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형원은 눈앞에서 부모가 죽던 날을 기억한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배웠던 생사심법이 4성에 이른 날.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또래 아이들에 비해 월등하다는 칭찬을 받고 집에 돌아간 그 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아버지의 미소는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보는 이들이 집에 들이닥치고, 엄마와 아빠가 무기력하게 그들의 손에 끌려갈 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여동생은 부모님을 쫓아가려 했고, 형원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꼭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끌려가는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돌아서는 순간 복잡한 눈으로 형원을 바라봤다.
그것이 자신의 배움이 빨라 그의 죽음을 앞당긴 탓에 보이는 원망인지, 자신의 아들도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거란 것에 대한 슬픔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부모님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형원이 느끼는 슬픔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것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끔찍하게 사랑함에도 언제가 이런 비극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부모는 형원에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 흔한 ‘커서 뭐 될 거야?’라는 질문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건, 형원의 미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는지, 그 미래에 자신들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몰랐다.
어쨌든 남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형원은 자연스레 독한 마음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가 없는 어린 남매는 맹목적으로 강호맹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모를 데려간 관리자가 두 사람을 맡았음에도 그에 대한 분노보다 그가 자신들을 잘 돌봐주기를 바라야 했다.
관리자는 형란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형원에게 성취가 없거나 반항의 기미가 보이면, 형란은 철저하게 괴롭힘당하고 폭행당했다.
자신과 달리 무공을 익히지 않은 형란은 관리자의 매질을 더욱 버거워했다.
형원은 형란을 지키기 위해 잠을 마다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빠르게 빠르게 생사심법과 동방의궤를 익혀갔다.
지옥 같은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며, 형원이 첫 무인의 단전을 복구시켰을 때. 집에 돌아온 형원은 형란을 볼 수 없었다.
형란을 찾기 위해 광인처럼 연구소를 돌아다니던 형원에게 관리자는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어색한 교복에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안의 소녀는 형란.
-자네가 잘만 하면 이 아이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그 순간 형원은 자신이 절대로 희망이 없는 지옥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기계처럼 이용만 되다 결국에 버려질 것이란 걸 깨달았다.
형원은 매일 밤 신께 기도했다.
정의를 표방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저 악마 같은 놈들에게 천벌이 내려지기를 하지만 신의 철퇴가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고, 형원이 무인들을 치료해 단전을 되살릴 때마다 그들의 권력은 점점 무소불위로 거대하고 단단해져 갔다.
그리고 형원은 시우를 만났다.
* * *
나한을 모두 흡수한 시우는 곧이어 패밀리어를 사방으로 날려 보내곤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화면을 통해 집중하고 있었다.
일행은 주변에서 지친 몸을 쉬며 피곤을 풀고 있었다.
형원은 무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법으로 만들어진 스크린을 조작하는 시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 좀 드세요.”
소빈은 형원에게 도시락을 건넸다.
형원은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주저하고 있었고, 소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독은 모두 제거했다고 하셨으니 안심하고 드셔도 돼요.”
내공을 잃은 금강나한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사라지는지를 목격했던 형원이었기에 두려움이 아직 남았지만, 형원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도시락을 먹는 소빈을 보며 형원도 재빨리 도시락을 까서 입에 넣기 시작했다.
“읍! 읍!”
급하게 먹었던 탓일까, 건조한 도시락이 목을 메이게 해 형원은 몇 번이나 억지로 음식을 넘기려 했다.
“후훗.”
소빈은 웃으며 형원에게 음료수를 건넸고, 죽다 살아난 형원은 소빈과 눈이 마주치곤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세요.”
“네?”
소빈은 마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인 양 멍하니 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 고민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무거우면 필요한 순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갈 수 없어요.”
“…하지만, 쉽게 떨칠 수가 없네요.”
수백의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고, 중국 상계의 최강자라 불리는 이들이 이제는 강시와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간다.
아직도 그의 앞에는 수백의 강자와 수천의 무인들이 자신을 잡기 위해 함정을 파고 약점을 노리고 있었다.
형원은 자신의 자유 이전에, 과연 자신의 목숨을 위해 이만한 희생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제가 …겨우 저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형원의 말에 소빈은 형원을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단전을 살린다는 것은 무인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신만이 허락할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 그는 의술의 신이라 불릴 만하였지만, 겉모습대로 속은 영락없는 어린이였다.
대의를 생각하고, 희생을 생각하고, 전체의 큰 그림 속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여 보는 것은 순수한 눈동자를 가진 자만이 가능하다.
아직 그는 그 어떤 것에도 때 묻지 않았다.
“시우 님이랑은 정반대로 생각하시는군요.”
형원은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며 스크린을 조작하는 시우를 보며 물었다.
“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우 님은 그 어떤 목숨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세요. 그저 적의 생명 하나, 아군의 생명 하나.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죠.”
“저분은 진정 악마인가요?”
형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달라요. 그건 어쩌면 신의님과 같은 순수에 가깝기 때문일 거예요.”
“순수에 가깝다고요?”
“맹주님이 하신 이야기 들으셨죠? 내 친구의 피 100밀리보다, 적의 피 100리터가 더 낫지 않냐는 말.”
“아….”
“맹주님은, 가장 순수한 눈으로 사람을 보세요. 적은 검은 색으로 아군은 흰색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손속엔 자비가 없는 거예요. 대신에 저희들에겐 무지 잘해주신답니다.”
소빈의 싱긋 웃는 표정에 형원은 잠시동안 자신이 전장 한복판에 있다는 것도 있고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밥은 다 먹었나?”
어느새 시우가 소빈과 형원의 앞에 서 있었다.
“이 동굴 내부는 관측이 안 돼. 아마도 누군가의 무덤이었던 거 같은데. 내부의 빛도 없어 어둡고.”
시우가 마법으로 만든 스크린 창을 보여주며 말했다.
스크린은 검은 바탕에 길로 보이는 선들이 이리저리 얽혀 그려져 있었고, 그 선들마저도 스크린의 바탕을 전부 채우지 못하고 멈춰 서 있었다.
“일단은 이곳이 어딘지 만이라도 알면,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 텐데요.”
소빈의 말에 시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상계의 무덤이나 동굴들은 대부분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있어요. 예전부터 도굴꾼들이 많은 것도 있었지만, 기연을 찾는 무리들 때문에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부분의 동굴들에 대한 정보는 공개되어있는 상황이에요. 특히나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 있는 큰 규모의 동굴이라면 누구의 무덤이나 어떤 특정 문파의 폐관동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힌트를 얻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대략 이곳 위치만 알면 누구 무덤인지 안단 말이지?”
“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상황이니.”
소빈이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
소빈의 핸드폰은 전파 안테나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시우는 걱정 없다는 듯 새로운 스크린을 생성해 소빈에게 보여주었다.
스크린에는 중국 전체의 지도가 나와 있었고, 시우가 특정 부분을 지정하여 확대하자 구체적인 지역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놀라는 소빈에 시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법사를 어떻게 보는 거야.”
시우가 보여준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던 소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정현민을 불렀다.
“작은아버지. 제가 기억 못하는 건가요? 제가 알기론 이곳에 어떤 동굴이나 무덤도 없는걸로 알고 있는데.”
“최 맹주, 이거 확실한가?”
“네. 뭐 잘못됐습니까?”
“흠….”
정현민도 한참이나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정현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긴, 허난성 정저우시 근처네.”
“그런데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소림사가 있다는 말이지. 알려지기로 소림사 근처엔 어떤 동굴도 무덤도 존재하지 않는다네.”
“그럼 이건 뭐죠?”
시우가 무너진 동굴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 * *
“지옥관이라니…? 너 설마…?”
제갈사열이 떨리는 입술을 주체하지 못하며 말했다.
그의 두 눈은 결코 믿을 수 없다는 듯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갈청룡은 두 걸음 물러서더니 남궁청 뒤에 몸을 반쯤 가렸다. 그리고 말했다.
“청 형님, 아버지는 주로 소천성공으로 선공을 하신 후에 응혈신조를 펼치십니다. 그러니 형님은 천뢰삼장을 펼쳐 방어하신 후에 천뢰지로 마혈을 제압해 주십시오.”
“다 들린다 이놈아!”
“그러니 차분하게 이야기해보자는 겁니다.”
제갈청룡의 말에 남궁산이 제갈사열을 말리며 말했다.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네.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보세.”
그의 말에 제갈산은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속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차분하게 얘기해 보거라.”
제갈청룡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고 그 모습이 제갈사열을 더욱 속 타게 했다.
“3년 전에 그 질문을 한 자들은 몇 주 지나지 않아 다시금 저를 찾아 왔습니다. 일전에 질문했던 그 기관을 만들어 달라고 말이죠.”
“그곳이 어디였느냐?”
“정주 시 소림사 근처였습니다.”
“소림사?”
남궁산이 제갈적룡을 바라보자 제갈적룡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소림사 근처에 발견된 무덤은 없습니다.”
제갈청룡은 적룡의 말을 가로채듯 말했다.
“그건 발견되었지만, 발견되지 않은 무덤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종전 후. 결성된 강호맹은 소림사 근처에서 새로운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난색을 표했습니다. 무덤의 규모와 무덤 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 때문이었지요.”
“그게 누구였느냐?”
“신투 진소율.”
“천하제일신풍 진소율을 말하는 것이냐?”
“네.”
남궁산과 제갈사열은 서로 못 믿겠다는 반응이었다.
신투 진소율은 정과 마가 서로 반목하는 시절 천하의 모든 재화를 훔치러 다니던 도둑으로 전해진다. 그 신위가 기가 막힐 정도로 뛰어나 그의 그림자를 본 자가 없고 그에게 보물을 빼앗기지 않은 자들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무림을 넘어 황실의 보물창고까지도 마음대로 들락거렸다고 하는 그였지만, 황실은 단 한 번도 그에게 보물을 빼앗긴 적이 없다는 말을 했고, 황실에서 흘러나온 보물이 시장에 나온 적도 없었다.
그렇게 신투 진소율은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의 잠행도 실패하지 않고 그가 평생 모아놓았던 보물은 그의 무덤에 함께 잠들어 있다고 전해졌다.
“신투 진소율은 실제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의 무덤엔 그 과거의 보물들이 가득했고요.”
제갈사열은 제갈청룡의 말에 경악했다.
“말도 안 된다. 강호맹이 상계의 가문들에 알리지 않았을 리 없다. 그자가 실존 인물이고 그자가 훔친 것들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제갈청룡은 콧잔등을 긁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갈청룡은 말과 함께 회의실을 나갔다가 금세 되돌아 왔다.
그의 손엔 검 한 자루와 술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도 술을 놓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에 제갈사열은 결국 화를 터트리고 말았다.
“네 이놈!”
제갈청룡은 그런 아버지의 화를 돋우듯 검을 그의 안면으로 던져버렸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제갈사열은 단숨에 검을 뽑아 제갈청룡에게 달려들었다. 남궁청은 재빨리 두 사람 사이를 점하며 진로를 방해하려 했지만 제갈사열의 모습은 남궁청을 지나쳐 제갈청룡의 눈앞에 나타났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천기미리보였다.
창!
제갈사열은 단숨에 검을 뽑아 제갈청룡의 술병을 잘라내려 했다.
제갈청룡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술을 마시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제갈사열의 검이 술병에 닿기 직전.
제갈사열의 검이 우뚝 멈춰 섰다.
검을 든 제갈사열의 손이 부르르 떨렸고, 그에 따라 검도 부르르 떨렸다.
“이, 이건….”
“네, 전설로만 내려오는 가문의 보검인 은하칠성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