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시우는 공간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다른 통로를 발견하지 못했다.
형원은 통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방금 전 폭발에 의해서 막힌 걸까요?”
“아마도 이 무덤의 주인이 일부러 이곳을 막은 것 같다.”
통로를 막고 있는 흙과 바위의 색깔을 보니 공기에 오래 노출된 듯 파삭하게 말라 있었다.
“저분이 막은 걸까요?”
형원의 시선이 공간의 한쪽에 나 있는 작은 틈으로 향했다.
통로의 반대쪽에는 기어서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작은 틈이 있었다.
형원은 처음에 그곳이 새로운 통로와 연결된 곳이라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대경실색하였다.
세월 속에 삭아버린 사람의 뼈가 형원을 맞았던 탓이다.
너무 놀란 형원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릴 때, 시우가 들어섰다.
오랜 세월 공기가 통하지 않았던 듯 공간 안에는 텁텁한 냄새가 풍겼다.
사람이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집기는 하나도 없는 대신 뼛조각 앞엔 검은색의 상자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상자 안을 들여다보자 한 권의 서책이 존재했고 시우가 서책을 드는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책이 위태하게 부서지려 했다.
“이런.”
시우가 곧장 마법을 사용하여 서책을 조심스레 공중으로 띄웠다.
마법사의 기초 마법 중에는 보존되지 못한 고마법서 등을 취급하기 위한 마법이 꽤 많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칩거 생활을 즐기고, 홀로 고독히 죽어가는 일이 많았던 탓에 후대의 마법사들은 준비 없이 사망한 선배 마법사들의 지식의 요체를 흡수할 방법이 용이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시우는 알게니하 대륙에서 현대사회의 교육 전승 시스템이 얼마나 훌륭하게 돌아가는지 답답함을 몸소 느낀 후에야 체감할 수 있었다.
공중에 띄운 서책의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겼다.
세월에 풍화된 희미한 글씨들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대략적인 맥락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진소율이라고 하는구나.”
“진소율? 신투 진소율이요?”
형원이 놀라며 물었다.
“신투 같은 사람이 왜 이런 곳에서 죽으려 했을까요?”
형원이 씁쓸함을 느끼며 말했다.
신투 진소율은 중국 상계의 어린아이들에게 내려오는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 같았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알라딘 이야기처럼 진소율은 바람의 신의 도움으로 악당들의 보물을 훔쳐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의로운 도적이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도 형원에겐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런 존재가 이런 곳에서 쓸쓸히 죽어갔다는 것에 형원은 안쓰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저 사람은 자신의 후인이 이곳 정도는 들어 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네?”
“천하의 보화를 모아두고, 가장 중요한 자신의 심결을 숨겨 둔 이유는, 금은보화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보물을 찾을 줄 아는 냉정함과 판단력, 그리고 목적지에 닿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인내심을 보고 싶었던 것 같구나.”
“……결국 후인을 찾지 못한 것이겠네요.”
“본인이 너무 뛰어났던 탓일 수도 있겠지.”
시우는 이어 말했다.
“애도는 나중이다. 지금은 가야 할 곳이 있어.”
“어디로 가야 하죠?”
“입구로 간다. 일행들을 쫓아야 해.”
시우의 손에서 마법진이 소환되었다.
[매쓰 텔레포트]
시우와 형원의 몸이 아득해질 정도로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 * *
마치 태양이 지상에 내려앉은 듯, 환한 빛이 반짝였다.
빛이 사라진 후엔 기이한 복색의 두 인형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으아아아악!”
은색의 얇은 철판으로 이뤄진 갑주를 입은 형원이 비명을 지르자 시우가 가볍게 형원을 잡아채었다.
이윽고 추락하는 시우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솟았고, 두 사람의 신형은 다시금 천천히 떠올랐다.
“꽉 잡아라 바로…….”
핑.
시우가 곧장 몸을 돌려 날아가려는 그때, 검기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시우의 한쪽 날개를 찢어발겼다.
휘청이며 추락하는 시우와 형원의 신형.
한쪽 날개만 남은 것이 두 사람의 추락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쿵.
바닥으로 추락한 시우는 곧장 형원을 안고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시우와 형원이 있던 자리로 수 개의 검기가 날아들었다.
“놈에게 사술을 쓸 시간을 주지 마라!”
누군가의 외침에 응답하듯, 시우의 틈을 노리고 검기가 연속적으로 날아들었다.
형원을 안고 나려타곤을 시전하며 바닥을 구르는 와중에도 시우의 손에선 작은 마법진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구슬 크기의 마법진은 허공으로 떠오르며 손바닥만 하게 변했고, 수십 개의 마법진에선 파이어볼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파이어볼]
시뻘건 불길을 내뿜으며 날아가는 수십 개의 파이어볼은 외관의 위용 자체만으로도 상대에게 두려움을 준다.
하지만 미지의 적들은 그런 두려움도 없는지. 더 큰 외침이 들려왔다.
“모산파!”
공간을 불태우며 날아간 파이어볼이 마찬가지로 하늘을 날아온 괴황지에 부딪쳐 폭발도 없이 기화되어 사라졌다.
“무당…… 소림인가?”
잠깐의 틈을 탄 시우가 기습한 이들을 보며 말했다.
도사복을 입은 무인과 머리가 깨끗하게 밀린 무승들이 마치 철천지원수를 보듯 시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이미 이곳은 모두가 지나간 곳인데?”
무당의 도복을 입은 사내는 시우의 말에 크게 외쳤다.
“놈이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다! 절대 틈을 주지 마라!”
그의 말에 동조하듯, 무인들이 사방을 점하고 달려들며, 시우가 피해야 할 공간까지 빽빽하게 검기를 흩뿌렸다.
시우는 그런 그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좋은 생각이긴 해. 지금처럼 하는 게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 근데…….”
검기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오고, 포악한 기세를 내뿜는 무인들의 검이 은광을 번쩍였다.
“그건 수준 낮은 마법사일 때나 통하는 거지.”
시우의 주변으로 아머드 배리어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수 개의 검기들이 배리어에 부딪치며 사라졌다.
“나 같은 사람에게 통하는 게 아니야.”
검기가 지나가고 무인들의 검이 시우의 배리어를 때렸다.
배리어가 검압을 이기지 못하고 깨지자, 무인들이 더욱 자신만만하게 검을 휘둘렀다.
퍽!
하지만 또다시 검에 걸리는 투명한 막.
그리고 그 투명한 막 안으로 시우의 손에서 수십 개의 마법진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혈체강시를 양옆에 낀 천마강시가 우빈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소빈을 안아 들고 있는 정현민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고, 제갈청룡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제갈세가의 무인들 몇몇이 막아보려 다가섰다.
“끄아아악!”
하지만 혈체강시와 천마강시의 가벼운 손속에 피분수가 터지며 바닥에 쓰러지자 더 이상 나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지체 없이 다가서는 그들의 목적은 노골적이었다.
제갈적룡은 두려운 듯 갸르릉 소리와 함께 제갈청룡 뒤에 계속 몸을 숨겼다.
우빈은 고개를 돌려 소빈을 바라봤다.
그리곤 바닥에 나뒹구는 검을 집고 앞으로 나섰다.
진신내력을 사용한 누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아주 가벼운 충격에도 회복할 수 없을 큰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
‘더 이상 다가오게 해선 안 된다.’
모두들 천마강시와 혈체강시를 향해 도망치려는 것과 달리 우빈은 흙바닥이 깊게 파일 정도로 강하게 바닥을 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흐아아압!”
태백지존검의 기운이 검극에 모였다. 웅혼하게 울리는 기운이 주변의 기들을 끌어당기고, 주변의 대기들은 일순간 바람이 부는 것처럼 급격하게 움직였다.
“태백압천!”
번쩍이는 검광이 일순간에 십여 번의 빛을 발하고, 혈체강시들의 손이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빈의 검이 강시들보다 압도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혈체 강시들의 팔에 하나둘 생채기가 생기고, 손가락들이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강시들은 피육이 잘려도 고통스러운 표정은커녕,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상대 더욱 큰 공포를 선사하고 있었다.
캉! 캉! 캉캉캉캉캉!
우빈의 검이 연속으로 혈체강시의 목을 치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공격에 혈체 강시의 목이 잘려나가고, 목이 떨어지자 강시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우아아아아아!”
혈체강시 하나가 죽자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기세 좋게 소리를 질렀다.
우빈은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켜 천마강시를 피해 다른 혈체 강시의 목을 베어내려 했다.
텁.
하지만 방어를 도외시하고 손을 뻗은 천마강시의 손에 우빈의 검이 잡혔고, 태백지존검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지만 검은 빠지지 않았다.
우빈이 바닥에 떨어진 다른 검을 집어 들었다.
우빈이 다시금 천마강시와 혈체강시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검날을 잡고 있던 천마강시의 자세가 바뀌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사지와 자연스럽지 못한 움직임 등. 전설에 등장하는 천마강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던 천마강시가 갑작스레 인간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을 고쳐 잡자 천마강시의 몸에서 진득한 마기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커흑!”
“우웩!”
감당할 수 없는 마기에 무인들이 픽픽 쓰러졌다.
검을 고쳐 잡은 천마강시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투툭. 툭. 투투투툭.
검에서 뻗어 나온 강대한 마기는 시공간마저 잘라버릴 만큼의 예기를 가지고 있었고, 미처 천마강시의 공간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혈체강시는 조각조각 신체가 부서져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처, 천마오검.”
이번에도 아는 게 많은 제갈청룡이 가장 크게 놀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천마강시가 무서운 점은 천마강시 자체의 강력함도 있었지만, 천년마교의 철학을 고수처럼 쓸 수 있는 데서 기인했다.
우빈은 입술을 물고 천마강시에게 검을 날렸다.
피아도 구분하지 못하고 혈체강시를 잘게 쪼개버린 천마강시의 모습에 우빈은 더욱 분노를 느꼈다.
겨우 이 정도의 미물에 자신과 누나 모두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우빈은 극한으로 내공을 끌어내어 천마오검에 대항했다.
천마오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마기가 사방을 휩쓸었다.
쾅!
검과 검의 부딪침이라기엔 너무 큰 폭발음이 울렸다.
펑!
마기가 터져 나가며 천마강시가 뒤로 밀렸다.
“크윽.”
우빈이 피를 게워내며 필사적으로 내공을 안정시켰다.
검이 부서지면 바닥에 떨어진 검을 들고, 놈이 조금이라도 소빈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온몸이 부서져라 부딪쳤다.
처절한 우빈의 모습에 참다못한 제갈청룡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본능만 남은 제갈적룡이 제갈청룡을 막아서고 있었다.
“형님 지금 나가지 않으면 우빈이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크르르르.”
제갈적룡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제갈청룡을 막아섰다.
결국 제갈청룡이 제갈적룡의 마혈을 짚으려던 순간.
처음 보는 이가 천천히 제갈 형제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짐승의 본능은 정확한 편이지.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기이한 복장의 기이한 물건을 옆에 낀 인형은 그렇게 제갈 형제를 지나 정현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정현민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가늘게 숨이 끊어져 가는 소빈을 안고 있는 정현민은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졌다.
시우가 품에서 포션을 하나 꺼내어 소빈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조금 기력을 차린 것인지 소빈이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다.
“매, 맹주님…….”
“너무 늦었습니다.”
“미안…… 해요. 힘이 되고…… 싶었는데…….”
시우가 소빈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충분히 힘이 되었습니다.”
시우의 말에 안심한 듯 소빈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살려 놓을 수 있겠느냐?”
시우가 형원을 보며 얘기하자 형원이 주저하며 답했다.
“여기선 치료하기가 힘듭니다.”
“살려만 놓아라. 치료는 모두를 지운 후 한다.”
그렇게 말하곤 시우는 차갑게 형원을 지나쳤다.
천마오검이 작렬하며 마기를 터트리자 우빈의 손은 방어하기 급급했다.
시우의 손에서 생성된 검은색의 검이 가볍게 휘둘러지자 사방에 진득한 살기가 가득 차며 천마강시를 주르륵 뒤로 밀어냈다.
“하아, 하아, 하아, 너무 늦잖아!”
우빈이 불평하듯 말을 토해냈다.
차가운 표정의 시우가 말했다.
“돌아가면, 지옥훈련이다.”
“지옥훈련이든 뭐든 돌아가기나 하자.”
천마강시는 자신이 뒤로 밀려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앞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시우의 검이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사방의 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