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대 현자 빌리언트는 살아생전 이백삼십 개의 마법 이론을 정리하였다.
일반인이 하나의 마법 이론을 정리하고 증명하는 데만도 평생을 쏟아붓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마법적 지식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고차원적 지식수준을 가질수록 더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고차원적 지식수준을 갖추지 못한 채, 고차원의 입심만 갖춘 자들은 빌리언트를 사기꾼이라 지칭했다.
그들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백 개의 이론들을 한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바운드리스 에어리어’ 이론이었다.
신의 공간이라 불리는 이 공간은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 없다.
인간에게 필요한 공기와 수분조차 없지만, 이곳에선 죽음을 걱정할 필요 없다.
무의 끝과 유의 시작점에 있는 이곳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이 세상이 이 바운드리스 에어리어 안에서 생성된 창조주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바운드리스 에어리어의 주인이자 이 세상의 창조주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한 규칙을 세웠다는 것.
이 바운드리스 에어리어의 주인이 된다면, 인간 또한 신과 같은 힘을 얻을 수 있고, 신 또한 이 바운드리스 에어리어의 주인에서 탈락한다면 일개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대 현자 빌리언트의 이론 중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이론이었기에 마법사들 사이에서 이 이론을 들먹이는 건 금기시 되어 있었다.
* * *
‘상아탑의 노인네들이 보면 거품 물며 기절했겠군.’
시우는 계상학이 만든 공간을 보면서 바운드리스 에어리어를 떠올렸다.
자신이야 지구에서 직·간접적으로 다중우주론이나 차원이론 등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우주에 대한 관찰이 시작되지 않은 알게니하 대륙에선 바운드리스 에어리어의 이론은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논란이 많은 이론이었다.
알게니하 대륙의 마법사들이 지금 이곳에 함께 있었다면 꽤 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소를 삼키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언제까지 피해만 다닐 셈인가?”
얼음과 불의 공격이 끊이질 않고, 사방에선 전설의 영물들이 나타나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시우를 공격하고 있었다.
시우의 손에서 마법진이 십여 개가 뿌려졌다.
거인의 손을 비롯하여 다크 자벨린과 파이어 볼 등, 계상학에 못지않은 수의 마법들이 쏘아져 나가며, 계상학과 영물들의 공격을 막아섰다.
“허허, 이러다 끝이 없겠군. 난 상관없는 데 자넨 괜찮은가?”
비아냥거리는 계상학의 말에 시우는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백 번의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주위는 불의 폭풍에 휩싸이기도 하고, 땅이 녹고 강이 얼어붙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샌가 이 공간의 지형·지물들은 시우가 처음 들어 왔던 그대로 다시금 돌아갔다.
이곳에서 변하는 것은 시우의 모습과 안색뿐이었다.
자동으로 복구되던 코트는 더 이상 복구되지 않는지 이곳저곳 찢어진 곳들이 생겨나고, 피곤함에 절여져 안색은 좋지 않았다.
반대로 계상학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시우 못지않게, 주술을 마구 흩뿌리고 있었음에도 처음과 별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신과 달리 아직 팔팔하게 어린 나이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우의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거듭된 난전으로 인해 시우의 몸에선 마나의 양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
본디 마법은 내부의 마나와 외부의 마나의 공명으로 파괴력이 증폭되는 특성이 있다.
특히나 시우가 그 방면에 큰 특기를 갖고 있었는데, 어찌 된 것인지 이 공간 안에서는 그 공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나를 사용할 때마다 주위의 마나들이 조금씩 서클을 채우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이 공간에도 마나가 있다는 것일 터인데, 공명이 일어나지 않아 파괴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태였다.
7서클에 오르면서 엄청난 양의 마나를 내부에 모았지만, 외부의 마나와 공명이 되지 않으니 내부의 마나 사용도가 늘어나고, 그것은 마나 고갈로 이어지고 있었다.
‘벌써 절반이나 줄었어.’
한쪽에서 형원이 알머스트를 입은 채 열심히 도망 다니고 있었지만, 이 공간 안에서 계상학의 모든 공격을 피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애당초 우빈의 단전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대비해 만든 아티팩트였기에 기의 충전과 가벼움 외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간혹 형원이 피하지 못하는 계상학의 공격을 막기 위해 시우가 마법을 사용해야 했다.
“젊음이 좋긴 좋군. 죽음 직전에도 패기를 부릴 수 있다니 말이야. 헌데 내 착각일까? 자네 마법이 이전보다 훨씬 약해진 것 같군.”
“겨우 이런 잔기술 가지고 벌써부터 승리를 확신하나 보네.”
“우리가 자네를 얕보았듯 자네도 우리를 얕보는군. 잔기술이라니.”
“결연한 처음과 달리 지금 너무 여유만만이잖아?”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계상학의 손길에 의해 강에서 또다시 거대한 생명체가 튀어 나왔다.
수백 개의 다리를 가진 거대한 크기의 지네였다.
캬아아아아!
“상상력의 빈곤인가? 왜 그런 것 밖에 못 만들지?”
“눈에 보이는 공포가 곧 마음에 피어나는 공포지. 저 친구처럼.”
계상학의 손이 형원을 가리켰다.
“처, 천년지주.”
형원은 거대한 크기의 지네에 온몸이 굳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알머스트를 입은 형원의 움직임은 눈에 뜨일 정도로 확연하게 둔해졌다.
형원의 공포를 감지한 듯 천년지주는 곧장 형원을 향해 그 거대한 몸을 날렸다.
시우의 손에선 예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아이스 블라스터]
거대한 방추형의 얼음송곳이 곧장 천년지주를 향해 날아갔다.
쐐애애액!
거대한 크기의 아이스 블라스터는 바람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천년지주에게 날아갔다.
펑!
콰드득.
아이스 블라스터가 폭발하며 천년지주를 휘청거리게 했다.
하지만 천년지주에겐 그다지 효과가 없었는지, 그 긴 몸과 발을 털어 얼음들을 떼어내며 다시금 형원에게 달려들었다.
시우는 다시금 마법진을 생성해 천년지주를 공격하려 했다.
“자넨 내가 보이지 않는가?!”
계상학이 괴항지를 흩뿌리며 시우를 공격했다.
천년지주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었던 수십 개의 헬 버스터는 계상학이 공격을 막느라 바빴다.
독물이 가득 든 지네의 입이 쩍 벌어지며, 순식간에 형원을 한입에 털어 넣으려는 순간.
시우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블링크]
먼 거리를 한순간에 뛰어넘은 시우는 형원과 천년지주 사이에 검은색의 검을 든 채 나타났다.
[천살지존검]
[지존일로]
웅후한 기운이 시우의 검 위에 모여들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시우의 검 위로 황금색의 작은 기들이 모여들었고, 그 기는 이내 세상의 모든 것을 꽤 뚫을 듯 쏘아져 나갔다.
시우의 검이 찔러 들어가고, 얼음송곳이 날아갈 때처럼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사방에 진동하였다.
쐐애애액!
압도적인 살기와 압도적인 관통력이 한순간에 공기마저 진공으로 만들어 버렸다.
멀리 떨어진 계상학조차도 한순간 머리칼이 쭈뼛 서는 경험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천년지주는 순식간에 시우의 검을 피해버렸다.
퍼퍼퍼퍼펑!
시우의 검은 결국 허공을 갈랐지만, 대기를 밀어낼 정도의 압력을 가지고 있던 시우의 검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충격음을 만들어 내었다.
시우의 반격이 먹히지 않은 것을 보고 형원은 절망에 빠진 듯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방금전 시우의 공격은 무공에 조예가 깊지 않은 자신이 보기에도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엄청난 공격을 천년지주가 아슬아슬하게 피해 버렸던 것이다.
“검술에도 조예가 깊은 줄은 몰랐군.”
계상학이 짐짓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계상학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휘둘렀고, 강에선 또 다른 천년지주와 독각화망이 튀어 나왔다.
거대한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시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알겠군.”
죽음의 위기 앞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시우의 모습에 계상학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애써 침착하며 말했다.
“뭘 알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미 늦었네.”
“아니, 우리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시우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왜 대답이 없지? 한국인이라 중국말을 못 하는 건가?”
평범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과 달리, 김준상은 사금적의 존재로부터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정도의 마기라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음에도 금방이라도 압사될 것 같은 지독한 마기였다.
본능은 당장이라도 도망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애써 티는 내고 있지 않았지만,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숨이 점점 얕아져 폐가 당기기 시작했다.
‘호, 호흡법.’
김준상은 시우가 전수해준 호흡법을 일으켰다.
온몸에 정령의 기가 일깨워지면서 차츰 숨이 돌아오고 떨림이 멈추었다.
김준상은 소빈에게 전음을 보내었다.
지금 무리에서 가장 강자는 소빈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전투에 관한 실전 경험이 많아도 무인들의 싸움에 대한 경험치는 소빈에 비해 한참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찰나의 시간 고민하던 소빈은 전음으로 답했다.
-……저들과 지금 맞붙어선 안 돼요. 저와 우빈이가 각각 한 사람씩 상대할게요. 이프리트 팀이 저희를 지원해주세요. 아마 정령에 대해 모르는 만큼 이용해 볼 수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소빈 일행의 대답이 없자 구양필이 태도(太刀)의 고리를 절그럭거리며 말했다.
“대답해! 네놈들 한연맹의 맹주와 관련이 있는 놈들이냐!”
구양필이 진득한 살기를 내뿜자, 살기를 견디며 한 걸음 나선 우빈이 나서며 말했다.
“아니요! 저희는 그냥 한국에서 온 수행자들입니다. 저 먼발치에서 엄청난 위용의 기운이 느껴져 저희도 모르게 바라보고 있었던 겁니다.”
우빈의 말에 입술이 실룩거리는 것을 힘겹게 참아낸 구양필이 태도를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엄청난 위용?”
“네. 한국 상계의 소속으로 수련을 위해 무공의 원류인 중국을 여행하면서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한국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파천의 기운을 가진 대협을 보고선 절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양필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크흡, 파천이라…… 견식한 소감이 어떻더냐.”
우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실로 놀랐습니다. 과연 어떤 대단한 곳에서 이런 용의 기상을 가진 대협 같은 분들을 배출할 수 있는지 경탄을 금치 못했죠. 네네.”
손까지 비벼가며 우빈이 말을 하자 구양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뿌헐헐! 가진바 내력은 없어도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구나! 크하하하!”
구양필이 고개가 넘어갈 듯 웃음을 터트렸지만, 사금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네.”
한국 상계와 중국 상계는 일본 상계에 비해 꽤 교류가 있는 편이었다.
또한, 한국 상계의 무인들은 안계를 넓히기 위해서 종종 중국 상계를 여행하기도 하였으니 우빈이 전혀 없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소속 문파가 어디지?”
“아 예…… 워낙 작은 문파라 이야기하셔도 모르실 겁니다.”
우빈이 고개를 읊조리며 이야기하자 구양필이 사금적의 어깨를 팡팡 치며 웃어넘겼다.
“작은 문파라 말해도 모른다잖아! 훔쳐본 것은 괘씸하지만 대협의 풍모를 보여 그냥 넘어가라고 크헐헐헐.”
사금적은 구양필의 손을 탁 쳐냈다.
사금적의 행동에 구양필이 도끼눈을 뜨며 사금적을 바라보았지만, 사금적의 시선은 소빈 일행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태백 정가는 한국 상계에서 그리 작은 문파가 아닐 텐데? 현 가주의 형제인 정현민과 소가주인 정소빈, 그의 동생인 정우빈까지. 현 한연맹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들 모두가 그냥 수행을 위해 여행 중이라고?”
챙!
사금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빈 일행이 검을 뽑았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소빈이 사금적을 보며 물었다.
“네놈들을 보자마자.”
사금적의 말을 듣던 구양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야! 그럼 이놈들이 한연맹의 연놈들이라고!”
“그래!”
“이 개 같은!”
츠츠츠츠츠츠츠
구양필의 태도(太刀)에 붉은 기운이 모이며 고리들이 부산하게 몸을 떨어댔다.
“감히! 나 구양필을 속여!”
구양필이 태도를 크게 휘둘렀다.
우빈과 소빈이 한 발짝씩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둘렀다.
콰쾅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소빈과 우빈의 몸이 삼장이나 뒤로 밀린 반면, 구양필은 자리에서 한 치도 뒤로 물러나지 않은 채 성큼성큼 소빈과 우빈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