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우우웅
소빈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화산파의 무인들은 풀이 베어지듯 쓰러졌다.
“하압!”
그녀의 검은 압도적인 살기를 흩뿌렸다.
도력이 약한 화산의 어린 무인들은 살기에 버티는 것만으로도 필사적이었다.
야토가미에 의한 반강제적 평화의 시대를 살아온, 청·장년 세대의 무인들도 소빈의 살기를 버티는 게 쉽지 않았다.
그녀가 살기를 흩뿌릴 때마다 그들의 머릿속엔 자신의 목과 손·발이 잘려나갔다는 환상이 강렬하게 심어졌다.
때문에 검을 휘두르던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거나 고개를 돌리는 등으로 전투에 집중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소빈의 검은 자연경의 깨달음을 담은 것이었기에 인력보다 강한 기력, 기력을 강렬한 무기로 변화 시킨 무공의 절대적 물리력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여타 많은 무인들의 검기를 지나침에도 약해짐이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균일한 힘을 상대에게 쏟아냈다.
화산의 무인들은 소빈 앞에 추풍낙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준상의 팀인 이프리트 팀은 시우의 전투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한 듯 파괴적이고 패도적이었다.
일방적인 오행합격진은 일반 무인들에겐 포격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산파의 무인들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오행진이 쏟아붓는 정령마법에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정현민의 얼굴은 쉽게 펴질 줄을 몰랐다.
“흐음….”
화산파의 모든 인물들을 끌고 온 듯 사방에선 화산의 무복을 입고 검을 든 무인들이 끝도 없이 밀려 들어왔다.
“괘, 괜찮을 까요?”
압도적인 화산파의 무인들의 수에 질려버린 형원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글세, 모르겠구나.”
“….”
정현민의 확실치 않은 답변에 형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것을 금방 알아차린 정현민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네?”
“시우 군, 아니 한연맹의 맹주님은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형원의 눈길이 화산파의 장로원을 상대하고 있는 시우에게 향했다.
“특히나 적과 한 약속은 더더욱.”
정현민은 말을 마치곤 다시금 형원을 보호하기 위해 화산파의 무인들과 검을 섞기 시작했다.
형원은 어쩐지 이전보다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 * *
“내가 그쪽을 맡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시우의 말에 우빈이 조익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완전 천적이더만, 그냥 그쪽 맡아.”
“단전 찾았다고 너무 기고만장한 거 아냐? 여기 노인네들보다 그쪽이 더 강해.”
우빈은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나도 약하지 않아.”
우빈의 말에 시우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못 도와준다.”
“그쪽 괴물들이나 잘 처리해. 화산 장로원은 역대 최강 전력이라고 소문이 자자 하니까.”
우빈의 말을 끝으로 시우는 장로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빈이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천하제일검을 마주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선배.”
우빈의 말에 조익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를 아느냐?”
“저희 세대 때에 화산독응을 모른다면 상계인이 아니겠지요.”
“재밌구나.”
조익경의 몸에서 보라색의 기파가 유형화되며 퍼져 나왔다.
“허허.”
장로원의 수장이자 전전대 화산파를 이끌었던 철혈매화 송단현은 눈앞에 선 청년의 모습에 허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1세기 이상을 살아온 그였지만, 시우처럼 특이한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중국 상계인들은 전투 중에 절대 입을 것 같지 않은 긴 코트에 움직임이 제한될 것 같은 일상복을 입고 싸운다. 거기에 양손엔 무기 대신 빛으로 형성된 반투명한 마법진을 쥐고 선 그의 모습은 단지 그가 복장만이 다른 인간임을 표현하진 않았다.
더구나 마법진을 쥐고 선 그의 모습은 두려움을 찾을 수가 없었다.
화산파의 장로원은 화산파에서도 단순히 오래 산 사람만이 들어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배분을 뛰어넘어 화산에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우거나, 업적을 뒤덮을 만큼의 엄청난 무공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했다.
그랬기에 화산의 장로원에 드는 것은 화산이 요구하는 절대적 강자의 조건에 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그런 원로의 숫자가 일백을 넘어서는 곳이 바로 화산의 장로원이었다.
“세상이 바뀐 것인가? 그대의 용기가 대단한 것인가?”
송단현의 말에 시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노인장. 스스로의 실력을 과신하는 것은 좋으나. 상대를 과소평가해선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소.”
“네 힘이 우리를 넘어선다는 것이냐?”
“방금까지 저쪽의 괴물과 노인장들을 상대했던 나요. 저 괴물을 상대할 사람이 나타난 이상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소?”
송단현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가 형이를 엉망으로 만들었다지?”
“화산의 진문형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렇소.”
“어리석은 짓을 한 게야. 잠자는 화산을 건드렸으니. 너와 네 가족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야.”
송단현의 말에 시우의 눈에서 불이 켜졌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닌 실제 녹색의 불이 번쩍였다.
송단현은 갑작스런 시우의 변화에 흠칫 놀랐다.
“노인장. 입조심 하시오. 난 전쟁에 나온 병사는 적이지만 적으로서 예우를 다하고 있소. 하지만 내 가족을 노리는 놈들은 다르오. 힘없는 자를 괴롭히는 자는 짐승으로 생각하고, 짐승의 핏줄은 이 땅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네게 특이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겠으나, 그것이 다다. 이미 우리 눈에 익은 이상 거기까지 일 뿐이다.”
“당신도 결국은 그저 그런 상계 인간 중 하나일 뿐이었군.”
“…한 손이 열손을 당해 낼 수는 없다.”
“….”
시우가 주변을 쭈욱 둘러 보았다.
끝도 없이 많은 화산의 무인들이 사방에 즐비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오.”
“무엇을 말이냐?”
시우의 오른손이 몇 번의 회전을 하더니 붉은빛의 마법진을 만들어 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그런 전쟁이란 말이오.”
시우의 오른손이 바닥을 내리쳤다….
한치도 시우의 모습을 눈에서 떼지 않고 있던 원로 셋이 동시에 매화일섬을 펼치며 시우의 요혈을 노렸다.
팡! 팡! 팡!
하지만 시우를 노렸던 검은 시우를 감싼 반투명한 막에 튕겨 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우의 오른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붉은색의 물결이 바닥을 물들이며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에 퍼져가는 파장처럼 사방으로 뻗어가는 붉은색의 물결은 분위기를 바꾸었다.
“이, 이건 뭐지?”
“하, 하늘이.”
푸르렀던 하늘은 커다란 노을이 진 듯 붉은색으로 변하고, 하늘에는 음울한 검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
“화산파 도인들의 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겠소!”
시우의 말과 함께 그의 손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바닥에 꽂혔다.
[리얼라이즈 나이트메어]
가시적으로 변한 것은 없었지만, 화산파 무인들이 하나둘 멍한 눈동자로 힘없이 변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째질듯한 비명과 함께 검에 베인 무인은 자신을 벤 상대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어, 어째서.”
방금까지만 해도 시우에게 분노를 품으로 이를 갈던 동료가 자신을 향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김천학! 네놈을 13년이나 기다렸다!”
“무, 무슨 소리야! 나야 무산! 강무산이라고!”
무인의 외침에도 이지를 상실한 무인은 매화검법을 펼쳤다.
화산파의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고얀놈. 역시나 사술을 쓰는구나.”
“클클. 여기서 끝이라 생각하오?”
“뭣이라?”
[소환][다크 나이트]
시우의 발치에서 시작된 검은 그림자가 뻗어 나가며 백면궁의 무인들을 하나둘 휘감았다.
백면궁의 무인뿐 아니라 야토가미의 무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숫자 또한 기백에 다다랐다.
검은색 일색의 음울한 기운을 마구 퍼트리는 다크 나이트의 모습에 송단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을 과거 느낀 적이 있었다.
‘천년마교의 혈체강시….’
생명력이 느껴지 않는 눈빛과 표정.
몸에서 자연스레 뿜어내는 내공의 기운이 없지만, 그 특유의 무감각한 신체에서 뻗어 나오는 부자연스런 기운까지.
다시는 볼 일 없다고 생각한 지난날의 악몽이 떠 올랐다.
‘만약 진짜 강시라면….’
송단현은 곧장 장로원의 원로들에게 전음을 내보냈다.
-심상치 않다. 원로들은 화산의 제자를 보호해라.
-사조님. 저놈 또한 심상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단은 먼저 저놈을 처치해야 합니다.
원로원들의 이어지는 전음에 송단현이 일갈했다.
-화산의 제자들 없이 화산을 어떻게 이어갈 셈이냐!
-….
-….
송단현의 말에 원로원들이 인상을 찌푸린 것은 그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탓에 그들은 복잡미묘한 심경을 느낀 것이다.
“내 듣기로. 화산은 중국 상계의 최강 집단이라 들었소.”
시우의 말에 송단현이 신색을 회복하며 말했다.
“…그런 위험한 상대를 건드린 것이다.”
송단현의 단호한 말에 시우가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 특별히 하나 더 준비하였소.”
“뭣이라?”
“마음에 들 것이오. 이 선물을 받고 불만을 표하는 이들을 본 적이 없소.”
[소환][데스 나이트]
시우의 발치에서 시작된 검은 그림자에서 드물게 빛이 쏟아져 나왔다.
다섯 개의 빛은 작은 원형을 그리며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빛 사이로 드문드문 사람의 인형이 보였다.
눈을 가리던 빛이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검은 갑옷을 입은 해골만 남은 시체였다.
“겨우 시체 따위로 우릴 상대하려 하느냐?”
송단현이 시우의 마법을 비웃으며 말했다.
“내 말하지 않았소? 불만을 표하는 이들이 없었다고.”
검은 갑옷을 입은 해골의 눈가에 붉은 연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타오르는 붉은 눈을 가진 것 같았다.
해골의 손에 쥔 검에서도 붉은 연기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전투 자세를 잡는 데스 나이트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엄청난 압박감을 뿌리기에 충분했다.
송단현과 장로원의 원로들은 갑작스레 풍기는 압도적인 죽음에 기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우는 그들을 보며 짧게 웃었다.
“그렇게 불만을 표하려던 이들 모두가 죽었거든.”
-으아아아악!
-커흑!
-아아아악!
사방에서 죽음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끝없는 비명과 절규.
살을 에는 절삭음과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바로 무도였지만.
자파의 문도들이 속절없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본다면 아무리 상승 무공을 익힌 이라 해도 정신을 집중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지금 조익경의 상태가 그러하였다.
“선배! 틈이 너무 많습니다!”
처음 우빈이 자신 앞에 섰을 때만 해도 조익경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방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장로원과 자신을 동시에 상대하는 시우에게 라이벌로서의 경쟁심은 물론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절대적인 힘을 얻은 그를 경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장로원의 원로들에게 가고 자신에겐 우빈이 남았으니 그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하고, 자파의 무인들이 끊임없이 죽어가면서 그의 심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백의 검이 이토록 무거웠더냐.”
“새로운 태백의 검이라 그렇습니다.”
조익경과 검을 맞대는 우빈의 표정에는 버겁지만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남궁세가의 먼 외척 중 하나라 생각했건만, 문파 내부에 자료를 고쳐야겠구나.”
“영광입니다!”
순식간에 십여 합을 맞교환한 두 사람이 잠시 틈을 벌린 뒤 다시금 맞붙었다.
“이 검의 이름이 무엇이냐!”
“정식 명칭은 없습니다! 하지만 허락을 받는다면 태백지존검이라 하고 싶군요.”
“지존이라!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구나!”
조익경의 검이 우빈을 짓누를 듯 몰아쳐 왔다.
사방을 누비는 혈매화가 금방이라도 우빈의 숨을 거두어 갈 듯 강렬하게 흔들렸다.
“나 또한 그리 생각했습니다! 근데, 천하제일검에 뒤지지 않는다면 지존이란 이름을 담아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빈의 검이 수직으로 휘둘렸다.
사방에서 흐트러지듯 떨어지던 혈매화들이 일순간 부르르 떨리며 태산에라도 눌린 듯 바닥에 압착되어 흔적마저 사라졌다.
“내가 너무 얕보였군.”
“….”
“진정, 천하제일검을 보여주마. 네 말대로 지존이란 이름을 담아 볼 만한지 재 보거라!”
조익경의 검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매화?’
하나둘.
매화가 봉우리째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셋, 넷, 다섯, 여섯…
그것을 시작으로 하늘을 가득 메울 듯 매화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에, 에이, 설마….’
그렇게 늘어난 매화 봉우리의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매화 봉우리는 순식간에 수천 개의 매화이파리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싸움이 아니었다면 그 엄청난 광경에 넋을 잃고 보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가히 압도적으로 아름답고 대단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꽃잎 하나하나를 상대해야 하는 우빈의 얼굴엔 핏기가 가셨다.
“새, 생각해보니. 아직은 지존이란 이름을 담기엔 조,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빈의 약한 말에도 꽃잎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우빈의 얼굴이 절망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