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남궁청과 남궁산은 무거운 걸음으로 대문을 넘어섰다.
문을 열어준 문지기의 인사를 받고 들어간 곳에선 총관이 두 사람을 안내했고, 두 사람은 곧 장원의 가장 심처로 안내받았다.
장원 가장 깊은 곳.
작은 연못 앞에는 문사 풍의 사내가 연못을 바라보며 먹이를 주고 있었다.
“가주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총관의 말에 사내는 손에 쥐고 있던 먹이들을 털어냈다.
연못의 물고기들은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파닥거리며 물방울을 튀겼다.
“쯧쯧, 아귀가 따로 없구나.”
사내는 그렇게 혀를 차고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남궁산과 남궁청이 시야에 들어왔다.
“푸른 지렁이가 먹물만이 가득한 이곳엔 뭘 먹으로 왔느냐?”
사내의 말에 남궁산이 답했다.
“전에 봤을 때 보다 배가 한 치는 더 늘어났구나. 늙으면 배 나오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것을 모르더냐?”
“……하하하하하. 내 그래도 요즘은 꼬박꼬박 운동도 하고, 며느리가 챙겨주는 식이요법도 챙기고 있단다 남궁가야.”
“에잉, 대체 그 황보 원숭이는 왜 귀여운 딸내미를 네놈 아들에게 장가를 보낸 것이냐!”
“거야! 네놈 옆에 있는 천둥벌거숭이가 과거 제 아비를 똑 닮아서겠지 않느냐 하하하.”
사내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남궁산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곧이어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크게 포옹을 하였다.
“잘 지냈느냐?”
“가주가 잘 지내면 가문이 흔들리는 증거라 하더구나.”
두 사람이 회포를 풀자 남궁청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제갈 가주님.”
남궁청을 바라보는 제갈사열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황보 원숭이의 선자리를 박차고 나가더니 꽤 성과가 있었나보구나.”
“아직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예부터 부모님 말을 잘 들으면 떡 하나라도 더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었나 봅니다.”
“허허허. 능청스러운 것도 지 애비 젊었을 때랑 똑같구나! 쓸데없는 예를 차릴 필요 없다. 그냥 예전처럼 편히 대하거라.”
“예.”
제갈사열은 고개를 돌려 남궁산을 바라보았다.
“그냥 술이나 한잔하자고 이 먼 곳에 직접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인가?”
“청룡이는 집에 있는가?”
“그 망나니 놈이야 언제나 지멋대로 왔다 갔다 하지. 갑자기 청룡이는 왜 찾는가?”
“자네도 알고 있겠지? 무림 7대 기공에 대해서.”
남궁산의 말에 제갈사열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 어린 나이에 벌써 치매가 왔나? 무림 5개 기공에 왜 두 개가 붙나?”
“내가 얘기하는 건 그 추가된 두 개를 말하는 걸세.”
남궁산의 진지한 태도에 제갈사열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농담을 듣기엔 아직 정신이 멀쩡하네.”
“농담이 아닐세. 무림에 천살지존검과 생사심법이 나타났네.”
“……!!!”
제갈사열의 얼굴은 그 어느 때 보다 딱딱하게 굳어졌다.
* * *
“후.”
시우가 바람을 불자 손안에 붙어있던 불길이 날아가며 사그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명진의 눈동자엔 생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무적을 자랑하는 백팔나한진이 산산이 부서지고, 그 진을 이루는 나한들 중에 제대로 서 있는 자가 없었다.
우습게도 무림의 태산북두이자 강호의 최강 무력이라 불리는 백팔나한진이 겨우 열 명 남짓한 인원들에게 대패한 것이다.
“……아미타불.”
기억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시작해. 평생을 무림에 발 담근 채 살아왔다.
약육강식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계가 잔인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모든 것은 부처님의 생리를 따르는 길이라고만 생각했던 그였다.
언제든 자신보다 강한 상대가 나타난다면 자신 또한 상대에게 생사여탈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에 결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런 공포를 느끼게 한 존재가 나타났다.
‘최시우’
명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의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공격에 너무 많은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을까.
그가 부리는 마법과 무공에만 신경이 모두 쏠려 있었다.
‘진정 무서운 것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저 머리.’
시우를 상대하면서 산공독에 당할 것이라는 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의 대단위 마법, 파괴적인 검술, 기이한 강시술을 상대하는 것에만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선이 돌아간 사이 적은 뒤에 숨겨둔 조커로 단숨에 자신들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그 점에 더욱 분통이 터졌다.
차라리 백팔나한진을 전력으로 펼쳐보고 패한 것이라면, 평생 자신이 익힌 무공들과 내공을 다 토해낸 뒤에 최후를 맞는 것이라면,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겠지만, 그와의 일전을 고대하던 자신은 결국 허무하게도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울컥!”
화가 과했던 것일까? 진탕된 내부가 다시금 뒤틀리며 피를 한 움큼 쏟아냈다.
“뭔가 억울하신가 보군요.”
시우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명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피를 토해낸 명진은 숨을 몰아쉬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무상의 마음으로 최후를 맞이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최후를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이죠. 그저 마음가짐에 불과할 뿐인데 말이죠.”
“역시나 전 공부가 부족한 모양이군요. 이토록 원통함을 달랠 수 없으니. 허나 시우 시주. 강호를, 아니 중국 상계를 만만히 보시면 안 됩니다.”
“명진 스님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똑같으시군요. 자신의 원통함은 다른 중국 상계 인원들이 갚아줄 거다 이 말씀이십니까?”
“…….”
“아쉽습니다. 스님의 혜안이 조금만 더 깊었다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공부가 아무리 깊어도 악마와 친구가 될 수는 없었겠죠.”
명진의 말에 시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흐흐흐. 스님이 형란을 인질로 잡는 것을 동의한 그 순간부터, 우린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스님이 부처라면 저 또한 부처고, 제가 악마라면 스님 또한 악마에 불과할 뿐이죠.”
“…….”
“죽어가는 순간까지 상대의 마음에 죄의식을 나기고 싶어 하는 것 보니, 스님께서도 깨달음을 얻기는 힘들겠군요. 그런 김에 하나 알려드릴까요?”
명진이 말없이 시우를 바라봤다.
시우는 명진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대답했다.
“제 특기 마법 중 하나가 바로 상대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중국 상계의 무인들은 명진 스님의 무공에 의해 죽어 나갈 겁니다. 소림의 스님들까지도 말입니다.”
시우의 말에 명진이 질겁하며 혀를 깨물고 자신의 천령개를 내려치려 했다.
그 순간 시우의 그림자에선 검은 촉수들이 튀어나와 명진의 손과 발을 옥죄고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 이를 물지 못하게 했다.
“으으으으. 으으으으.”
“단지 허무하게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적들이 저와 싸우길 망설이는 거죠. 절망 속을 헤엄치다가 죽으십쇼.”
“끄아아아아아아악!”
명진은 마치 전기에라도 감전된 것처럼 온몸을 버둥거리다 숨을 거두었다.
* * *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가주님.”
남궁산은 제갈사열이 먹이를 주던 연못의 고기들을 보다. 청량한 음성에 자연스레 만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구나 현아.”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그래그래, 내 다 평안하다만 네 며느리를 들이지 못한 것은 늘 안타깝게 생각한다.”
“호호호. 청 오라버니는 여자보다 무공에 더 관심이 많았는걸요. 앞으로도 몇 년은 가주님 속을 썩일 거예요.”
“현매, 말이 심하네. 내가 여자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데.”
“그동안 사귄 여자분이 몇 분이나 되는데요?”
“그, 그거야 셀 수가 없지.”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 이게 진짜! 간만에 봤더니만!”
“호호호. 들어오세요. 안에서 회의가 다 끝났어요.”
황보현의 말에 남궁산의 얼굴이 조금 딱딱해졌다.
“어떻게 결론이 났더냐?”
“아직 확실한 결론은 나지 않았어요. 이건…… 쉽사리 믿을 수도 결정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
황보현이 남궁청을 바라봤다.
“청 오라버니. 청 오라버니가 평소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 분이라는 걸 알아요. 그럼에도 쉽게 믿기지 않아 실례를 무릎 쓰고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남궁청은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믿기지 않겠지.”
“진짜 두 개의 기공이 확실하던가요?”
“천살지존검은 직접 듣지 못했다. 뭔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확신할 순 없다. 나도 집으로 돌아온 뒤에야 아버지의 말을 듣고 머릿속의 기억들이 서로 맞춰가면서 답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생사심법은 다르다.”
남궁산이 설명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가문의 어른 중에 과거 한국으로 시집을 가신 분이 계시다. 그분의 증손자가 야토가미와의 전투에서 단전을 잃은 일이 있다.”
남궁산이 말했다.
“내가 직접 확인했다. 한국에서 온 내 먼 친척은 몸 안에 한 줌의 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은 미천한 마나가 담긴 특이한 벨트뿐이었다. 그런데 생사신의라 하는 자를 만나고 난 뒤에 그 아이의 몸에서 막대한 양의 내기가 느껴졌다.”
남궁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사신의 스스로가 생사심법이라는 기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 기공에 얽힌 끔찍한 사건까지도.”
“…….”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 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강호맹은 모든 상계인들이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다.
그런 강호맹에서 인륜으로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일을 자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우리가 들은 이야기의 단 1할이라도 진실이라면 이것을 묵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궁산의 말에 황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궁금증은 다 풀렸어요. 가주님께 모시겠습니다.”
* * *
시우의 그림자에서 뻗어 나간 검은 액체들은 백팔나한들을 하나하나 삼켜버리고 있었다.
이제는 이지를 상실한 채 시우에게 완전히 복속된 다크 사이트였기에 이전의 기괴한 이빨과 핏발선 눈동자는 없었다.
그저 깊은 뻘을 만들듯 다크 사이트 위로 던져진 시체들은 다크 사이트의 무거운 어둠 안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다.
형원은 무심한 눈빛으로 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거죠?”
“어디로도 가지 않아. 저 들은 저 안에 있는 거야.”
형원이 모르겠다는 듯 시우를 바라봤다.
“다크 나이트와 데스 나이트는 흑마법사들의 18번 마법이다. 네크로맨시와 강령술을 적절히 섞은 최강의 네크로맨시라 부를 수 있지. 저들은 다크 사이트 내에서 분해되고 재조립되어 내 병사로 남을 거다. 저들이 불쌍하냐?”
형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죠?”
“글쎄, 그건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다크 나이트와 데스 나이트에게 영혼 따윈 없으니.”
“…….”
형원은 뻘 안으로 사라진 나한과 새롭게 다크 사이트에 던져진 나한의 시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저들의 영혼까지 저 안에 갇혀 있길 바라지 말거라.”
“네?”
“뼛속 깊이 증오하지?”
“……그래도 소림을 믿었어요. 언젠가 올바른 길을 찾겠지. 그저 지금은 대세에 몰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들도 다른 강호맹의 이들과 다를 게 없어요.”
“그래. 다 똑같은 놈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한으로 감정을 소비하지 마라.”
“……그게 무슨 말이죠?”
“분노를 터트리고 화를 내는 것은 그 순간에만 하고 잊으라는 이야기야.”
“…….”
“화를 가슴에 품고 있으면 그건 언제나 스스로를 찌르는 가시가 된다. 난 방금까지 처절하게 싸웠지만 상대에 대한 감정적 대응을 모두 지웠다. 그들은 그저 내게 죽은 자일 뿐이고, 내게는 정의롭지도 나쁘지도 않은 자일 뿐이야.”
“…….”
“분노는 그 순간에만 내라. 무상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백번의 복수에도 한은 풀리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이렇게 잔인하게 상대를 죽이시는 건가요?”
형원의 말에 시우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그런가?”
시우가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
멀리서 김준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끝났습니다. 맹주님.”
시우는 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자.”
계곡 일대에는 나한들의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과 부서진 바위밖에 남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체는 다크 사이트 안으로 흡수되었다.
“아까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어요. 아마도 형란은 이곳에 있거나 준비된 곳과 연결된 어떤 곳에 존재할 거예요. 그녀를 찾는 게 우리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소빈의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어쩌긴요. 들어가야죠.”
시우는 대답하며 씨익 웃었다.
그의 대답에 일행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