드 소드는 가볍게 시우의 손에 안착하듯 쥐어졌다.
라구엘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떠졌다.
“늘 궁금했던 게, 신성력이었거든. 이제야 연구를 해 볼 수 있겠네?”
라구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는 내가 알던 흑마법을 사용하는 이들과 다르구나.”
“뭐가 다르지?”
“힘.”
“그렇다면 이제 좀 대화를 좀 해 볼까? 내가 폭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
“너무 고민하지 마. 저기 메여 있는 이들도 죗값을 치르면 자유의 몸이 될 거야. 물론 이전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는 없겠지만, 더불어 내가 바라는 건 평화와 대화야.”
나이트들도 더 이상 라구엘을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대화? 무엇을 위한 대화지?”
“당연히 어울려 살기 위한 대화지. 아까 말했듯 난 다른 상계에도 관심이 많거든.”
“너의 그 생각이 실로 너를 두렵게 만드는구나.”
“응?”
“선과 악은 같은 하늘 아래서 공존할 수 없다. 공존이란 말로 부족한 힘을 더욱 키우려는 모습을 보니, 차후에 너라는 후한을 남겨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드는구나.”
“아니 무슨.”
“더 이상 현혹하려 해 봤자 소용없다.”
라구엘은 마치 사탄의 속삭임이라도 들은 것처럼 더욱 분개하며 두 손을 모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위에만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켜진 것처럼 불빛이 비췄다.
“하늘에 계신 만물의 아버지시여…….”
그의 기도가 이어지자 나이트들이 그를 방해하고자 검과 발을 날렸다. 하지만 빛 안에서 기도를 하는 라구엘은 강력한 배리어에 보호되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멘.”
[천사강림]
[6번째 관조의 천사]
지상에 태양이라도 뜬 듯 라구엘의 주위로 환한 빛이 번쩍였다.
빛이 잦아들자 라구엘의 주위에서 그를 공격하던 나이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새로이 나타난 라구엘은 갑옷을 착용하고 한 손엔 커다란 가시방패와 다른 한 손엔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든 채였다.
말 위에만 올라가 있었다면 중기사라 불러도 무색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등 뒤로 난 여섯 장의 날개가 그의 모습을 성스럽게 보이도록 했다.
―오늘 이곳에서 그대의 죗값을 받겠다.
라구엘의 울림은 마치 동굴 속에 퍼지는 메아리처럼 사방으로 울렸다.
“뭐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건 확실히 알았네.”
시우의 손이 아공간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허공에 은색 갑주를 뿌렸다.
은색 갑주들은 마치 자력에 끌리듯 시우의 몸 이곳저곳에 부착되며 금세 서로 연결되었다.
시우의 온몸을 은색과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파츠들이 꽁꽁 감쌌다. 특이한 것은 그의 투구에 돋은 두 개의 금색 뿔이었다.
막상 이런 상황이 되고 나니 정말로 신화 속에 나오는 천사와 악마의 전투가 재현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디 신화 속 이야기대로 천사가 이길지 확인해 볼까?”
시우의 손에 쥔 라구엘의 바스타드 소드 검면이 검게 물들었다.
루체 시국의 성물고에서 만들어 낸 신성검이 순식간에 검게 물드는 것을 보며 라구엘은 전의를 다졌다.
여섯 장의 날개가 살짝 펄럭이자 라구엘의 신형은 지상에서 조금 뜬 채로 번개처럼 시우에게 날아갔다.
쾅! 콰콰쾅!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친 충격파로 수십 년간 곧게 자라온 침엽수들이 휘청거렸다.
“신성력을 제외하면, 그닥 대단한 실력은 없네?”
검으로 시우를 내려찍던 라구엘이 가시 방패로 그를 밀어냈다.
가시 방패에는 보이지 않는 막이 있어 시우는 뒤로 밀려났다.
-쏘피오soffio(빛의 브레스)
라구엘의 손에서 거대한 빛의 입자가 터져 나와 순식간에 시우를 덮쳤다.
나이트도 흑마법도 버티지 못했던 성력의 힘이었다.
-허어.
동굴처럼 울리는 음성이 라구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빛의 브레쓰가 휩쓸고 갔지만 시우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신성력이 대단한 힘이지만 그걸 만능이라고 생각하지마. 세상엔 수만 가지의 색깔이 있듯 힘 또한 마찬가지니까!”
시우의 온몸에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단지 살기만으로도 온몸을 꼼짝달싹하지 못할 정도의 밀도 있는 살기였다.
라구엘은 속으로 기도문을 미친 듯이 외쳤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라구엘은 가까스로 가시방패를 들어 올렸다.
스걱.
시우의 바스타드 소드가 가볍게 가시방패를 갈랐다.
뒤이어 라구엘의 검도, 그의 갑옷도, 시우의 흑색의 검 앞에선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물건처럼 속절없이 베어졌다.
“우리 연구소에 가서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시우가 그렇게 이야기하며 라구엘에게 손을 뻗는 순간.
뒤에서 나타난 쇠사슬이 라구엘의 신형을 칭칭 감았다.
“누구냐!”
쇠사슬의 존재를 안 순간 시우의 손에서 마법진이 비눗방울처럼 쏟아져 나왔다.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쇠사슬을 향해 쏘아졌다.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쇠사슬은 그저 라구엘을 당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퍼퍼퍼펑! 퍼퍼퍼펑!
파이어 볼이 터지고 윈드 커터가 나무를 잘라내면서 숲의 일부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졌다.
달빛이 눈에 반사되며 숨어 있던 인형을 드러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인형은 전투용 검은 슈트에 한쪽엔 붉은색 렌즈가 달린 헤드기어를 쓰고 있었고, 라구엘을 잡아챈 쇠사슬은 염동력으로 조절되는 듯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이거 놔라!
라구엘 또한 그의 정체를 몰랐는지 구속된 몸을 버둥거렸다.
“당신을 돕기 위해 온 겁니다.”
-뭐?
라구엘이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사이 시우의 마법이 사방에서 폭발했다.
날카로운 검의 형상들이 두 사람을 향해 쇄도했다.
쐐애애액
검은 인형은 팔에 붙은 파츠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반투명한 막이 생성되면서 검의 형상을 막아 내었다.
“놀랍네. 이 정도로 마법을 활용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다니.”
다시 한번 마법의 폭풍이 생성되고, 시우의 그림자에선 검은 사슬이 나와 두 사람을 옥죄려 했다.
“당신에 대해선 계속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거 참 불쾌하네. 개인 사찰이라니.”
검은 인형이 다시금 파츠의 버튼을 눌렀다. 그의 몸에서 시작된 투명한 장이 파도처럼 시우에게 쏘아졌다.
시우의 몸 주위로 배리어가 생성되었지만, 그의 몸은 수 미터나 날아간 뒤였다.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검은 인형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몸이 빛무리로 감싸 지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시우는 딱딱한 얼굴로 두 사람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