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시우와 형원은 통로를 한참이나 걸었다.
통로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함정들이 즐비했고, 여러 갈래로 나뉜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시우는 여러 갈래의 갈림길이 나타날 때도 마치 길을 아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길을 선택했다.
형원은 그런 시우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이곳에 들어오신 적 있으시오?”
“아니.”
“그럼 어떻게 알고 가시는 거예요?”
“패밀리어는 마법사의 눈과 귀가 되어 주거든.”
시우가 손안에서 검은 까마귀 하나를 생성했고, 까마귀는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동생이 있는 곳을 찾을 수는 없나요?”
형원이 스스로에게 창피한 듯 고개를 숙였다.
“도망치고 싶니?”
‘도망’이란 단어에 형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이를 떠나서 모든 남자에게 ‘도망’이란 단어는 역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형원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전 그냥 동생만 찾아서 돌아가고 싶어요. 저 때문에 다른 분들이 위험해지는 것도 싫고요.”
시우가 부드럽게 형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마 내 능력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다. 아니, 더 쉬울 수도 있지.”
시우는 형원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다.
도망치고 싶었던 학창시절, 벗어나고 싶었던 자신.
매일매일을 기도했다. 지옥 같은 이 현실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도망친 곳은 지옥보다 더 처참한 현실이었다.
“지금 당장 그자들의 눈을 벗어난다 해도, 넌 자유를 얻지 못할 거다.”
지구의 상식 따위는 허용되지 않는 세계.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던 곳이, 시우에겐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매일 계속되는 매타작과 굶주림 속에서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리며 후회의 나날을 보냈다.
“오히려, 매일매일을 그들을 두려워하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낼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하며.”
어쩌면, 한국에서, 중곡고등학교에서도 자신은 행복할 수 있었다고.
공부를 하고, 몸을 단련하고, 깡을 키우고, 그것도 안 되면 모두에게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부당한 폭력과 가난으로부터 얼마든지 맞서 싸울 수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알게니하 대륙에서도 시우는 매일 도망쳤다.
그리고 절망의 끝에서 깨달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하면 싸울 수 있다. 싸우는 순간부터 너에겐 힘을 얻고 자유를 누릴 가능성이 생기는 거다.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가리고 상대를 더욱 크게 만든다. 도망은 결국 어떤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
“제 힘으론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 낸다 해도 싸워 이길 수 없어요.”
“그 생각이 바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기 때문에 생기는 거다.”
형원은 머리가 복잡한 듯 시우를 바라봤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선 상대의 약점을 파악할 수 없다.”
“…단지 약점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땐 어떻게 해야 하죠?”
“상황도 이용하고, 사람도 이용하고, 전략을 짜고, 모략을 꾸며서 이겨 내면 된다. 약점을 파악한다는 건, 단지 상대의 약한 부분을 노리는 게 아니야.”
시우의 말에 동감하는 형원이지만, 그의 말에 큰 모순점이 있다.
그건 바로 형원이 보기에 시우가 ‘절대 강자’라는 것이었다.
“만약 맹주님이 제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하셨을 거 같으세요?”
시우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치기 어린 형원의 질문의 의도가 뭔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우는 그의 의도에 맞는 답을 해주고 싶었다.
“나의 상황과, 강호맹의 상황을 이용하고, 나의 목적과 강호맹의 인물들의 목적을 이용해서 동생을 구하고 자유를 얻어냈을 거다.”
“하지만 지금 맹주님께선 절 도와주고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더욱 확실한 동기를 부여해줬겠지. 가령, 이곳에 들어온 나는 최악의 상황에서 너를 포기할 수도 있다.”
형원이 토끼눈이 되어 시우를 바라봤다.
“또한 강호맹은 우리와의 약속을 어기고 네 동생을 죽일 수도 있지.”
“…….”
“상황은 언제나 급변한다. 그저 누군가를 믿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모조리 맡기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무책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상황에 맞게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고의 힘이 필요하지.”
형원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못했다.
“걱정마라. 너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
시우는 그런 형원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형원은 그제야 조금 안정이 된 듯 눈가에 작은 물방울을 소매로 훔쳐내었다.
통로의 끝에 빛이 새 나오고 있었다.
“내 말을 명심해라. 언제나 두려움과 공포를 지우고 냉정한 눈으로 세계를 바라봐라.”
형원은 대답 대신 굳건한 표정으로 답했다.
* * *
통로를 지나치자, 공간은 또 다른 낮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엔 환상으로 만들어진 구름과 태양이 보였고, 지상엔 매끈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연무장이 존재했다.
사방을 아우르는 건물들은 현대에선 볼 수 없는 고대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공간의 중앙엔 흑과 백의 무복을 입은 두 사내가 오연하게 서서 시우와 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우 또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인지라 반색하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왼쪽의 흰색 무복을 입고 하얀 수염을 턱까지 기른 장송계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대단하군.”
“길을 어지럽게 만들어 놓는 바람에 고생 좀 했어. 그나저나.”
장송계에게 말을 하던 시우가 혁련무궁을 보며 말했다.
“마교는 언약을 하찮게 취급하나 봐? 분명 약속을 했을 텐데.”
시우는 한국에서 혁련무궁과 대련을 벌일 때,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교주의 위를 걸고 한 약속이기 때문에 절대 어길 수 없는 약속.
혁련무궁은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놈 눈엔 내가 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더냐?”
“분명 ‘중국 상계에 발을 들일 때 그 모습을 보이지 말라.’라고 하지 않았나? 왜 내 눈앞에 버젓이 서 있는 거지?”
시우는 처음부터 혁련무궁과의 약속이 이뤄지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천년마교는 강호맹의 소속이고, 상계의 한 축이다. 중국과 한국의 대접전을 통해 한쪽이 사라질 위기가 다가오면 혁련무궁의 교주는 나오고 싶지 않아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네 놈과의 약속은 지킬 것이다.”
“어떻게 지킬 생각이지? 나를 죽여서?”
시우의 혓바닥이 다시금 현란하게 움직였다. 남자에게 ‘도망’을 논하는 것만큼이나 혁련무궁에게 ‘비겁함’을 논하는 것은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강자는 단순히 힘의 강함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혁련무궁은 자신의 암흑패도를 뽑았다.
시우의 옆에 선 형원이 그의 발도 기세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 말이다.”
혁련무궁은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
그의 어깨에서 피 분수가 뻗어 나왔다.
“헉!”
“헙!”
장송계와 형원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제 이 모습은 예전의 그 모습과 다르겠지?”
점혈을 통해 피를 멎게 한 혁련무궁이 시우를 보며 말했다.
말장난 같지만, 애초에 이 모든 것은 시우가 의도한 바였다.
그리고 혁련무궁은 시우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의 뜻대로 움직여 준 것이었다.
“역시 중국 상계 최강자답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상대의 의도를 안다 해도, 스스로의 몸을 자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최후의 일전을 앞둔 상대 앞에서 전력의 약화가 불가피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자존심과 실력에 대한 확신이 높다는 증거였다.
‘그만큼 높은 경지에 올라섰다는 거겠지.’
“이것으로 그대와의 약속은 모두 지켰다.”
“인정하지.”
시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외야, 가장 협공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는 건.”
장송계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우리 또한 준비한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네.”
지옥관은 본래 다섯 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구역을 연결하는 통로는 기관으로 만들어진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본래 지옥관은 혁련무궁을 잡기 위한 장소였다.
최후의 일전 이후, 야토가미가 사라진 세상에서 최강자를 무덤으로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자네에겐 다른 관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지.”
혼자의 힘으로 수천에 달하는 인원을 살상하는 대량살상 마법을 펼치고, 거신체를 소환하여 무공의 의미를 사라지게 하는 시우에겐 인적 물량 공세와 환영 마법 등은 무의미했다.
“총 다섯 개로 이뤄진 관이었나?”
“벌써 이곳의 지리를 파악한 건가?”
“대충 그럴 거라 예상했지. 당신들이라면.”
시우의 말에 장송계의 한쪽 눈썹이 비대칭적으로 올라갔다.
“무슨 말이지?”
“야토가미가 없는 세상에서도 혁련무궁을 없애고 자신들만의 왕좌를 만들려고 했던 거 아닌가 해서 말이야.”
시우의 말에 장송계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결국 강호맹 당신들은 그 정도 수준의 인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
“힘의 분배는 결국 혼란을 자초할 뿐이다.”
“그거야 독재자들이 늘 하는 이야기고. 결국은 야토가미로 인해 얻은 힘을 야토가미가 없는 세상에서도 누리고 싶었던 거겠지. 사실 당신들이 나한테 화 난건 애초에 당신들의 힘이 됐어야 했을 야토가미를 내가 없앴기 때문이 아닌가?”
“갈! 닥쳐라!”
장송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방금 만나고 온 모산파가 사용하던 구역은 사실 그 구역을 만든 이가 더 잘 사용했을 거야. 아마 그가 어설픈 모산파의 주술가 대신 나를 상대했다면 애초에 당신들 앞에 내가 서 있지도 않았겠지.”
“갈! 죽은 이를 모욕하려는 것이냐!”
“현실을 알려 주는 거지. 네놈들의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이 결국 중국 상계를 이리 만들었다는 걸 말이야.”
“이 모든 건….”
장송계가 일갈을 내뱉으려 할 때, 묵묵히 옆에 섰던 혁련무궁이 손을 들었다.
“그만, 저 애송이가 네놈을 흔들려는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혁련무궁의 말에 분노를 토해내려던 장송계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언제 들어도 분노가 치솟는 말솜씨군.”
“아쉽네. 좀 쉽게 가나 했는데.”
시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놈 말이 맞다. 이 정파의 애송이들은 그저 언제나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좋지도 않은 잔대가리를 굴리곤 하지. 이 관을 만든 것도, 네놈을 상계로 끌어들인 것도 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함이다.”
“혁련교주!”
장송계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혁련무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하지 마라. 최후의 관에서 나와 이 무당의 말코 도사가 함께 나온 건 이유가 있음이니까.”
“내가 보기에 당신은 강호맹에서 가장 무인다운 사람인 거 같네. 왜 저 치들이랑 함께 어울리는 거지?”
시우의 여전한 비아냥거림에 장송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게 무림이기 때문이다.”
혁련무궁의 짧은 말에 시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인간은 결국 그 정도의 존재니까.”
“말이 길었다. 혹시 남길 유언은 있느냐?”
혁련무궁의 말에 시우가 웃으며 말했다.
“밖에 있을 무당파의 제자와 마교의 교도들에게 전할 말이나 알려줘. 그 정도는 해주지.”
“내가 할 말은 내가 직접 하겠다.”
혁련무궁의 어깨에서 짙은 검은색의 기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른 이들이 보여주는 반투명한 색의 수증기와는 질적으로 다르게 느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송계의 어깨에서도 하얀 기류가 피어올랐다.
“어디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의 합공 실력이나 볼까?”
시우의 손에서 형광색의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7서클에서나 볼 수 있는 삼중 중첩 마법진이었다.
[인페르노]
대다수가 대량살상을 목적으로 둔 7서클의 마법과는 달리 대인살상용으로 파괴력을 극대화한 지옥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형광색의 불온한 불길의 영향으로 시우가 서 있는 일대의 연무장 대리석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푸칵!
폭발과 함께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인페르노는 그 궤적에 드는 모든 것들을 녹이며 두 사람에게 쏘아져 나갔다.
장송계의 손에선 태극혜검이, 혁련무궁의 손에선 천마오검이 펼쳐졌다.
두 사람의 내공은 막대했고, 무공에 대한 공부도 깊었지만, 모든 것을 녹여내는 인페르노의 불꽃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불꽃에 녹아드는 것을 예상하던 그때.
태극혜검에서 쏟아져 나온 하얀색이 검기와 천마오검에서 솟아 나온 검은색의 검기가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뒤엉킨 흑과 백의 검기는 곧장 자신들에게 쏟아져 나오던 인페르노를 향해 쏘아졌고, 인페르노와 부딪친 검기는 커다란 폭발을 만들며 빛을 뿜어냈다.
펑!
거대한 압력에 밀려난 공기들이 미친 듯이 시우와 형원을 뒤로 밀어냈다.
흙먼지가 사라지고 난 공간엔 인페르노의 흔적은 없었다.
‘인페르노를 막았다고?’ 시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