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우빈은 미니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한적한 곳을 찾아 명상에 빠져들었다.
다시 찾은 단전으로 심법을 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공 심법의 운용은 무인에게 더욱 깊은 내면의 성찰을 관조하게 한다.
내면의 성찰은 스스로 더욱 자세히 알게 하고 내면에 빠져들어 열락을 경험하게 한다.
내공을 잃은 무인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이 관조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맑고 깨끗했던 정신이 점점 화기에 물들어가며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게 한다.
뿌연 안개가 머리에 낀 듯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잡념으로 이끈다.
단전을 잃은 무인이 폐인이 되기 쉬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우빈은 단전을 되찾은 이후에 다시금 내공 심법에 빠져들었다.
온몸의 에너지가 충만하고,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호르몬에 의한 긍정 에너지가 사람을 활기차게 만든다.
우빈 또한 그랬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빈은 내공 심법을 운용하지 않는 명상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또구나.’
운기를 하던 어느 순간부터 내공은 단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중을 잃지 않았고, 내면을 더욱 파고들었다.
무저갱의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은 환한 공간으로 뒤바뀌고, 자신이 숨 쉬고 있다는 것마저 잊은 우빈은 뜬금없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눈앞에 치렁한 백발을 아무렇게나 기른 사내가 우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시죠?”
-모른다.
우빈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곳은 어딘가요?”
백발의 사내가 답했다.
-모른다.
우빈은 사내의 행색을 바라보다 특이한 점을 발견하고 말했다.
“그 검은 제 것이군요.”
무공을 익힐 때부터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검이었다.
특별한 이름은 없었지만, 무공을 잃은 후에도 버리지 못했을 만큼 애착이 많이 가는 검이었다.
“돌려주시죠.”
우빈은 손을 내밀며 이야기했지만, 사내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검을 바라본 후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것은 내 것이다.
“누구시기에 제 검을 자신의 것이라 하시는 겁니까?”
-모른다.
우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꾸 이러시면 재미없습니다.”
신발 앞코로 바닥을 두 번 튕긴 우빈이 순식간에 노인의 등 뒤에서 나타나 그를 제압하고 검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사내는 기이한 방법으로 우빈의 손을 뿌리친 후 다시금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엇? 방금 그건….”
사내의 움직임에 우빈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그의 움직임은 정가의 태백보법과도 비슷했고, 신법과도 비슷했으면서 결정적으로 정가에서 우빈만이 아는 움직임과 비슷했다.
“정체가 뭐죠?”
-모른다.
“천살지존검은 허락된 자만 익히도록 되어 있을 텐데요.”
그리고 그 허락을 내리는 자는 우빈이 아는 한 이 세계 최강자였다. 그 최강자를 꺾지 않는 이상 마음대로 익힐 수 없었다.
-천살지존검….
사내가 자신의 손아귀에 든 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전투태세를 갖추며 말했다.
-이것은 내 것이다.
“환장하겠네.”
우빈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 * *
“미치겠네.”
김준상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 나왔다.
평소 욕설을 절대 입에 담지 않는 그였기에 놀랄 법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심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야 일대와 작은 언덕 위로 나타난 똑같은 복색의 무리들.
제법 크게 보이는 인형부터 작은 점으로 보이는 인원들까지.
검은 무복에 하얀 매화가 수놓아진 무복을 입은 인원들은 그 끝이 보이지 않도록 계속 나타났다.
그들의 차이점이라면 얼굴의 생김새와 나이의 적고 많음 뿐이었다.
그런 통일감을 주는 복장이 시우 일행에겐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한쪽에 구경하듯 여유롭게 허리를 구부린 채 이편을 바라보는 노인들의 무리에게선 미화문 최강자인 한세아에 필적하는 기도가 뿌려지고 있었다.
“어디, 인류 최강 노인네들만 모아두는 노인정이라도 있답니까?”
무려 일백에 달하는 노인들의 숫자에 질려버린 박철호가 투덜거렸지만, 그의 농담을 받아주는 이는 없었다.
“우빈이 보이지 않아요.”
소빈의 말에 시우가 작게 이야기했다.
“잠시 쉬고 싶어 하길래 진을 열어 줬어요. 휴식이 끝나면 알아서 나올 겁니다.”
“일단 제가 깨우도록 할게요. 어디 있죠?”
“만환진 안에 넣어 놨어요.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기 힘듭니다. 알아서 나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주변을 둘러보던 소빈의 눈이 노인들에게 고정되었다
“일단은 물러나는 게 어떨까요?”
소빈의 말에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우빈이가 위험해져요.”
“…….”
“일단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천천히 시우 일행에게 다가오던 화산의 무인들이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섰다.
삽시간의 움직임을 멈추고 말없이 시우 일행을 바라보자, 시우 일행은 더 큰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산의 무인들 사이에서 한 인영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훤칠한 키에 선 굵은 얼굴을 가진 사내는 치렁한 장발이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지 바람에 흩날리는 대로 자연스레 두고 있었다.
장발의 사내가 시우 일행을 향해 말했다.
“최시우가 누군가?”
시우가 앞으로 나섰다.
“자네가 최시우인가?”
“그러는 그쪽은 누구지?”
시우의 역질문에 장발의 사내가 읊조리듯 말했다.
“젊군….”
사내의 말에 시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는 귀가 먹은 것인가?”
시우의 말에 몇몇 화산의 무인들이 앞으로 튀어 나가려 했으나 장발의 사내가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부리는 조화보다 혀가 맵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나를 아나 보지?”
“독설신선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상계 무인이 있을까?”
“독설신선?”
“자네 별호일세.”
“풋!”
조익경의 말에 소빈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
조익경의 시선이 소빈에게 갔다.
“예쁘게 웃는 미인을 그렇게 노려볼 필요는 없지 않나?”
조익경의 시선이 다시 시우에게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자네가 강하다는 뜻이겠지?”
조익경의 시선은 다시금 소빈에게 갔다.
“그렇지 않다면, 방금 그 미소가 삶의 마지막 웃음이었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자신하는 거 치곤, 꽤 추한데?”
“…….”
시우의 시선이 노인들에게 향했다.
“노인네부터 어린애들까지 남김없이 끌고 온 거 같은데. 노약자 보호 같은 기본 정신도 없는 건가?”
“자네 덕분에 온 집안 사람들 모두가 분노해서 말이야. 두고 오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네.”
“후후, 지겹군….”
시우의 말에 조익경이 물었다.
“뭐가 지겹다는 말이지?”
“나에게 덤벼든 이들 중에 스스로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
“…….”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말이야.”
“자네는 가만히 있었는데, 문주님이 죽어가고, 대제자가 폐인이 되었단 말인가?”
“그렇지. 나한테 죄가 있다면, 그저 덤벼든 이들보다 강했다는 것뿐이겠지.”
“오만하군.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거늘.”
시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양손이 겹쳐지고 양 끝으로 펼쳐졌다.
그의 손에선 다양한 색상의 마법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화산의 무인들은 일순 긴장하며 모두 검을 빼 들었다.
채채채채챙!
수백에 달하는 인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내는 소리에 귀가 찢어질 듯 했다.
“혹시 점창의 소식에 대해선 들었나?”
“…….”
조익경은 대답 대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표정을 보아하니 들었나 보군. 그들 또한 자신의 힘을 절대적으로 맹신하고 있었지.”
“우린 점창과는 다르네.”
“아니, 내 생각에는 그들과 다르지 않아.”
시우의 양손에서 마법진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공간에 스며들었다.
“그들도 이런 인적이 드문 곳에서 수로 밀어붙이면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이길 거라 자신했지.”
드드드드드드드드
시우의 말을 끝으로 지축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땅들이 갈라지며, 붉은 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늘에선 먹구름이 몰려오며 태양을 가리고 사방을 어둠에 잠식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 지옥에 떨어졌다.”
시우의 손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의 손에서 두 개의 커다란 마법진이 피어올랐다.
[소환][아크 데몬]
바닥에 새겨진 음울한 기운의 거대한 마법진은 검은빛과 붉은 연기를 뿜으며 천천히 움직였고, 그 안에서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크아아아아악!
거대한 몸체, 뿔이 달린 흉측한 외모,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과 파괴적으로 보이는 힘줄까지.
아득히 솟아오르는 거대한 몸체에 그 전체를 보기 위해선 까마득히 고개를 들어야 했다.
크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렇게 거대한 존재가 하나도 아닌 둘이라는 점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화산파의 무인들은 자신들의 손에 검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코앞에서 아크 데몬을 보는 이들부터.
저 멀리서 아크 데몬을 보는 이들까지.
아크 데몬의 존재감에 공포에 절어 생각이 마비된 자들은 움짝달싹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오줌을 지리기 바빴다.
거대한 몸체와 달리 인간의 공포심을 맡는 민감한 후각을 가진 아크 데몬은 그런 인간을 그냥 두지 않았다.
휘익! 퍼퍽!
공성추처럼 내히꽂히는 주먹 한 방에 땅이 파이고, 그곳에 있던 무인 수 명이 고기 완자가 되었다.
아크 데몬은 자신의 손에 붙은 인간의 살점들을 떼어먹으며 다음 사냥감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탁탁탁탁탁탁탁.
그때, 한 사내가 겁 없이 아크 데몬을 향해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후각이 예민한 아크 데몬은 겁 없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사내를 향해 피어를 흩뿌렸다.
크아아아아악!
주변의 어린 무인들이 아크 데몬의 피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피를 토함에도 사내는 땅을 박차고 한 마리의 매처럼 솟아올라 아크 데몬과 두 눈을 마주쳤다.
[화산신검][매화난무]
조익경의 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뽑혀 나왔다가 검집으로 복귀했다.
그의 신형은 중력을 따라 땅으로 되돌아 왔고, 그와 동시에 아크 데몬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아악!
아크 데몬의 네 개의 뿔이 잘려나가며 조익경의 발치로 떨어졌다.
“믿기지 않는 군 이런 미물 따위에 점창이 당했다니.”
그가 뿔을 툭툭 차며 이야기했다.
크아아아아아악!
그때, 다른 아크 데몬이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한쪽에 모여 있던 화산의 노인들이 아크 데몬의 몸을 짓밟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독설보다는 허풍이 더 심한 것 같군. 진짜 점창을 상대한 힘은 뭐였지?”
조익경의 비아냥에 시우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