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생사관을 통해 지옥관을 나온 장송계의 옆에는 마교의 한 인물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계곡으로 들어선 장송계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 놈들…!’
강호대회합에 합의한 맹약에 따라 해산한 오대세가의 구성원들이 천년 마교의 교도들과 맞붙고 있는 와중이었다.
한때 상계의 거목이었던 오대세가 연맹이 이제는 강호맹의 연맹이 된 마교와 전투를 벌인다는 건, 오대세가가 맹약을 어기고 강호맹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더구나 중과부적으로 마교가 밀리고 있었다.
형란을 확보한 뒤 강호맹으로 돌아가려던 장송계의 계획이 어긋나 버렸다.
“그만!”
장송계의 목소리가 계곡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뭣들 하는 것인가!”
장송계의 등장에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그를 바라봤다.
“오대세가가 맹약을 어기고 상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려 하는 것인가!”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로 이어지자 남궁산과 제갈사열이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이오. 장문주. 최근에 맹주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어찌 취임식도 하지 않았소?”
제갈사열의 말에 장송계는 분노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대답하시오. 제갈가주. 지금 이 자리에 오대세가가 모인 것을 맹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 봐도 되겠소?”
“강호맹은 당초 무림동도들의 뜻을 모은 협력체요. 언제부터 그대들이 우리 머리 위에 섰단 말이오?”
“말장난은 집어치우시오! 지금 중국 상계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 있는지 아시오?”
“그 위험을 자초한 게, 화산파와 무당파라 들었소.”
“뭣이!”
“왜 야토가미의 세력이 사라진 것을 공표하지 않았소? 강호맹은 야토가미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지 않았소?”
제갈사열의 말에 장송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야토가미 이후에 더욱 큰 위험세력이 생겼소.”
“그럼 왜 그 또한 공표하지 않은 것이오?”
야토가미의 술과 야토가미를 무너뜨린 시우의 마법을 독식하기 위함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모든 정보를 밝힌다면 큰일을 제때 대비하지 못하고, 상계에 큰 혼란만 가중할 뿐이오. 지금도 보시오! 가만히 있어야 할 오대세가가 맹의 대업을 방해하고 있지 않소!”
장송계의 말을 듣던 남궁산이 형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린아이를 저런 철창에 가두는 것이 맹의 대업이란 말인가?”
남궁산의 말에 장송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닥치시오! 강호맹의 위기가 남궁세가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 않소!”
남궁산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국 연맹의 힘이 크는 것이 그리 두려웠소이까?”
“야토가미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벌써 잊었소이까?”
장송계의 말에 남궁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잊지 않았소. 대대로 그 이야기를 들어왔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 뿐만 아니라 상계의 모든 세력들이 노력해왔소.”
오대세가의 가주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언제부터 무림의 정의가 힘의 논리로 정해졌소!”
“….”
“정과 마가 척을 지었을 때도, 사파가 무림을 장악하려 했을 때도, 언제나 적들의 힘은 우리보다 더욱 거대했소! 그렇지만 우리가 무림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이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안에 협의(俠義)가 있었기 때문 아니었소!”
장송계는 말이 없었다.
“우린 그동안 외면했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았소. 모산파를 지원하고, 잡술이라 천대했던 기문둔갑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소. 우리의 발전을 저해했던 것들을 지우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소. 이 모든 노력들은 우리의 협의를 지키기 위함이지 더 큰 힘으로 누군가를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었지 않소.”
오대세가는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청룡이 허공에서 들썩거리는 하얀 상자를 보았다.
제갈세가의 장자가 이지를 상실한 짐승처럼 날뛰는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였다.
하지만 제갈적룡도 자신도 그런 희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만두시오. 이미 강호맹은 명분을 잃었고, 정의까지 잃어가고 있소이다. 이 이상 계속한다면 그대들은 중국 상계 전체의 뜻을 어기는 것과 다름없소.”
장송계의 얼굴에서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남궁산의 말마따나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취해 와있었는지, 무엇을 얻고자 했었는지 헷갈렸던 참이었다.
화산파의 진문형이 무리한 행동을 할 때도 우려했던 사람이 자신이었다.
일생을 더불어 도를 닦는 도사의 자세에서 벗어남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던 자신이었건만, 지금은 배고픔을 해소하지 못하는 아귀처럼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몰려오자,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장송계의 침묵이 길어지고, 그의 표정에서 고뇌가 떠오르자 제갈사열이 그를 돕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은 우리가 최대한 마무리 짓겠소. 마침 남궁가가 한연맹과 연이 깊으니 잘 설득한다면 평화로이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오.”
고뇌하던 장송계가 제갈사열의 말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우리?”
우리라고 했다.
그 우리 안에, 장송계와 강호맹이 포함되지 않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결국 그 ‘우리’는 자신들의 세력 오대세가를 말하는 것이고, 그 새로운 세력은 강호맹을 대체하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흐흐. 그럼 그렇지. 세속에서 허우적대는 네놈들의 소갈머리야 뻔한 것이겠지.”
장송계의 입에서 듣지 못했던 된 소리가 흘러나오자 제갈사열이 당황했다.
남궁산은 장송계의 모습에 아차 싶었다.
‘그를 자극하고 말았구나.’
“정의와 협의를 울부짖는 너희들의 목적이야 언제나 뻔한 것이 아니었더냐. 그랬기에 강호맹에서 너희들을 제외한 것이었지.”
장송계가 고개를 들었다.
“왜 이런 사태를 만들었냐고 물었느냐? 힘이 곧 정의기 때문이다. 마교가 그랬던 것처럼, 야토가미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한연맹이 그러는 것처럼 힘의 크기가 곧 정의의 당위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남궁산이 급박하게 외쳤다.
“맹주! 지금에선 당신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이건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소리요!”
장송계는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정파라 자부하는 자이지만, 정파의 위선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교들이 우릴 볼때마다 구역질을 해대려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맹주! 말이 심하시오!”
제갈사열이 일갈했다.
“적도 아닌 동지가 약해진 틈을 타 뒤를 치려는 네놈들을 그럼 무엇이라 이야기해야 하느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였느냐?”
장송계가 아까부터 뒤에 서 있던 자에게 눈짓을 주었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너희가 한번 증명해 보거라. 그 숭고한 협의로 얼만큼의 힘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검은 복면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 묵색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사내의 복장과 무기가 심상치 않아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일제히 외쳤다.
“음공일지 모른다! 모두 대비하라!”
가주들의 말에 무인들은 일제히 내공을 일으켜 청력을 보호하기 시작했고, 더러는 점혈을 통해 청각을 마비시키거나, 여의치 않은 자들 중엔 손으로 귀를 막는 자들도 있었다.
마교의 교인들은 그런 무인들을 보며 실소를 감추지 않았다.
검은 복면을 쓴 사내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본격적으로 묵색의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이고, 가볍게 박자를 타는 듯 어깨가 들썩거렸다.
하지만 사내가 능수능란하게 피리를 불고 있음에도 음공에 당한 이들은 없었다. 개중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자 조금씩 청각을 개방시켜 음공의 간을 보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음공에 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하나둘 손을 내리고, 청각을 보호하던 내공을 끊어내기 시작했다.
그나마 가주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젊은 무인들에게 경고를 했다.
“다시 내공을 일으켜라! 음공은 너희들이 알 수 없는 사이에 그만 당하고 만다!”
가주들이 그렇게 경고성을 내뱉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경고성을 내뱉었던 가주들도 머슥함을 느낄 사이.
하늘에서 공기를 가르고 낙하하는 물체들의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휘이익.
푹. 푹. 푹. 푹.
연달아 내려앉는 물체들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계곡의 흙바닥에 깊게 꽂혔다.
그리고 천천히 흙바닥을 해치고 나오는 물체의 정체에 무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 강시!”
혈기가 돌지 않는 하얀 얼굴, 죽은 듯 감정 없는 얼굴. 붉은 핏발이 가득한 눈동자.
오십에 달하는 혈체 강시가 오대세가의 무인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제자들은 뒤로 피해라!”
강시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오대세가의 무리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아악!”
피분수를 뿌리며 죽는 황보세가의 무인을 시작으로 잠시 멈추었던 전투가 재게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교의 교인들도 검을 뽑아 오대세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대세가에게 유리하던 전투는 삽시간에 기울어졌다.
검을 부수는 팔과 호신강기를 무시하고 들어오는 강시의 수공에 가슴이 뻥 뚫린 무인들의 시체가 산을 쌓기 시작했다.
제갈청룡은 재빨리 하얀 상자를 해제했다.
“크르르.”
제갈적룡은 자신을 가뒀던 제갈청룡에게 분노하듯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형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갈적룡은 제갈청룡에게 달려들다가 제갈청룡이 가리키는 곳을 보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 강시 하나의 목을 잘라 내었다.
“우빈아!”
정현민이 자리를 박차고 나서려는 우빈을 말려 보았다.
“작은아버지. 지금 저들을 치지 않으면 누나를 데리고 나갈 수 없어요.”
우빈의 말에 정현민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빈과 제갈적룡은 강시만을 노리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밀리던 오대세가가 제갈적룡과 우빈의 합류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오대세가의 무인들은 최대한 방어에 치중하여 강시를 한쪽으로 몰고, 한편으론 마교의 교인들을 상대했다.
“우아아아아아!”
우빈의 검이 또 하나의 혈체 강시의 목을 자르자 오대세가의 무인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기세가 오른 오대세가의 무인들은 우빈과 적룡이 강시를 쉽게 상대할 수 있도록 자리를 터주고, 강시를 한 마리씩 몰아갔다.
오대세가의 피해가 줄고, 천마교룡대와 천마위룡대의 피해가 늘었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삭월이 장송계를 향해 외쳤다.
“장송계! 언제까지 기다릴 셈이냐! 사자부는 교인들을 위한 것이다!”
삭월의 외침에 장송계가 무감각한 눈으로 삭월을 보다 묵색 피리를 부는 사내와 눈을 맞추었다.
장송계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더욱 격렬하게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에 응답하듯, 혈체 강시들의 기세가 더욱 매서워졌다.
“으아아악!”
방어에 치중하던 오대세가의 제자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선 다시금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더욱 빠른 속도로 낙하하던 물체들은 이번에 바닥에 꽂히지 않았다.
마치 절정에 오른 고수처럼 가볍게 허공을 차고 바닥에 내려앉은 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아아아아아!”
몇 남지 않은 천마위룡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승리를 확신한 듯 천마교룡대에서도 환호를 금치 않았다.
열 명의 인형들의 등장에 우빈이 지체하지 않고 태백지존검을 일으켜 폭풍처럼 맨 앞에 선 인형을 몰아쳤다.
캉! 캉! 캉캉캉캉!
자연검의 심체를 포함한 검이 연약한 인간의 손에 막혔다.
몇 번이나 틈을 노리고 검을 찔러보았지만, 틈을 노리고 찌른 검도 인형의 몸에 닿은 후엔 캉 소리만 내며 튕겨져 나왔다.
뒤로 물러선 우빈이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이빨이 나가고 휘어진 검이 더 이상 제구실을 못 할 것처럼 보였던 탓이다.
‘자연검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우빈이 멍해 있는 사이, 제갈적룡이 짐승처럼 네발로 달려들어 첫 번째 인형을 공격하였다.
인형 또한 무감각하게 손을 뻗어 제갈적룡의 공격을 막아 내려 했지만, 그 순간 제갈적룡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하며 그대로 인형의 몸을 통과해 버렸다.
인형이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제갈적룡이 뒤에서 땅을 박차고 단숨에 인형의 목을 찢어발겼다.
캉!
하지만 이번에도 인형의 목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텁!
인형은 재빨리 제갈적룡의 목을 잡고 가볍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푸칵!
가볍게 내두른 손짓에 제갈적룡의 몸이 1미터나 땅으로 파고들며 흙먼지를 사방으로 날렸다.
인형의 신위를 본 제갈청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천마강시….”
혼잣말처럼 내뱉은 제갈청룡의 말을 들었는지 장송계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나마 보는 눈이 있는 녀석이 있었구나.”
장송계의 말에 오대세가의 무인들의 얼굴에 절망 가득한 놀람이 지워지지 않았다.
염홍대좌와 함께 강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천마강시.
그런 천마강시가 하나도 아닌 열이나 나타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