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버스에서 내린 일행은 다시금 어두운 천으로 눈을 가린 채 나한들의 손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이끌려 간 곳에서 다시금 차량에 나눠 태워졌다.
소형 차량에 나눠 태워질 때.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한 곳에 같이 내려주겠다는 명진의 말에 시우 일행은 시우의 대답을 기다렸고, 소림의 방장 스님을 믿고 기다려 보자는 그의 말에 일행은 다시금 소형 차량으로 한참을 이동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선 차량은 먼저 사라지고, 조금 뒤에 시우 일행의 눈을 가린 천이 벗겨졌다.
천이 벗겨진 형원은 급하게 사방을 둘러보며 형란을 찾았다.
하지만 형원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사방을 둘러싼 괴암절벽과 아무렇게나 자란 풀과 나무뿐이었다.
그 어떤 곳에서도 형란의 신위는커녕,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형란이 명진에게 물었다.
“제 동생은 어디 있습니까!”
명진이 답했다.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명진의 차분한 음성이 형원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정녕 이게 명문 정파의 행실이란 말입니까!”
“……….”
시우가 형원을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설명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시우 시주의 뒤에 보이시는 입구로 들어가시면, 시주가 찾는 소저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명진의 말에 시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시우의 뒤편엔 가장 높은 절벽과 함께 무너져 내린 돌들을 급하게 치운 듯 보이는 동굴이 보였다.
기이하게도 동굴은 인위적인 작업을 하다 만 것처럼 인간의 손길이 닿은 듯 보이는 각진 돌들이 보였다.
“재미난 장소로 저희를 데려오셨군요. 근데…….”
시우가 손을 흔들자, 입구가 폭파되며 절벽을 받치고 있던 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쾅. 쿠르르르르.
돌과 모래가 무너져 내리며 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났고, 연기가 걷힌 후엔 입구는 완전히 막혀 버렸다.
“이런 애들 장난에 장단을 맞추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죠.”
무너진 입구를 보던 명진이 차갑게 답했다.
“시우 시주는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죠?”
“들어가지 않는다면, 시주가 찾는 소저와 시주 일행 모두 이곳에 뼈를 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진의 말에 주변에 흩어져 있던 나한들이 일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팔방을 점하는 진을 짜고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자세를 취해 보였다.
창! 차창!
그와 동시에 시우 일행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시우 일행의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시우 시주. 시주와 시주 일행이 그저 들어가기만 하면 이곳에서 피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스스로의 손에 부당한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겁니까?”
명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나마 몇몇 인원은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전을 벌인다면 아무도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백팔나한진의 재평가할 때가 되었군요.”
“감히!”
태블릿을 들고 있던 나한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섰다.
시우는 그를 가만히 보며 말했다.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중하는 것이 좋을 거다. 그렇게 거슬리게 행동하다간 가장 먼저 부처님을 만나게 될 테니까.”
“감히 소림을 욕보이고도 살아 돌아가길 바라는 것이냐!”
“네놈에게 한 소리다. 왜 소림 뒤에 숨으려고 하지?”
“이놈!”
태블릿을 들고 있던 나한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시우에게 쏘아져 나갔다.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듯 휘둘렀다.
[거인의 손]
그 순간, 허공에서 마법진과 함께 거대한 주먹이 나타나 나한을 짓이겨 버렸다.
쾅.
거인의 주먹은 나한의 흔적을 지우고 땅속까지 파고 들어갔다.
나한의 흔적이 사라지자, 시우는 가볍게 손을 털며 말했다.
“백팔나한 중에 하나가 사라졌으니, 이제 어쩌시렵니까?”
명진은 흔적도 없이 땅속으로 사라진 나한의 모습을 보다가 시우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동요의 흔적 따윈 보이지 않았다.
“시우 시주, 소림의 백팔나한진이 어찌 그 오랜 세월 동안 패배하지 않고 이어져 올 수 있었다 생각합니까?”
“제가 보기엔 조금 과대평가되었거나, 그동안은 이름이 무서워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것 아닌가 싶군요.”
“시우 시주의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백팔나한은 몇 번 외부의 인사에 패배한 적도 있습니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의 위상을 지켜주기 위해 상계의 무인들이 배려한 거군요.”
투둑.
시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한이 처박힌 땅속에서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그건 아닙니다.”
투두둑.
이윽고 돌멩이들과 흙더미들이 마구 쓸려 나오기 시작했고, 뒤이어 사람 모습의 인형이 괴성을 지르며 튀어 나왔다.
“흐아!”
사방으로 흙모래를 뿌리며 나타난 나한의 온몸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소림의 진정한 힘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오.”
땅속으로 처박혔던 나한은 깊게 파인 구덩이를 딛고 나와 숨을 몰아쉬었다.
나한의 온몸엔 흙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시우 일행이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금강부동.”
정현민의 말은 소빈과 우빈을 더욱 놀라게 했다.
“금강불괴신공은 소림의 삼대 무력 단체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닙니까! 백팔나한과는 엄연히.”
“이미 200여 년 전에 극복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백팔나한 모두는 금강불괴신공을 익힌 금강들입니다.”
진을 이루고 있던 나한들의 몸에서 빛이 번쩍였다.
마치 하늘의 태양이 지상에 내려앉은 듯 환한 불빛이었다.
“금강불괴신공이면, 금강불괴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시주.”
금강불괴라는 말이 결국 나오자 형원의 얼굴엔 절망만이 남았다.
형원은 스스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흐흑, 흑. 흑. 란아…….”
“생사신의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 보니 무서운 무공인가 보군요.”
시우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시우의 뒤편에 선 일행들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금강불괴신공과 나한기공은 상이한 무공이다. 외부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는 금강불괴신공은 외공으로 치부되지만, 내가기공에 대한 공격도 막을 수 있기에 외공 최강의 무공으로 불렸다. 반면 나한기공은 내가기공으로 분류되었지만, 나한진을 펼칠 때 금강불괴만큼 단단한 방어력을 자랑했기에 나한진과 함께 펼칠 때는 최강의 내가기공으로 불류되었다.
이런 상이한 소림의 최강 무공이 하나로 합쳐졌다.
금강부동심법을 익힌 이가 절정의 파괴력을 가진 백팔나한진을 펼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니 시주께선 그냥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끝까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 하는 스님의 행태는 정말로 그냥 지나치기 어렵군요.”
“…….”
명진은 시우의 말에 울컥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야 했다.
“시우 시주, 저 또한 평범한 인간의 육신을 타고났습니다.”
“호오, 이제야 조금 솔직한 모습이 나오는 것 같군요.”
“제 인내심을 언제까지 시험할 작정이십니까?”
“스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은 보고 들어가고 싶군요.”
시우의 말에 명진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그리 원한다면 제 손에도 피를 묻히겠습니다. 나한들은 진을 준비하라!”
명진의 음성이 묵직하게 절벽 전체를 울렸다.
백팔 명의 나한들은 일제히 합장하며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절벽에 가려져 빛이 잘 들지 않았던 계곡 내부엔 백팔나한으로부터 시작된 환한 빛이 전체를 아울렀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는 강력하고 단단하여 무형의 기였음에도 거대하고 단단한 벽이 밀려 들어오는 듯 보였다.
“모두들 조심하세요!”
소빈이 내공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그녀의 몸에선 벌써부터 살기가 뻗어 나왔지만, 백팔나한진이 뿜어내는 기파를 쉽사리 뚫지 못하고 있었다.
압축된 기파가 절벽과 맞닿으며 공진을 일으키기 시작할 때.
경쾌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울렸다.
딱!
시우의 손가락 끝에서 난 그 소리와 함께, 백팔나한진이 뿜어내는 기파와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이게!”
내기를 끌어 올리던 명진도 순식간에 내공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독불침에 금강불괴도 극복할 수 없는 독이 두 가지 있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봅니다.”
명진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렸다.
“서, 설마.”
“산공독을 해독할 수 있는 건 당가의 사람들뿐이라죠? 이곳에 소림의 나한들 외엔 없으니 여러분들의 독은 누가 해독해줄 겁니까?”
“어, 언제!”
명진의 물음에 시우는 되려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와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있으면서 이런 일도 생각하지 않은 겁니까? 그냥 마법사도 아니고 다크 위저드 출신에 7서클 마도사를? 하하, 불경 공부만 해서 그런지 순진하시군요.”
“우, 우리에게 산공독을 먹였단 말입니까! 하지만 음식이라면 분명 우리가…….”
“아! 그런 위험한 짓은 할 수 없죠. 중국에 처음 발 디뎠을 때. 강호맹이 먹이려던 산공독을 마법을 이용해서 따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독한 것은 여러분이 버스에 타고 있을 때, 공기를 이용해 조금씩 여러분의 숨과 함께 하독을 했죠.”
“그렇다면…….”
명진의 시선이 태블릿을 들고 있던 나한에게로 향했다.
시우 일행은 그를 공격함과 동시에 버스의 일부를 박살내어 외부를 훤히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명진은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그들 일행을 다른 버스로 옮겨 태웠던 것.
“서, 설마…… 모든 것이 다 계획된 일이었습니까?”
시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건 아닙니다. 마법사란 준비하는 자. 그때그때 기회가 올 때마다 다음을 기약하고 준비했던 것뿐이죠. 다행히 저분께서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셨고.”
태블릿을 들고 있던 나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그렇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시면 제가 너무 악당 같지 않습니까. 스님. 얼굴을 좀 펴시지요. 진짜 악당은 스님과 강호맹이 아닙니까.”
“결국 또다시 많은 피를 흘릴 셈입니까.”
“나와 내 친구의 피 100밀리보다, 적의 피 100리터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시우의 말에 시우의 일행은 환호했다.
명진은 절망적인 현실에 두 눈이 절로 감겼다.
윤리와 도덕 양심과 불심 모든 것을 걸고 한 행동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죄책감을 덜어가며 겨우 했던 행동이었다.
마음속의 윤리보단, 소림사의 태산북두라는 위치가 더 중요했고, 도덕과 양심보단 소림의 이익에 더욱 신경 썼으며, 강호맹이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할 때, 전체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눈을 감아버린 그였다.
감았던 명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명진의 눈동자에선 안광이 번뜩였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들어가지 않고 우리와 대적하려 한다면, 어린 소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명진의 말에 잠시 잔치 분위기였던 시우의 팀은 순식간에 자신이 업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어떻게 전할 생각입니까?”
“그, 그거야 당연히…….”
“전화라곤 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까 확인한 바 전파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시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명진과 나한은 티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절벽이 무너지고 사람이 땅으로 꺼졌다.
이윽고 공간 사이를 뚫고 들어온 까마귀 한 마리가 시우의 손 위에 앉았다.
“거기에 더불어 사방 어디를 찾아봐도 정보원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더군요.”
명진의 얼굴이 점점 시꺼멓게 변해갔다.
“아마 형란이 있는 쪽으로 연락하기도 쉽지 않겠죠?”
“어디 한 번 볼까요? 내공을 쓰지 못하는 소림사 최강 무승들이 얼마나 실력이 대단한지?”
“…….”
시우가 걷다 멈춰서며 뒤를 돌아봤다.
“모두 다 쓸어서 부처님께 보내드려. 극락환생하신단다.”
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행들은 대포처럼 백팔나한진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