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한연맹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부맹주인 남궁혜자가 한연맹의 원로들뿐 아니라 각 무문의 대표들까지 모두 모았던 것.
일전에 모두가 모였을 때는 강호맹에서 받은 전리품을 나누는 자리였기에 호출을 받은 이들은 작은 기대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문파 대표들은 중년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젊은 나이에 대표에 자리에 올라서가 아닌, 그들이 가진 내공이 그들의 외형을 늙지 않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청년의 모습을 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야토가미와의 전쟁으로 원로와 문주를 잃어 그 후대를 이어가는 사람들이었다.
특히나 이들은 대가 끊길 위험을 겪어 보았기에 한연맹에 의지하는 바가 더욱 컸다.
한연맹은 그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지원은 곧 다시금 한연맹에 충성으로 돌아왔다.
한 개의 문파를 부활시키기 위해 드는 비용은 상당하였다.
단순 비용뿐 아니라 고수의 지원과 무공의 재현 등이 필요하였기에 몇 개 안 되는 문파의 부활에는 천문학적인 수준의 예산이 필요했다.
그 예산의 대부분은 일본 상계에서 나오는 전리품과 일본 상계를 지배하면서 한연맹이 얻게 되는 돈으로 충당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예산만큼 천문학적인 숫자의 서류작성이 필요했기에 이 일을 책임지는 한세아와 곽동원 팀의 노고가 상당했다.
그 노고를 잘 알고 있는 한연맹이었기에 잡음은 없었다.
거대한 대합실 안에는 작은 이야기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곧이어 남궁혜자와 한세아가 대합실로 들어서고, 소란은 서서히 잦아졌다.
“급한 연락에도 모두 모여 주어 고맙네.”
남궁혜자의 말에 한 무인이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이번엔 어떤 선물을 주실지 모르는 데 빨리 와야죠.”
무인의 농담에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남궁혜자도 그런 분위기가 싫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군. 오늘 이 자리는 선물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네. …오히려 큰 고민을 떠안는 자리가 될 게야.”
“…….”
남궁혜자의 말에 장내 인물들의 웃음기는 사라지고, 분위기는 더욱 진중해 졌다.
“지금 중국에 가 있는 맹주로부터 연락을 받고 오는 길이네. 좋은 소식은 연맹의 소속인 우빈이 단전을 고쳤을 뿐 아니라, 중국 상계에서 유일하게 단전을 고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알려진 생사신의의 신원을 확보했다는 것일세.”
“오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생사신의는 중국 상계를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네. 아마도 그의 최종 목적지는 이곳 한연맹이 될 가능성이 높아.”
남궁혜자의 말에 무인들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좋은 소식을 받은 사람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재 맹주에게 큰 문제가 있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할 참이야.”
잠시 일었던 소란은 금세 잔잔해졌다.
무인들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남궁혜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닳고 닳은 회색의 승복.
입가와 눈가에 진 주름.
이마를 타고 올라가는 여덟 개의 불계자국.
그리고 똑같은 복색의 백팔명의 인원.
눈앞에 나타난 이들의 모습에 우빈이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읊조렸다.
“백팔 …나한.”
자신도 모르게 읊조린 말이었지만, 그 파급력은 컸다.
우빈과 소빈을 비롯한 형원은 물론이고 비교적 상계에 발을 들인 것이 늦은 김준상의 팀원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상계에 발을 들이며 처음 듣는 이야기가 바로 중국 상계의 전설적인 존재 백팔나한에 관한 이야기였다.
백팔무퇴(百八無退)
‘백팔나한진은 뒤로 물러선 적이 없다.’
한국 상계의 역사를 월등히 뛰어넘는 유구한 중국 상계의 역사 속에서 절대 무너지지 않는 유일한 단 하나의 신화를 꼽으라 하면 바로 소림의 백팔나한진을 이야기한다.
그 오랜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강자가 승리와 패퇴를 반복하는 동안, 백팔나한진은 그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다는, 어찌 보면 허황된 전설에 불과하다 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들의 진지한 자세와 목소리는 그 허황된 전설을 진짜로 믿고 있는 듯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설을 맞닥뜨린 이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게 된다.
‘이야기가 진짜의 반도 따라가지 못한다.’
소림사의 무인들이 시우 앞에 섰다.
시우는 맨 앞에 선 자를 보며 말했다.
“스님은 언제나 의외의 모습으로 등장하시는군요.”
시우의 말에 맨 앞에 선 명진이 가만히 합장했다.
“오랜만입니다. 시주.”
“스님의 화려한 등장 때문에 저희 일행의 기세가 한풀 꺾였습니다. 저희는 앞으로도 계속 싸움을 이어 나가야 하는데. 이건 어찌 책임지실 겁니까.”
시우의 말에 시우의 일행은 자신이 검을 꽉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손바닥에 땀이 잔뜩 묻어났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없었다.
“시주와 일행분들이 걸어온 길을 보았지만, 그 기세가 쉽게 꺾일 것 같지는 않군요.”
명진의 말에 시우가 웃으며 말했다.
“스님께선 저에 대한 답을 찾고 오신 겁니까?”
“배움이 일천하여, 결국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을 내렸습니다.”
명진의 말에 시우가 물었다.
“그 결정이 백팔나한진입니까?”
“시주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에 미련이 남아있으면 그 작은 미련은 곧 움직임에 나타나는 법인데. 스님께선 그런 모습 따윈 보이지 않는군요.”
“과찬이십니다.”
시우의 양손에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결정하셨다면,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시작하시지요.”
시우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발걸음엔 작은 망설임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모습에 백팔 나한을 이루는 나한들이 움찔거릴 정도였다.
“시주께선 한 소녀를 찾기 위해 이곳까지 오신 거 아닙니까?”
명진의 말에 시우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시우가 입가를 비틀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불가의 스님이 잔머리 굴리기 있기입니까?”
* * *
남궁혜자의 말이 끝났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장내의 인물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고, 무거운 고민을 하게 하기 충분했다.
그 무거운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들의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명목상 우빈은 한연맹의 시우 소속이라 하지만, 실상 정가는 그를 한 핏줄이라 생각하지 않은 적 없네. 결국, 이 일은 정가의 일이기도 해. 따라서 자네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나서지 않아도 좋고. 나서지 않는 다 해서 자네들을 원망하는 일 따윈 없을 거라 이야기하고 싶네.”
남궁혜자의 말이 끝나자 한세아가 나섰다.
“아주 큰 일이 될 겁니다. 시우 님이 직접 나설 수 없기 때문에 큰 피해도 예상되고요. 이제 막 문파를 다시 일으키는 분들께 더욱 큰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 미화문은 정가와 함께하기로 뜻을 모았고, 저희들만으로도 충분한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한세아가 말했지만, 여전히 장내의 인물들에게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고, 침묵은 끝을 모르고 이어 나갔다.
남궁혜자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한세아를 바라보았고, 한세아 또한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너무 하시군요.”
무인 중 한 사람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두 분의 이야기는 저희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무인의 옆에는 의수를 착용한 민머리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수박문의 문주 갈상훈이었다.
“저희 수박문은 지난번 야토가미 사태에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문파의 재건이 불투명했고, 훗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죠. 하지만 한연맹은 그런 저희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덕분에 문파의 재건은 차근차근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한연맹에 소속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단순히 지원을 받고 저희의 이익만을 챙기기 위함이 아닙니다.”
갈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곳에 계신 분들 모두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한국 상계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뭉쳐 본 적이 없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 우리끼리 싸우기 바빴고,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그런 저희가 처음으로 뭉치게 되었습니다.
그건 단순히 힘의 응집과 권력을 집중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한연맹에 모인 진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으흠.”
남궁혜자가 부끄러운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전 이런 부탁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연맹 사람을 구하기 위한 명령을 원합니다. 그리고 제가 위험할 때, 연맹이 그런 명령을 내려주길 바랄 겁니다.”
갈상훈이 자리에 앉았다.
잠시간의 침묵을 유지하던 무인들 사이에서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무인들의 이야기에 남궁혜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건지 모르겠군. 알겠네. 한연맹의 부맹주로서 명령하겠네. 연맹에 소속된 모든 문파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지원을 하도록 하게나. 예외는… 없네.”
남궁혜자의 말에 무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 * *
명진과의 대화에선 언제나 예의를 지키던 시우의 입에서 된소리가 흘러나오자 뒤에 섰던 나한 몇몇이 움찔거리며 단숨에 튀어나올 기세였다.
하지만 정작 모욕을 받았던 당사자는 미동 없이 가만히 시우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이야기 할 뿐이었다.
“부끄럽게도, 시주가 싸우는 장면을 몰래 보았습니다.”
“적을 조사하는 일이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시주께선 적진 안에서도 언제나 자신이 유리할 수 있게 싸우시더군요.”
명지의 말에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보시던데 잘 보셨군요.”
“그래서 단순히 시주와 맞붙는 것은 저희에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제가 순순히 그곳에 쫓아갈 거로 생각하십니까?”
나한 중 한 사람이 품에서 태블릿 PC를 꺼내어 명진에게 건넸다.
“시주께서 찾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 아닙니까?”
태블릿 PC 안에는 홍안의 소녀가 의자에 묶인 채 화면을 바라보며 형원을 부르고 있었다.
-오빠! 오빠!
형원은 자신도 모르게 일행 앞으로 튀어 나갔다.
마침 소빈이 정신을 차리고 형원의 손을 잡아 그를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란아! 란아!”
명진은 태블릿 PC를 다시금 나한에게 건넸고, 나한은 태블릿 PC를 품속에 넣었다.
“너희가 이러고도 정파의 태산북두를 자처하느냐! 승복을 입고 깨끗한 척해도 결국 너도 다른 강호맹의 위선자들과 다를 바가 없구나!”
형원이 악 소리를 내며 명진을 비난했다.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말하는 형원의 말에 태블릿 PC를 품 안에 넣은 소림의 나한이 손가락에 기운을 모아 형원에게 쏘아 내었다.
갑작스레 거력을 품은 지기가 형원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오자, 소빈이 가볍게 소매를 흔들어지기를 흐트러뜨렸다.
지기를 쏘았던 나한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이 쏘았던 지기가 소림의 일절 중 하나로 손꼽히는 금강지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대화 중이지 않습니까.”
소빈이 살기를 뿌리며 이야기하자 나한은 소빈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시우 또한 그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다가 명진을 보며 말했다.
“만약 우리가 스님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어찌할 겁니까? 설마 불가의 스님이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진 않겠죠?”
“물론 불가의 귀의한 이들이 어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형란 시주를 데리고 있는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진 소승도 잘 모르겠군요.”
명진의 말에 시우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시우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크크큭, 크큭. 큭. 정말이지….”
잠시 뒤 고개를 든 시우의 얼굴엔 활짝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앞장서시죠.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한번 지켜보겠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시우를 보는 명진의 심정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명진이 본 시우의 환한 미소는 그가 일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잔인한 기운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진은 자신의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속으로 조용히 불호를 읊조렸다.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