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남유럽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한 루체 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다.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이 나라는 평범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상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 중 하나다.
루체 시국의 정중앙.
이곳엔 루체 시국의 국가 원수인 성하가 머무는 세계 최대 성당이 존재한다.
현 성하 St. 마첼리노.
자애로운 성품과 인격으로 칭송받는 267대 성하였다.
모자이크 유리 창문으로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그려지는 성당 내부에서 편지를 읽던 마첼리노는 굳은 표정으로 편지를 접었다.
“어찌 생각하는가?”
그의 시선은 대신관 베네딕트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귀밑머리로 하나둘씩 흰머리가 보였다.
“7천사의 파견은 숙고해야 할 줄로 압니다.”
7천사.
루체 시국을 보호하는 방패이자, 전 세계의 악을 제거하는 빛의 검.
“하지만 조사단이 이토록 편지를 보낸 것은 또 처음이지 않소? 그리고 강력한 저주에 걸렸다는 신자들 또한 걱정되는구려.”
마첼리노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베네딕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7천사 중 한 명과 구품신관들을 함께 파견하는 것은 어떨까요?”
마첼리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조사단이 구마의식으로 쫓아내지 못할 정도의 악령이라면 구품신관들 만으로는 힘들 것이오. 칠품신관들과 라구엘을 보내도록 하시오.”
“…그렇게 한다면 중국 상계에서 불만을 내비칠지도 모릅니다.”
7천사의 움직임은 곧 수많은 상계국들을 긴장하게 만들곤 한다.
신이 든 죄의 저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곧 상계이사국 회의가 있을 겁니다. 그때 양해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첼리노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베네딕트도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대상고 파이팅!”
“선배님 파이팅!”
매해 수능 날은 날씨가 매섭다.
실제 날씨가 그런 건지, 학생들의 마음이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수능 날의 날씨는 매섭다.
수능 고사장으로 가는 입구.
각 학교의 학생회들과 더불어 수능을 치는 선배와 교분이 있는 동아리 학생들이 교문 입구에서 응원을 한다.
“하아….”
고사장 입구에 선 우빈은 자신이 수능 때문에 이렇게 떨게 될 줄은 몰랐다.
어디까지나 집안의 힘으로든 상계의 능력을 이용해서든 적당한 대학교의 특채 선발로 입학하려 했던 그의 생각은 시우의 단호한 조치로 인해 금지되었다.
더불어 민간인들에게 상계의 능력을 쓰던 전적 때문에 감시 안에 있어야 한다며 같은 학교로 진학할 것을 강요한 것은 우빈의 고등학교 생활을 지옥으로 내몰았다.
“괜찮아?”
어깨가 잔뜩 내려간 우빈의 어깨를 소혜가 치자 우빈이 소혜를 바라봤다.
“헙! 너….”
퀭하니 들어간 눈동자, 살이 쪽 빠진 볼. 푸석푸석해진 피부와 핏발선 눈동자까지. 누가 봐도 병자의 그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우빈의 몰골에 소혜가 깜짝 놀랐다.
“너 언제부터 그랬어?”
“뭐가?”
“너 꼴이….”
“아아, 별거 아냐, 막판 스퍼트 낸다고… 하아.”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시우는 곧장 우빈에게 스파르타식 수능 공부 주입을 시작했다.
우빈은 그게 그저 학원 마케팅으로만 사용되는 단어라 생각했지만, 우빈이 겪은 주입식 교육은 그야말로 현생 지옥이었다.
“솔직히 이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잖아. 하루 23시간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
“저기요. 인간은 하루에 6시간 정도는 자 줘야 하거든요?”
“무슨 소리야? 이제 단전이 생겼으니까. 하루에 1시간만 자도 되잖아?”
“…….”
시우는 정말로 우빈에게 공부를 23시간 시켰다.
각종 마법과 빌리언트의 도움으로 우빈은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저주 마법의 일종을 이용해 졸음이 오면 온몸의 신경을 바늘로 찌르는 듯 자극해 잠을 깨웠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정신 마법을 이용해 망상을 제거해 버렸다.
처음엔 고문이 낫겠다 싶은 고통 속에서 결국 견디지 못한 우빈이 시우에게 칼을 들이밀었고, 정형진이 우빈을 위해 지어준 공부방이 산산 조각나고 우빈의 팔과 다리가 모두 부러진 후에야 반항은 소용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빈은 시우의 관심을 벗어나 남궁혜자와 정순지 등에게 시우의 폭거와 고문과도 같은 행태를 고발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 기회에 더욱 열심히 하라는 무의미한 응원뿐이었다.
아무 의지할 곳 없었던 우빈은 하루 걸러 하루씩 반항했고, 그때마다 분근착골의 고통 속에서 형원에게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냥 열심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
“싫어. 난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싫어.”
“……그래도 열심히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네가 아직 수능 공부를 못해봐서 그래.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그게 아니라. 맹주님께서 이번에 서울대에 가지 못하면 1년 더 공부를 시키실 거라고 이야기 하셨거든요.”
고사장 입구를 다시 바라보던 우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조건, 무조건 미달 되는 곳이라도 무조건.’
“오빠.”
설마 자신을 부르는 것인가 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우빈은 눈앞에 하얀 패딩을 입은 소녀들을 발견했다.
“민서야.”
“오빠 수능 잘 보세요.”
민서는 우빈에게 기다란 엿과 찹쌀떡을 건넸다.
우빈의 얼굴이 금방 헤벌쭉해졌다.
“공부 열심히 하셨다면서요?”
“응? 어, 응.”
“서울대 목표라고 들었어요. 서울대 들어가시면 나중에 저 공부 꼭 가르쳐 주세요.”
“어? 그래! 알겠어! 꼭 내가 가르쳐 줄게!”
전에 없던 생기가 우빈의 얼굴에 돌자 소혜가 한심하다는 듯 우빈을 바라봤다.
“가르치긴 뭘 가르쳐. 훌륭한 선생이 집에 같이 사는데.”
소혜와 우빈은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품 안에 엿과 찹쌀떡을 한 무더기 들고 선 시우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거 다 어디서 난 거냐?”
“후배들이 주던데?”
“…난 안 주던데?”
“너한텐 기대가 없나 보지.”
좌절하는 우빈의 어깨를 소혜가 토닥여 주었다.
“오빠!”
“학생회 때문에 새벽같이 나가더니 여기 온 거냐?”
“다른 학교 갔다가 준비만 하고 넘어오느라고 엄청 힘들었다고.”
“뭐 대단하다고 여기까지 와.”
“그래도 수능 보는데.”
민서는 감회가 새로운 눈으로 시우를 바라봤다.
학교에서 괴롭힘당하고 성적도 바닥을 기던 오빠가 어느새 서울대에 어떤 과를 골라서 갈지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민서에게 시우는 남매를 넘어서 이미 닮고 싶은 어른, 동경의 대상과도 같았다.
“시험 잘 봐.”
민서가 고급스런 쇼핑백에 담긴 초콜릿을 건넸다.
우빈은 옆에서 자신이 받은 엿과 시우가 받은 초콜릿을 번갈아 보았다.
“나도 예전에 인기 많았는데.”
소혜가 다시금 우빈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오빠! 시험 잘 보세요!”
“저도요 오빠!”
민서 옆에 서 있던 혜정과 소현이 각자의 쇼핑백을 건넸다.
“고마워.”
그렇게 물건을 다 챙기고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뒤쪽에서 남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수능 고사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녀가 나타난 것이다.
세련된 복장과 빼어난 몸매, 연예인 못지않은 미모를 가진 여성의 등장은 혈기 왕성한 남학생들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시우야!”
여성이 시우의 이름을 부르자 남학생들이 질투 어린 시선으로 그 복 받은 놈을 노려보기 바빴다.
“올 필요 없다니까.”
“그래도! 수능 보는 데 와야지.”
“어쨌든 고마워.”
“어! 아직 들어가면 안 돼!”
“왜?”
“그게 누가 오기로 했거든….”
“??”
그때 뒤쪽에서 더욱 큰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도롯가에 큰 밴이 멈춰서고 그 안에서 의외의 인물이 튀어나온 것이다.
“시우 오빠!”
남학생들의 시선은 다시금 도끼눈이 되어 시우를 노려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마치 빛이라도 나는 듯한 아우라를 풍기고 나타난 건 데이지의 리더 서연우였다.
“하아 하아. 미안해요. 오다 길이 너무 막혀서.”
“둘이 아직도 연락해?”
“응, 가끔 밥 먹어….”
지혜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연우의 손에는 꽃다발과 찹쌀떡이 들려 있었다. 연우는 그것을 시우에게 건넸다.
“시험 잘 보세요. 오빠!”
“…무슨 상 탄 것도 아닌데, 웬 꽃이야?”
“엇! 저, 전 그, 그냥 잘 보시라고.”
“알았다. 잘 볼게. 이만 다들 돌아가. 시험장 가서 준비해야 하니까.”
“시험 잘 봐요!”
시우를 응원 왔던 이들이 일제히 외쳤다.
교문 앞의 여타 남학생들은 그 누구의 응원보다 시우가 받는 응원을 부러워했다.
* * *
신부복을 입은 사내가 침대에 팔과 다리가 고정된 환자를 향해 외쳤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명한다. 악귀야 물러가라!”
드드드드드드드.
반응 없던 환자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그 떨림이 어찌나 심하던지 침대까지 함께 움직였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간호사들은 재빨리 다가가 침대를 고정하려 했지만, 다른 신부복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명한다. 악귀야 물러가라!”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주문이 진행될 때마다 환자의 몸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
주문을 외우던 사내는 곧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천상 군대의 영광스런 대천사시여, 이 땅에 만연한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어둠에 대항하여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신기하게도 그가 주문을 욀 때마다 신부의 몸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관들은 간호사들과 의사들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
주문을 외우던 신관의 몸이 마치 형광등을 품은 듯 밝은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명한다. 악귀야 물러가라!!”
드드드드드드드.
격렬하게 움직이던 환자의 온몸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명한다. 악귀야 물러가라!!!”
드드드드드드드.
케에에에에엑!
환자의 입에선 그보다 훨씬 커다란 검은 지렁이 같은 것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주변에서 지키고 섰던 신관들이 일제히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천상 세계의 아버지시여, 그대의 모습을 본 따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한 어린양의 보호를 위하여 헛되고 삿된 어둠의 조각을 지옥의 끝자락 불덩이에 넣어 주소서.”
신관들의 손에서 일제히 빛이 발하기 시작하며 동시에 손을 잇는 원형의 테두리가 생겨났다.
원형의 테두리는 순식간에 검은색의 지렁이를 동여매더니 바닥으로 사라졌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구마의식을 마친 신관이 침대의 창살을 잡고 숨을 몰아쉬자, 옆에서 지켜보던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어.”
“아, 아닙니다. 계속할 수 있습니다.”
가죽 재킷의 사내는 병실 한쪽에 나 있는 창문으로 건물 로비를 바라봤다.
밀려드는 환자들을 제때 병실에 넣지 못해 거대한 로비는 환자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기이한 건 환자들의 상태였다.
환자들은 일제히 마치 누군가 빨아들이기라도 하듯 끌려가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 죽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시련을….”
“됐어. 댁들이 죽으면 내가 귀찮다고. 호텔 예약이랑 통역도 다 내가 해야 하잖아.”
“…….”
“조사단이 한국으로 갔다고 하지 않았어?”
“네. 최근 한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결국, 원흉은 그곳에 있는 거잖아. 이곳에 굳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지.”
“하, 하지만 이 어린 양들을 두곤….”
“그러니까. 원흉을 제거하면 모두 본래로 돌아올 거라니까 그러네.”
“…그래도 눈앞에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나 참. 답답하네.”
가죽 재킷의 사내는 선글라스를 쓰고는 대충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성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털그럭 털그럭
드드드드드
쿵쿵쿵쿵.
일순간 병원 전체가 울렸다.
로비에 누워 있던 환자들 전부가 몸을 기이하게 비틀고 있었다.
그 순간, 일제히 환자들의 몸에서 빛이 나며 그들의 입에서 검은 지렁이 같은 연기가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검은 연기는 하나로 몸을 합쳐 거대한 뱀의 모양이 되었다.
검은 몸통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뱀은 가죽 재킷의 사내를 바라봤다.
“네놈 주인에게 곧 가겠다고 전해라.”
검은 뱀은 붉은 혓바닥을 몇 번 내밀다가 건물을 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선글라스의 사내는 허탈한 듯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신관들에게 말했다.
“됐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