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우빈이 소빈에게 다가와 오열했다.
“누나! 정신 차려봐!”
그녀의 몸을 잡고 흔드는 우빈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를 말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시우가 우빈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곤 그의 몸을 뒤쪽으로 휙 하고 던져 버렸다.
“으아악!”
갑작스런 시우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과 달리 시우는 냉정하게 형원을 보며 말했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은?”
“…….”
시우의 말에 형원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한 가지 방법이 머릿속에 생각났지만, 쉽사리 실천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때, 형원을 부르는 앳된 목소리가 있었다.
“오빠!”
저 멀리서 달려오는 중학생 정도의 어린 소녀가 눈가에 눈물을 흘리며 형원에게 달려왔다.
“형란아!”
형원도 잠시 위급한 상황을 잊고 달려오는 형란을 품속에 안았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형원은 부모처럼 형란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응. 왜 이제 왔어! 얼마나 무서웠다고!”
“미안해.”
“이제 괜찮은 거지?”
“…….”
형란의 질문에 형원은 대답 대신 그녀를 품속에 푹 안았다.
“잠깐만 기다려, 지금 구해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우리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알았어.”
주변인들의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챈 형란이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형원은 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지금 당장 가능한 거냐?”
“네.”
“좋아. 사람들을 물려.”
사람들이 열 걸음씩 물러났다.
사람들과 거리가 생기자 형원이 다시금 시우에게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
시우가 차가운 표정으로 형원을 바라봤다.
형원은 시우가 짓는 무감각한 표정이 지금껏 봐왔던 그의 모습 중에 가장 소름 끼치게 무섭게 느껴졌다.
시우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형원이었지만,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항상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만 치다 자유 없는 족쇄와 같은 삶을 살았다. 다시는 그런 일들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조건을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형원을 바라보던 시우가 건조하게 말했다.
“말해봐.”
형원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형란이를 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그 아이가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평생 보호해 주세요.”
“…….”
“그럼 이분을 살려 드릴게요.”
잠시 형원의 얼굴을 보던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네?”
“안 된다고! 다른 방법은 없는 거냐!”
“에? 그, 그게 무슨…….”
형원이 시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지금 네 생명을 대가로 뭔가를 하려고 했던 거지?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냐는 말이야.”
“그걸 어떻게…….”
“네 조건에서 너 자신이 없었잖아.”
“하지만…… 그 방법 말고는…….”
시우가 형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 들어. 네 생명을 대가로 이 사람이 살아난다고 이 사람 스스로가 기뻐하지 않을 거야.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고. 너를 구한 건 단순히 너를 어디엔가 써먹기 위함이 아니란 것만 기억해.”
“아…… 그, 그.”
형원은 눈가에 눈물이 핑 도는 바람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빨리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 네가 배운 지식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네가 익히고 배웠던 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방법이라고 해도 좋아. 네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이 있으면 얘기해.”
시우의 말에 형원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형원은 두 눈을 감으며 자신의 머릿속을 유영하는 지식 안으로 빠져들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제갈청룡이 장내로 들어섰다.
정현민이 제갈청룡을 시우에게 소개했다.
“인사하게. 제갈세가의 차남 청룡이네.”
정현민의 소개에 제갈청룡이 말을 이었다.
“지금 소빈 양은 위급한 상황입니다. 빨리 전문치료시설로 옮겨야 합니다.”
“지금 치료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갈청룡이 시우를 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한국 연맹의 맹주 최시우입니다.”
“아, 맹주셨군요. 어쨌든 소빈 양을 빨리 옮겨야 합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치료할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전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소견으로 봤을 땐, 이런 곳에서 응급 치료를 한다고 해서 나아질 기미가 없습니다.”
“병원으로 옮긴다고 해도 겨우 숨이나 붙어 있는 정도겠죠. 안 그런가요?”
“…….”
제갈청룡이 시우를 노려보았다.
“무인에게 그런 삶을 강요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잘 아실 텐데요.”
“그래도 죽음보다는 더 낫겠지요.”
“단지 숨이 붙어 있는 상태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으려는 것뿐입니다.”
“한연맹의 맹주가 몽상가였군요.”
결국 제갈청룡의 입에서 뾰족한 소리가 튀어 나왔다.
시우가 정현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을 물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뒤 시우는 형원의 옆으로 가버렸고, 정현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청룡을 밖으로 보내었다.
“이러다 정말 큰 일이 날지도 모릅니다.”
제갈청룡의 말에 정현민이 잠시 시우를 보며 말했다.
“……맹주는, 우리에게 언제나 기적 같은 사내였네. 그 기적은 언제나 요행에 의한 것이 아니었어. 우린 그의 계획에 걸어 보겠네.”
정현민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자, 제갈청룡은 별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제갈청룡은 가까이 갈 수 있는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팔짱을 끼고 시우와 형원을 바라봤다.
말없이 눈을 감고 있던 형원이 번쩍 눈을 떴다.
시우가 형원에게 물었다.
“방법은?”
“진기를 직접 주입하고 단전을 재구성해서 다시금 새로운 내력을 가지게 하면……. 살 수 있어요.”
형원은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에 자신이 없었다.
시우는 그런 형원의 표정을 금방 눈치채고 물었다.
“뭐가 문제야?”
“우선은 진기가 얼마나 사용되어야 할지 몰라요. 단순히 영약으로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아무 진기나 주입할 수는 없어요. 근본적으로 본래 가지고 있던 진기를 사용해야 해요.”
멀리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빈이 손을 들었다.
“내꺼! 내 거를 써. 내가 누나랑 가장 비슷한 진기를 가지고 있을 거야.”
형원이 우빈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봤다.
“단순히 헌혈 같은 게 아니에요. 형의 진기를 다 써도 누나의 진기를 재구성하기도 모자랄 거예요.”
잠자코 듣고 있던 시우가 말했다.
“그러니까. 진기가 다시 돌게 만들기 위해선 새롭게 진기를 생성할 만큼에 막대한 진기의 양이 필요하다는 거지?”
“어떻게 보면 단전을 다시금 재구성하는 것보다 더 힘들 수 있어요.”
“좋아.”
시우가 아공간을 크게 열어 간이침대를 꺼내었다.
조심스레 소빈을 간이침대 위에 올린 시우가 우빈에게 말했다.
“잠깐 네 진기 좀 빌려줘.”
“뭐?”
시우가 우빈의 손목을 잡자, 우빈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온몸에 힘이 빠지며, 혈을 거꾸로 타고 들어오는 이질적인 기운이 단전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시우의 기운이 닿을 때마다 신경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에 우빈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시우의 손이 떼어지자, 우빈이 숨을 몰아쉬었다.
“뭐, 뭐야.”
“나가 있어. 지금부터 중요하니까.”
시우의 냉정한 말에 우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우빈이 물러나자 시우가 손을 가볍게 까닥였고, 사방으로 검은색의 막들이 생성되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네. 하지만 어쩌실…….”
“마법사는 자연의 에너지를 가장 세세하게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야.”
“진기는 일반적인 기와는 달라요. 같은 양의 기라도 밀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진기는 다시금 생성되지 않을 거예요.”
“우리한텐 이게 있잖아.”
시우는 독각화망과 천년지주에게서 얻은 영단을 꺼내었다.
“너는 통로만 열어.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시우의 말에 형원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형원의 손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시작해 단전과 백회까지 필요한 곳에 침을 꽂기 시작했다.
그 사이 시우는 영단과 더불어 색색의 마정석들을 허공에 띄웠다.
형원이 침을 꽂는 동안 허공에 뜬 마정석과 영단들이 시우의 조작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빛을 내비치던 마정석과 영단은 곧이어 작은 색색의 실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작은 색색의 실들은 시우의 손짓에 서로 엉키고 뒤섞여 특별한 모양의 굵은 실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형원이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시우가 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되지?”
“진기의 경우엔 상단전에서부터 시작해야 해요. 하지만 조심하셔야 해요. 잘못하면 뇌에…….”
“알았어.”
시우의 손짓을 따라 굵은 실이 상단전의 침을 타고 소빈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다음 여기.”
형원이 손으로 명치 부근을 가리켰다.
색실은 두 개로 갈라져 소빈의 명치에 머무르기 시작했고, 다시금 세 개로 갈라져 단전까지 흡수되기 시작했다.
형원이 가리킬 때마다, 실들이 분열되었다. 이윽고 소빈의 온몸에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촘촘하게 실들이 연결되었고, 그녀의 몸에선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후우…….”
소빈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형원이 깜짝 놀라며 말했지만 시우는 냉정하게 말했다.
“집중해.”
혀공에 떠 있던 영단과 마정석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영단과 마정석들이 사라지자, 소빈의 몸에 주입되던 실들도 소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에너지 공급이 끊겼지만, 소빈의 몸은 아직도 빛이 나고 있었다.
빛이 나던 소빈의 몸에서 빛이 사라지고, 소빈이 천천히 눈을 떴다.
“괜찮습니까.”
시우가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또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상황을 이해한 듯 소빈이 그렇게 말했다.
형원은 기운이 빠진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 생사신의님. 괜찮으세요?”
소빈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형원은 투정 부리듯 말했다.
“두 사람 다 긴장감이 없어요. 방금 죽을 뻔했다고요. 진짜로.”
형원의 말에 시우와 소빈이 말없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
암막이 사라지고, 소빈이 멀쩡하게 걸어 나오자, 제갈청룡은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궁금증을 풀 사이도 없이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시우를 중심으로 모였다.
“정말 대단하군. 이게 다 마법의 힘인가?”
제갈사열의 말에 황보철이 말했다.
“이 멍청한! 지금 그게 중요하냐! 장송계가 강호맹으로 도망쳤단 말이다!”
“이 황보 원숭이가!”
“자자! 그만들 하게. 회포는 나중에 풀게. 지금 중요한 건 장송계와 강호맹을 어떻게 하느냐네.”
남궁산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고, 백리세가와 공손세가도 그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그가 강호맹에 돌아가 맹도들을 이끌게 된다면, 정말 큰 전쟁이 벌어 날 수도 있어.”
“그것만은 막아야 하네. 일의 전말을 파악하기도 전에 무고한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도 더 힘들 수 있어.”
제갈사열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강호맹에 세력이 없고, 지금 바로 그를 잡을 수도 없네.”
남궁산의 말에 우빈이 손을 들었다.
“시우가…… 윽.”
소빈이 우빈의 옆구리를 찌르자 우빈이 말을 멈췄다. 우빈은 왜 그러냐는 듯 원망스런 눈으로 소빈을 바라봤지만, 소빈은 천천히 오대세가 가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희 한연맹의 맹주님께서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소빈의 말에 오대세가 가주들이 경악했다.
“저, 정말인가?”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갈청룡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우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장송계가 강호맹으로 가는 것에 대해선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그쪽엔 이미 사람을 보내 놨습니다.”
“사람?”
오대세가 가주들은 시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제갈청룡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