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시우 일행은 차를 갈아타고 다시금 끝없는 이동을 시작했다.
대형 버스는 사방의 창문이 가려져 밖을 볼 수 없었고, 나한들이 함께 탑승하여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해 나갔다.
형원은 태블릿PC로 동생을 확인한 후부터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끊임없이 떨리고, 손톱은 입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만 떨어라.”
“….”
시우의 말에 형원이 울 것 같은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봤다.
“네가 걱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어.”
“…하지만! 동생이 묶여 있었다고요!”
“놈들은 함부로 네 동생을 건들 수 없어. 그랬다간 당장에 우릴 놓칠 테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시우의 말에 형원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마법이 뭔지 잘 모르는구나.”
시우가 손안에서 작은 마법진을 생성시켰다.
번쩍!
화려한 빛과 함께 순식간에 시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정지! 정지!”
“최시우가 사라졌다!”
나한들과 강호맹의 무인들은 대경실색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멈춘 차 밖으로 나갔다.
그때, 버스 뒤편에 존재하는 화장실에서 최시우가 문을 열고 나왔다.
“호들갑들은….”
시우의 말에 강호맹의 무인과 나한들이 저마다 살기를 뿌리며 시우에게 경고를 내뱉었다.
“함부로 허튼짓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
시우는 슬쩍 무인을 바라본 후, 다시금 착석했다.
“네 동생이 위험에 빠지는 순간, 놈들은 우릴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될 것이다. 그걸 바라는 놈은 없겠지. 한국에 와서 쓴맛을 봤으니. 한국으로 돌아올 일도 없을 것이고.”
형원은 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바라는 건, 저보다도 제 동생의 안위입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 동생을 먼저 구해 주세요.”
“걱정 말아라. 너희 두 남매의 안위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시우는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강호맹이 양아치 집단이라도 어린 소녀를 괴롭히는 취미 같은 건 없겠지.”
시우의 말이 거슬렸는지 태블릿을 들고 있었던 나한이 나직이 말했다.
“말조심해라. 강호맹은 너 따위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니다.”
“….”
시우는 다시금 못 들은 척 형원을 보며 말했다.
“소림사의 중들이 있음에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약속한 대로 모두 염라대왕을 만나게 해주겠다.”
“이 작자가!”
태블릿을 들고 있던 나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시우의 요혈을 향해 금강지를 흩뿌렸다.
금색의 지기가 눈앞의 시우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을 뻗어내었다.
[헬 버스터]
퍼펑! 쾅!
버스 창문이 통째로 날아가며, 나한의 몸에 불길이 붙은 채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버스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놀란 기사의 급브레이크에 물건들이 사방으로 날렸다.
버스가 멈추자,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밖으로 나갔다.
버스를 중심으로 사방에는 나한들이 진을 펼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시우의 정면에 선 명진은 말없이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명 스님이 중태에 빠졌습니다.”
명진은 해명을 바라는 듯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자가 먼저 손을 썼지. 난 내 몸을 보호하려 했을 뿐입니다.”
시우가 으쓱거리며 말하자 명진이 뒤이어 버스에서 내린 나한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한은 황망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저자가 저희를 욕보이고….”
“내가 말도 편히 못한단 말이오? 그 말을 옅들은 그대들이 잘못인 것이지. 나는 그저 가만히 있다 억울하게 공격당한 일밖에 없소이다.”
“그만.”
명진이 은은하게 울리는 사자후를 펼쳤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가 주었으면 좋겠소. 피차 편한 자리는 아니니.”
“거듭 말하지만, 나는 그저 일방적으로 공격당한 일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자중하시오.”
명진은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그때 시우가 명진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그나저나 밥은 언제 줍니까?”
“…도시락을 제공할 겁니다.”
“또 지난번처럼 이상한 약을 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스님.”
명진이 고개만 돌린 채 시우를 바라보곤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 * *
안후이성 이남 아름답기로 소문난 황산에서 이어지는 평야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거대한 장원이 존재한다.
안후이성의 절대 강호이자, 이 거대한 평야의 주인인 남궁세가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 대단한 위상을 이어 오고 있었다.
비록 야토가미의 출현 이후, 강호맹에 밀려났지만, 아직도 중국 상계의 무인들에겐 남궁세가의 이름은 거대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어둠이 내린 남궁세가의 장원.
내부의 인테리어는 대부분 현대식으로 바뀌었기에 거대한 장원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다.
다른 많은 상계와 마찬가지로 남궁세가도 현대에 들어서 긴 밤을 활용하고 있었다.
생활환경이 발전하고 편리해진다 해도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는 이가 많지 않은 것처럼.
연무장에 조명이 설치되고 24시간 무공 수련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이 편리해진 생활을 가장 많이 활용해야 하는 것은 남궁세가의 가주였다.
현대에도 거대 세가를 운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가 내부의 재정부터 시작해 후학양성에도 신경을 써야 했고, 강호맹과의 관계와 다른 세가와의 동맹도 걱정해야 했다.
그 모든 일을 처리하자면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피곤하군.’
평생 검을 잡던 이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펜과 컴퓨터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렸을 땐 강자가 되기 위해 하루가 부족하게 검을 잡았던 적도 있지만, 피곤함으로 따지자면 앉아서 업무를 처리하는 지금이 더 피곤하게 느껴졌다.
장원 내부를 걸어 자신의 숙소로 향하던 남궁산은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누구지?’
저녁이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깊은 밤이었다.
멀지 않은 연무장에선 검 휘두르는 경쾌한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남궁산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연무장으로 옮겨졌다.
남궁청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남궁세가의 대표 검술인 창궁무애검법.
남궁청은 나이에 비해 높은 성취를 보였다.
창궁무애검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필히 익혀야 하는 내가기공인 창궁대연신공을 운용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그의 성취는 이미 의념에 기가 움직이는 듯 간혼 푸르른 검영이 허공에 남곤 하였다.
창궁무애검법의 초식이 끝나고 그의 신형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의 이마에 투명한 땀이 고이고 그의 머리카락은 물에 젖은 듯 보였다.
하지만 남궁청은 멈출 생각이 없는지 다시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대연검법, 섬전십삼검뢰, 고혼일검, 창궁비연검, 천풍검법, 철검십식까지 남궁청은 끝도 없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리고 철검십식의 초식이 끝나고 다시금 창궁무애검법의 초식을 시작하려 할 때 중저음의 음성이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검 끝에 의식을 집중하지 않는다면, 만 번의 검을 휘두르는 것 또한 무의미함이다.”
남궁청은 갑자기 들리는 음성에 살짝 놀라 고개를 돌리곤 자세를 잡아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쓴소리를 내뱉긴 했지만, 남궁산의 눈빛엔 따뜻함이 가득했다.
“또 고민이 있나 보구나.”
“아, 아닙니다.”
“이번엔 어떤 처자가 네 마음을 흔들었느냐?”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남궁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냐?”
“….”
남궁청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자신이 알게 된 일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선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진실은 진실이고 거짓은 거짓이지. 그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냐?”
“네,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남궁청의 이야기를 듣던 남궁산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정가를 도우러 갔다 돌아온 이유가 그에 있음이냐?”
“….”
남궁청은 대답하지 못했다.
“진실과 거짓은 전혀 상반되어 보이지만 때때로 그 둘은 서로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곤 하지. 그것이 편하니까.”
“…하지만 전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싶지 않습니다.”
남궁청의 대답에 남궁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땐 스스로 찾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내야 한다.”
남궁청은 남궁산의 말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남궁산은 그런 남궁청을 계속 기다려 주었다.
“생사심법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남궁청의 말에 남궁산이 크게 당황하였다.
“새, 생사심법!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남궁산의 반응에, 되려 놀란 것은 남궁청이었다.
“그, 그렇게 놀랄 만한 일입니까?”
“으흠. 흠. 생사심법은 7대 기공을 꼽으라면 꼭 들어가는 심법이다.”
남궁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림 5대 기공 아닙니까?”
“통상적으로 알려져 있기론 그러 하다. 더구나 나머지 2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생사심법이… 천마심법이나 태극심법에 버금가는 기공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남궁청의 말에 남궁산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생사심법은 그 파괴력이나 정순함 때문에 의해 손꼽히는 것이 아니다. 그 심법이 가진 특수성 때문에 손꼽히는 것이지.”
“그 특수성이 무엇입니까?”
“전설로만 내려오는 이야기다.”
“단전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남궁산이 고개를 저었다.
“…생사심법은, 사선을 넘은 자를 데려올 수 있다고 전해진다.”
“….”
“물론,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한 것이다. 그 실체를 확인한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천살지존검과 함께 2대 기공으로 분류되는 것이지.”
“천살지존검….”
“그 또한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지, 자연의 기를 사용하고, 그 어떤 것도 관통하는 절대적인 검이라 하더구나.”
남궁산의 이야기를 듣던 남궁청이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버지….”
“말해 보거라.”
“가주 회의를 소집해 주십시오.”
“뭣이?”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가주 회의는 그냥 소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지 않느냐.”
“…제가, 그 두 가지 기공을 본 것 같습니다. 천살지존검과 생사심법.”
남궁청의 말에 남궁산이 한동안 말을 잊었다. 한참 만에 말을 꺼낸 남궁산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게 정녕 사실이냐?”
“네. 제 두 눈으로 확실히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