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문제는 이권이었다.
진문형의 삽질로 시작된 문제가 커져 강호맹을 괴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무인의 숫자와 질로도 절대 뒤질 리 없는 강호맹의 본진이 털려 버린 것은, 어쩌면 지나온 시간 동안 강호맹의 내부가 심하게 곪아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강호맹이 사라진 이후의 일이었다.
시스템에 길들여진 인간은 시스템을 벗어나 살아갈 수가 없다.
중국 상계는 그동안 강호맹이라는 편한 시스템으로 상계 간에 원활한 소통을 해왔다. 분란을 종식시키고 갈등을 풀어낸다.
시스템의 중심이 되는 강호맹으로 인해 정·사·마의 경계도 사라진다.
강호맹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중국 상계 곳곳에 퍼진 직후,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다음 강호맹은 어떤 문파를 중심으로 세우느냐!’ 였다.
강호맹이 재정적으로 바닥을 보이고 무인들이 한연맹과의 싸움으로 모조리 죽었다고 해도 중국 상계 전체의 입장에선 그리 큰 어려움은 아니다.
명분이 있다면 돈은 다시 모이고 그 돈으로 강호맹 내부의 무인들을 꽉꽉 채울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권을 챙기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명분이 중요했다.
“크흠.”
최시우의 말에 강진명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 일은 한국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시우가 상석에 다가가자, 남궁혜자와 한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대세가의 가주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는 예의를 갖췄으나, 그 반대쪽에 앉아 있는 이들은 어린 시우의 등장에 안절부절못하는 오대세가와 남궁혜자를 보고 비웃음을 날렸다.
시우는 자리에 앉을 때까지 강진명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
말 없는 시선이 계속되자 강진명의 눈가가 사납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할 말 있으면 해라.”
“당신 어디 출신이라고?”
“크흠!”
시우의 입에서 ‘당신’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공동을 비롯한 다섯 개의 문파 장문인들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감히 네가 대 공동파의 장문을 능멸하려는 것이냐?”
강진명의 말에 시우가 피식 웃었다.
“능멸은 무슨.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공동파 장문인 게 꽤 부끄러운 일인가 봐?”
“이놈!”
“어떤 근본 없는 문파기에 대표가 이리도 똥오줌 못 가리고 생각 없이 말을 막 내뱉지?”
시우의 말에 강진명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기 싸움을 해보려던 그의 의도는 시우의 일갈에 뭉개져 버렸다.
“뒷감당을 할 수 있겠느냐?”
강진명이 살기를 은은하게 흘리며 말했다.
“왜 한번 해보게?”
시우는 강진명의 살기에 대항하지도 않았다. 되려 그의 살기를 온전히 받으면서도 얼굴의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공동을 위시한 문파의 장문인들은 그런 시우의 모습이 더욱 두렵게 느끼고 있었다.
“이 건물 가득 채우고 있는 무인들을 믿고 까부는 거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중국에 와서 피를 너무 많이 봤거든. 내가 또 마교인들이랑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자꾸 피를 보면 눈이 돌아가서 말이야. 이번엔 진짜 앞뒤 안 가리고 중국 상계에 씨를 말려 버릴지도 몰라.”
가만히 듣고 있던 청성의 장문인인 두사정이 입을 열었다.
“최 맹주, 말이 심하시오. 우린 그대의 부하가 아니오.”
청성은 그나마 시우의 말에 찔리는 부분이 있었는지 어색하게 존대를 해왔다.
“그쪽을 부하로 대한 적 없어. 하지만, 같은 테이블에서 동등한 관계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최소한의 예의는 필요한 법이야.”
“크흠.”
청성의 두사정도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거 같군. 당장 댁들 인원 데리고 이 건물에서 꺼져, 내 눈에 보이는 족족 다 목을 처버리기 전에.”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궁혜자와 한세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우를 쫓아 나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공동을 위시한 문파들의 장문인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두사정이 강진명을 보며 혀를 찼다.
“왜 이러시오? 강 문주. 정말 한번 붙어 보기라도 할 셈이요?”
“흥! 공동은 불의에 대항하여 도망친 역사가 없소.”
강진명의 말에 두사정을 비롯한 장문인들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이 사람이 진짜!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하시오! 야토가미와 강호맹을 지운 놈이요!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우리 또한 보지 않았소이까!”
“끄응…….”
“분명 말하지 않았소! 중국 상계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건, 한연맹을 쫓아낸 뒤의 이야기라고! 우리가 왜 부득불 강호맹이 무너지자마자 이곳에 온 것이오?”
“…….”
“오대세가는 한연맹과 강호맹의 싸움의 마지막에 뛰어들면서 실리와 명분을 모두 챙겼소. 이대로라면 또다시 우리들을 제외한 새로운 강호맹이 생길 거요. 그땐 강 문주가 책임질 거요?”
쾅!
강진명이 탁자를 내리쳤다.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소!”
“그렇다면, 제발 자중 좀 하시오. 다 된 밥에 재 뿌리지 말고.”
두사정의 말에 강진명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두사정은 직원을 불러, 시우를 호출했다. 내부의 이야기가 끝났으니 다시 이야기하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와야 할 시우 일행 대신 이야기를 전하러 갔던 직원이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돌아왔다.
“왜 너만 오는 것이냐?”
“저…… 그것이…….”
“말해 보거라.”
“한국 측에선 회담에 다시 참여할 의사가 없으시답니다.”
“뭐라?”
“공동…… 파의 태도를 보아하니 제대로 이야기할 의사가 없는 걸로 알고, 오대세가와 이야기를 마무리 짓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두사정과 다른 문주들이 도끼눈을 하고 강진명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 것이오! 결국 오대세가와 전면전이라도 붙을 생각이오!”
“그 또한 나쁘지 않소!”
강진명이 부득불 억지를 부리며 얘기했다.
“허허! 정말. 만약 오대세가와 한연맹이 서로 협약을 맺는다면 어쩔 것이오? 새로이 창설하는 강호맹의 보호를 해준다는 등의 협약 말이오.”
“중국 상계의 동도들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또한 한연맹의 그들이 아무런 이익 없이 그런 행동을 할 것 같소?”
“이 사람 참.”
두사정은 이 나이만 먹은 철없는 아이 같은 강진명의 태도에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쩌랴, 어린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며 평생을 함께해온 도우였다.
“잘 들으시오. 지금 한국에게 중국 상계는 점령지나 마찬가지요. 애써 점령한 곳에서 이득을 취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소? 더구나 오대세가라는 든든한 노역자들이 있는 판국에.”
“…….”
“만약 오대세가가 한연맹과 더욱 긴밀한 사이가 된다면, 한연맹은 그런 오대세가를 위해 얼마든지 힘을 빌려줄 것이오. 그리 되고 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오대세가와 한연맹에게 힘과 돈을 빼앗겨야 한다는 말이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강진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우리가 이곳에 한 발을 들여놓아야, 오대세가를 견제할 세력이 생기는 것이오. 자존심 때문에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라면 나는 그대와 함께할 생각이 없소.”
청성의 두사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는 거요?”
“가서 사정을 해서라도 테이블에 앉으려 하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소.”
두사정이 그렇게 밖으로 걸어 나가자, 뒤를 이어 종남과 형산 하오문의 장문인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결국 강진명도 우물쭈물하며 시우 일행이 있는 곳에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본래의 회의장보다 훨씬 작은 곳에서 말을 이어가던 시우는 강진명이 들어서자 말을 멈추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상계의 동도들의 피해가 심각하다기에 내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했소.”
시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강진명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직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거, 미, 미안하외다.”
먼저 와 있던 두사정이 몸을 돌려 강진명을 도끼눈으로 바라봤다. ‘그따위로 할 거면 분위기 망치지 말고 썩 꺼지시오.’라는 전음을 보내는 건 덤이었다.
흠칫 놀란 강진명이 결국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동의 강진명이 한연맹의 맹주님에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젊은 시절 제법 사고를 치고 다닌 탓인지 사과하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을 본 시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봅시다.”
* * *
새로운 강호맹의 주도권은 결국 오대세가가 가져갔다.
시우는 함께 기존의 강호맹을 몰아낸 오대세가와 평화협약을 맺는 방식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고, 오대세가는 새로운 강호맹의 세워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이 점에 대해선 한세아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새로운 강호맹의 창설로 인해 한동안 강호맹 내부의 재정적자가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에 시우는 다른 것으로 배상금을 대체하려 했으나 한세아가 극구 반대했다.
“중국 상계는 한국 상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곳이에요. 강호맹의 재건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진행될 것이고, 상처를 회복하는 것도, 자신들의 기존의 모습을 탈피하는 것도 언제 우리를 추월하게 될지 몰라요.”
“배상금을 통해 그들의 힘을 빼놓자는 건가?”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이번 전쟁으로 인해 한연맹에서도 많은 피해가 있었어요. 더구나 전쟁에 참여한 것에 대해 제대로 대가를 지불하는 것만으로도 한연맹 내부의 재정이 위태해질 수 있고요.”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한세아는 조금의 과장을 덧붙여 말했다.
“차후에 일본까지 한연맹이 커버하려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이 필요할 거예요. 제대로 통치하지 않으면 또 다른 혼란만 가중시킬 거고요. 할 때는 확실히 해야 해요.”
거기까지 들은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알게니하 대륙을 정벌할 때 그와 똑같은 방법을 썼었다.
하지만 현대로 돌아오고 안빈낙도의 평범한 삶을 바라던 시절이 있었기에 스스로 긴장이 많이 풀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연맹의 맹주까지 되어 버린 마당에 다시금 평범한 안빈낙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고 싶어도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다.
그로 인해 한국의 수십의 문파들이 명맥을 유지해가고 그로 인해 한국의 안전이 지켜지고 있었다.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그 무거운 짐을 들기로 한 이상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으로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
처음에 한세아가 부르는 전쟁 배상 금액에 아연실색했던 공동을 위시한 무사들은 20년간 전쟁배상금을 나눠 내겠다는 조건을 달아 결국 전쟁배상금에 대한 조건을 들어주었다.
대부분의 큰일들이 끝나가자 사람들의 얼굴엔 긴장이 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이군요. 아마도 다들 이걸 기다리셨을 텐데.”
잠시 턱을 쓸며 고민하던 시우가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신투 진소율의 전리품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요.”
공동의 강진명을 필두로 오대세가의 장문인들 모두가 하던 따른 짓을 멈추고 시우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