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소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큰 외상은 없었지만, 진신내력을 가져다 쓴 그녀는 외상보다 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우빈과 정현민이 돌아가면서 태백기를 쏟아부었지만, 이미 고고한 경지에 오른 그녀의 단전을 채우기는 무리였다.
“빨리 옮겨야 해. 이대로면….”
말을 잇지 못하는 제갈청룡의 얼굴을 보던 현민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응급처치만이라도 안 되겠는가?”
제갈청룡이 고개를 저었다.
“내상이 곧장 외상으로 이어질 겁니다. 전문적인 치료가 시행되지 않으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요.”
현민은 우빈을 보며 말했다.
“네가 누나를 데리고 가거라.”
“….”
아직 그들은 맡은 바 임무를 다 수행하지 못했다.
눈앞의 형란을 구하지 못했고, 시우를 도울 수 있는 인원도 필요했다.
그런 우빈의 주저함을 아는지 현민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맹주는 우리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이미 제갈세가가 이곳에 왔으니 너무 걱정 말아라.”
제갈청룡과 남궁청마저 우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우빈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소빈을 등에 업으려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계곡 위에서 마기를 한껏 품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일행들 모두의 시선이 계곡 위로 향하고, 그곳엔 사슬과 묵창을 든 사내가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대주님을!”
창을 든 사내가 계곡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듯한 사내의 신위에 우빈 일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뒤이어 사실을 든 사내 또한 마치 나풀거리는 천처럼 바닥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대주! 대주!”
구양패의 모습을 살피던 사슬의 사내가 살기를 띠며 제갈청룡등을 바라봤다.
“누구냐! 감히 마교의 천마위룡대의 대주를 해한 자가 누구냐!”
서슬 퍼런 기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묵창을 든 이가 사슬 사내의 옆에 서며 말했다.
“네놈들이 한 짓이더냐?”
제갈청룡이 나서며 말했다.
“우린 그저 우리를 보호하려 했을 뿐이오.”
사슬의 사내가 제갈청룡을 바라봤다.
“기문둔갑의 흔적을 보았다. 제갈세가도 이 일에 함께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느냐?”
“….”
제갈청룡은 입을 다물었다.
“대주님의 명령으로 모른 척하고 있었다만, 이렇게 된 이상 너와 너희들의 가문에 책임을 물어야겠다.”
사슬의 사내의 말과 함께 계곡을 둘러쌓고 수십 명의 마인들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하나하나가 막대한 기운을 펼치는 절정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교룡대의 부대주의 눈을 속이긴 힘들군요.”
제갈청룡이 사슬의 사내를 보며 말했다.
사슬의 사내는 마교 서열 37위의 적풍자 삭월이었다.
“이 일이 강호맹은 물론 상계에 대한 배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한 행동이겠지?”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선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이 무인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생각합니다.”
“너희들이 저지른 일은 강호맹 뿐만 아니라 마교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 알고 있느냐?”
마교가 강호맹에 들어가면서 마교 또한 상계의 한 축이 되었다.
그들의 행동 또한 명분만 있다면 정당화될 수 있었고, 상계 최강의 세력인 마교가 정당화까지 한다는 건 그동안 마교를 적대해오던 정파의 대부분 문파들에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이미 강호맹은 무인의 도리를 저버렸으니 책임을 질 것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무의미한 말만 내뱉는구나.”
삭월의 손짓에 천마위룡대와 천마교룡대 모든 인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책임은 너희의 목을 가지고 직접 네놈들의 가문을 방문하여 묻겠다.”
천마위룡대와 교룡대의 모든 인원들이 계곡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신법을 사용하여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 엄청난 위용에 일행들 모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제갈청룡은 여유 있게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계곡의 입구에서 일단의 무인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천마위룡대는 새로 달려오는 무인들을 향해 마기를 뿜으며 접근을 불허했다.
삭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갈가의 무인들로 우리 위룡대와 교룡대를 상대하려 하느냐?”
새로이 등장한 이들은 다름 아닌 제갈세가의 무인들.
제갈청룡의 연락에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제갈세가의 무인만으로 상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뭐?”
여전히 여유만만한 제갈청룡의 얼굴에 삭월이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죄송해요! 너무 늦었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천마위룡대가 떨어져 내린 계곡 위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수님 이리 늦으시면 어쩝니까.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도련님! 전 밥도 못 먹고 달려왔다고요. 우리 적랑은 괜찮아요?”
“저기 안에 넣어 두었습니다.”
새로운 인물은 다름 아닌 황보현이었다.
그의 뒤로 커다란 덩치에 창을 든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묵야자 네놈이 어디에 숨었나 했더니 마교의 졸개 노릇을 하고 있었더냐!”
묵야자라 불린 묵창의 사내가 커다란 덩치의 사내를 보며 이를 갈았다.
“황보 원숭이 네놈이 아직도 살아있었구나.”
놀랍게도 황보현과 함께 등장한 이는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철이었다.
삭월이 황보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보세가도 강호맹의 의지를 거스르는 겁니까?”
“애초에 따르지 않았는데 거스를 것이 무에 있겠느냐!”
“좋습니다. 그 책임은 마땅히 지셔야 할 겁니다.”
천마위룡대가 황보세가 쪽으로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그 책임 우리도 지지!”
새로이 들리는 목소리에 삭월의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지도록 하지!”
반대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등장했다.
제갈사열과 함께 등장한 공손세가.
남궁산과 함께 등장한 백리세가였다.
삭월이 이를 갈며 말했다.
“정파의 위선자들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는 것이 없군요.”
“마교의 졸개가 강호맹 생활을 하면서 글을 익혔나 보구나! 혓바닥 굴러가는 것이 저 제갈가주 놈보다 낫구나, 크하하하하.”
황보철의 웃음이 계곡 전체를 울렸다.
“이 행동의 대가는 철저하게 받아 낼 것입니다.”
“도리를 바로 잡는 데에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지옥에 먼저 가시어 제 자리도 준비해 주십시오.”
제갈청룡의 말에 삭월의 온몸에서 마기가 넘실대었다.
“천마의 후예들이여. 적을 척살하라!”
삭월의 말을 신호로 수백의 무인들이 맞붙기 시작했다.
* * *
형원은 시우가 그린 마법진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강호맹이 만든 공간은 계상학이 있던 무릉도원의 공간에 비등하게 컸지만, 시우와 혁련무궁은 그 커다란 공간이 좁게 느껴질 만큼 대단하게 맞붙고 있었다.
콰콰콰쾅!
퍼퍼퍼펑!
파괴음과 굉음이 귓전을 때리고, 사방으로 돌가루와 나무 둥치가 날아다녔다.
마법진 밖으로는 마치 커다란 폭풍이 몰아치듯 주먹만 한 돌멩이가 낙엽처럼 날리고 있었다.
“히익!”
전투를 감상하던 형원의 눈에 집채만큼 커다란 바위가 형원을 향해 날아들었다.
형원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퉁!
형원의 주위로 쳐진 반투명한 막에 집채만 한 바위가 걸려 더 이상 낙하하지 못하고 튕겨 나가 주변으로 떨어졌다.
쿵!
집채만 한 바위가 흙바닥을 파고 깊게 박혔다.
이게 바로 형원이 마법진을 나서지 못하는 이유였다.
‘과연 이것이 인간의 싸움인가?’
시우의 신위를 봐온바 그가 부리는 마법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혁련무궁과 맞붙는 그의 모습은 형원에게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지게 만들었다.
불빛으로 형상화된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빛과 어둠의 싸움처럼 보였다.
마법으로 엄청난 위치에 올라와 있고, 무공 또한 그에 못지않은 수준을 가졌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런 그와 비등하게 맞붙고 있는 혁련무궁 또한 초월적 존재처럼 보였다.
‘이것이 최상위 존재들의 싸움.’
무공을 잘 모르는 형원의 눈에도 두 사람의 전투는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맹주님.’
형원은 어떤 간절한 기도를 담아 두 사람의 전투에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전투의 결과가 곧 자신의 인생과 직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치열했던 두 사람의 전투는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늘을 수놓는 빛의 세력이 조금씩 차이 나기 시작했다.
빛을 집어삼키던 어둠은 그 세력이 점점 줄기 시작했고, 혁련무궁을 감싸고 있던 마기의 색도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끝인가?’
시우와 몇 번이나 맞붙던 혁련무궁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평생을 생과 사의 위태한 경계선에서 살아왔던 그였기에 자신의 결말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텅 빈 왼쪽의 팔 부분을 바라보았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것 때문에 진다는 핑계는 대고 싶지 않았다.
아마 내력이 충만하고 팔이 온전했어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처음 한국에서 만났던 날이 기억나는군.”
새파랗게 어린 시우의 모습에서 수십 년을 고되게 살아온 원로의 모습이 보였다. 더할 나위 없었던 여유, 두려움 없는 행동, 흔들림 없는 눈동자.
반박귀진(返撲歸眞)의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반박귀진은커녕 단전에 내공 한 줌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런 그에게 호승심을 느끼고 결투를 치른 후에 그가 느끼는 감정은 ‘새로움’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신을 쓰러트리고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혁련무궁은 패배에 대한 굴욕감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들떠 있었다.
“그대와 단 두 번의 승부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다!”
시우의 황금빛 검이 마기를 먹어가며 점점 확장되어갔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개종한다면 자비를 베풀어 보지.”
시우의 말에 혁련무궁이 웃음을 터트렸다.
“땡중의 무공을 쓰더니 자비심이 생기기라도 했느냐?”
“금강의 효능이 너무 좋아, 개종 직전이야.”
혁련무궁이 시우의 검에 맞추어 빠르게 움직였다.
탕! 탕! 탕! 탕!
매번 충격음이 있을 때마다 그의 손이 더욱 저리기 시작했다.
“본교에선 무의미한 것에 고집스레 매달리는 것을 집착이라 한다.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본래의 모습을 숨긴 채 집착하는 것이 곧 위(僞)라 하고, 위가 바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존재라 이야기하지.”
“그래서 정파와 마교가 그렇게 안 맞는 건가?”
“크하하하! 그래. 바로 그것이다. 나 또한 평생을 마(魔)보다 위(僞)에 대한 경계를 더욱 높이 했다.”
혁련무궁이 자신의 내기를 갈무리했다.
허공을 넘실대던 마기들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것을 놓지 않는 것이 진정한 나로서 남는 것이다.”
혁련무궁의 내공이 역순환 하기 시작했다.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고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막대한 진기가 그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잘려나간 팔 위로 강기의 손이 생기고, 얇았던 검신은 거대하게 변하여 양손으로 잡아도 부족해 보일 지경이었다.
멀리 절대적인 방어막 안에 앉아 있던 형원이 입에 거품을 물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반대로 시우는 착잡한 눈동자로 그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순수한 사람이다.”
시우의 말에 혁련무궁이 광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나는, 누구보다 강한 자로 남고자 한다.”
“물론, 그것도 맞아.”
시우의 손에서 붉은색의 기와 황금색의 기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천살의 기.
금강의 기.
절대 융합될 수 없는 두 가지의 기가 하나로 뭉쳐져 아름다운 나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의 격돌은 공간뿐 아니라, 닿지 않는 지축까지도 흔들었다.
폭음마저 삼켜버린 두 힘의 격돌은 빛마저 삼켜 버릴 광원을 만들었고, 모든 것을 쓸어 버리기 시작했다.
돌, 바위, 흙, 나무.
파괴력을 감당하지 못한 물체들이 가루로 변하여, 공간 안에 자욱하게 날렸다.
마치 사막의 모래폭풍이라도 온 듯 빛이 가시고 모래바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사박. 사박.
쌓이기 시작한 모래 위로 천천히 걷는 발자국이 있었다.
시우가 손을 들었다가 내리자, 공간 안에서 마구 휘날리던, 모래들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시우의 눈앞에 단전이 뻥 뚫린 채 서서히 죽어가는 혁련무궁이 있었다.
“괜찮나?”
“쿨럭, 큭, 이 정도 상처쯤이야.”
시우가 착잡한 눈으로 말했다.
“목숨은 붙여 줄 수 있어.”
시우의 말에 혁련무궁이 인상을 찌푸렸다.
“커흑, 나를 모욕하려는 거냐?”
“유일한 라이벌을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래.”
시우의 말에 혁련무궁이 웃음을 흘렸다.
“크흐흑, 나의 삶은 그대로 인해 완벽해졌다. 이 이상을 산다면 그건 내게 위(僞)일 뿐이다.”
“…미안하군.”
시우가 아쉬워하며 돌아서려 할 때였다.
“쿨럭, 나도 그대에게 선물을 주겠다.”
“뭐지?”
“마교에서 강시를 데리고 나왔다.”
“강시?”
“그래, 그대의 그림자 무사를 상대하기 위함이지.”
“하지만, 이곳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혁련무궁은 끝을 향해 가는 듯 점점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서 가봐라. 지금 움직인다면 늦지 않을 것이다.”
혁련무궁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시우의 머릿속에 불안감이 스치고, 재빨리 형원을 안아 든 시우가 블링크로 쾌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