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산시성 화인시에 위치한 거대한 산은 중원 오악 중 하나로 손꼽히며 접근이 어려운 것으로 유명했다.
가파른 경사와 불친절한 산세는 노련한 등산가들도 혀를 내두르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산에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는 이유는 이곳이 바로 상계 최고의 세력을 자랑하는 화산파가 존재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화산의 서쪽에 위치한 연화봉 정상에 터를 잡은 화산파는 야토가미의 중국 상계 침략에 맞서 최일선에서 싸우던 저항세력이었다.
100년 전 천하제일검이자 화산파 사상 최고 고수인 화검 조준형을 필두로 화산의 장로전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은거기인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오며 사분오열되어 있던 중국 상계의 힘을 하나로 모았고, 야토가미에 필사적인 저항을 했다.
종전 이후엔 정·사·마를 초월하는 대(對) 야토가미 기구인 강호맹을 창설을 주도한 것도 화산파와 화검 조준형이었다.
그런 과거의 업적을 존중하여 중국 상계와 강호맹에서도 화산파의 일이라면 언제나 한번 접어주는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화산파는 종전 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세를 넓혀갔다.
연화봉 정상에 심어진 매화나무 위에 한 인영이 새처럼 가볍게 나뭇가지 위에 서 있었다.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는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날아들던 새들도 인영의 존재의 이질감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인영은 연화봉 아래로 보이는 풍경들을 찬찬히 살폈다.
연화봉 정상에서만 터를 일궜던 화산파는 어느새 연화봉 전체를 다 사용하지 않으면 부족할 만큼 커다란 성장세를 보였다.
애당초 그의 계획이었던, 화산신검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폐관동에서 죽겠다는 그의 다짐에 선조와 선배들이 우려를 표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화산 최고 절학인 화산신검을 익히기 위해선 천고의 재질과 초인적인 인내력, 하늘의 선택이라는 세 가지를 모두 얻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준형이 말년에 자신의 심득을 모아 남긴 이 무공서는 그의 뜻에 따라 화산의 제자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게 했지만, 그 난해하고 어려운 그의 심득을 얻으려던 수많은 화산의 기재들이 모두 주화입마에 빠져 죽거나 망가져 버리기 일쑤였기에 더 이상 그의 심득을 익히려는 자가 없었다.
그런 무공을 익히겠다는 각오로 들어갔던 폐관동에서 조익경은 아버지가 천하제일검에 올랐던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폐관동을 박차고 나왔다.
아무도 그의 경지를 확인하거나 본 이는 없었으나, 그가 한번 들어가면 인력으로는 나올 수 없는 폐관동을 직접 부수고 나왔다는 것으로 그의 무공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화산은 그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다.
대제자의 직위를 잃었지만, 그가 대제자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고, 문주인 진문형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사숙님.”
홍안의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기다리시던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
조익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신형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타고 천천히 위아래로 휘청이며 가볍게 움직일 뿐이었다.
“사조님들을 비롯해 장로전에서도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홍안의 소년 또한 말과 함께 다짐한 듯 검을 꽉 움켜쥐었다.
“육합신검은 경쾌함과 단호함이 생명이다.”
조익경의 말에 소년이 그를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그는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이 서 있었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 선명하게 들렸다.
“쾌(快)란 단순하게 빠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단(斷)이란 그저 강하게 내려치는 것이 아니다. 쾌는 속도보다 정확함을 더욱 중요시하고 단은 무거움보다 가벼움을 더욱 중요시한다. 하지만 그리 강하게 검을 쥐고선 빠르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은 껍데기에 불과한 검법을 구사하게 될 것이다.”
조익경의 말에 홍안의 소년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무거운 다짐을 하는 것은 중하나, 몸까지 무거워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언제나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려무나.”
“아, 알겠습니다.”
화산 오악이라 불릴 만큼 산세가 험했고, 육로가 발달하지 않아 문파를 유지하는 것 자체에 수없이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불편함을 감수하고 낭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세를 입증하는 것이듯, 화산은 단 한순간도 연화봉을 떠날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세는 이토록 커졌었다.
하지만, 현재의 화산파가 사용하는 건물들 대부분은 불이 꺼져있었다.
이곳저곳 시설들이 부서지기 시작했고, 망가진 곳도 나왔지만 고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몸을 의탁하던 인사들은 하나둘 자신의 자취를 감추고, 속가제자들은 은근슬쩍 화산의 전화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화산은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
나무 끝에 선 인영은 작게 읊조리며 재건될 화산의 영광을 눈에 그리듯 연화봉 아래의 풍경들을 눈에 새기고 또 새겼다.
“헉헉….”
홍안의 소년은 연화봉 끝에 다다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일 초가 급한 소식이었기에 매화보를 전력으로 펼치며 이곳까지 나는 듯 달려왔지만, 그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후우….”
매화나무 아래에서 숨을 몰아쉰 소년은 고개를 들어 나무 끝에 선 인영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전설이 된 화검 조준형의 후예.
천하제일검이던 조준형이 말년에 얻은 자식이자, 그가 남긴, 현존 화산 최강 절학인 화산신검의 주인이었다.
천재의 후예가 대부분 그렇듯 아버지의 커다란 그늘에 삼켜질 것 같았던 그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폐관동을 박차고 나왔다.
말을 마친 조익경은 다시금 연화봉을 천천히 훑었다.
그의 시선은 그의 별호처럼 화산을 내려다보는 한 마리의 매와 같았다.
시우 일행이 탑승한 미니버스는 비양현을 지나 산시성에 들어섰다.
큰 전투 이후에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누구도 먼저 쉬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기름을 넣고, 과자와 인스턴트 식품으로 배를 채운 뒤에 차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우가 읊조리듯 말했다.
“할 말이 있는 표정이군.”
시우를 바라보던 형원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
“지금 이야기할 게 아니면, 평생 이야기하지 마라.”
시우는 여전히 읊조리듯 이야기했다.
형원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을 때. 시우의 뒷자리에 앉아 있던 소빈과 눈이 마주쳤다.
소빈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그제야 형원은 용기가 났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정체가 뭔가요?”
“그게 진짜 궁금한가?”
“……아, 아니. …네.”
“네게 진짜 중요한 걸 물어보지 그래?”
“…뭐, 뭔가요. 그게?”
형원은 시우에게 어떤 말을 물어야 할지조차 잘 몰랐다.
처음엔 못 미더웠고, 지금도 완전히 믿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도박을 선택한 것은 출구 없는 무저갱에 갇힌 인생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스스로는 끝낼 수 없는 두려움.
누이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어쩌면, 회피에 가까운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시우를 핑계로 한다면, 어떤 결과든 스스로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주 미약한 확률이지만 성공한다면 좋겠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그를 저주하며 죽으면 그만이니까.
그랬기에 형원이 지금 맞닥뜨린 상황은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과연 자신이 도박사와 내기를 하는 것인지, 지옥의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너와 너의 동생을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야.”
“….”
형원은 시우의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시우는 그런 형원을 보며 피식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
내가 악마인 거 같나?”
시우의 말에 움찔한 형원이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형원의 두 눈동자엔 공포가 가득했다.
“아닌가요?”
시우는 이 세계에 지옥을 소환했다.
수백의 인원, 일개 평범한 이들이 아닌 상계의 무인들이 속절없이 죽어 갔다.
전투나 싸움 독에 의한 인살이 아닌 악마에게 압사당하고 사지가 찢기고 잔인하게 씹히며 죽었다.
불교의 저승관을 믿고 있던 형원에게도 현실에 구현된 지옥은 더욱 참혹했다.
몇십 시간이나 지났지만, 코끝에 혈향이 맺혀 있는 듯하다.
눈을 감으면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뜨끈한 액체가 비처럼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악마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나?”
“….”
“인간들이 착각하는 게 있지.”
시우가 지그시 형원을 바라보았다.
“악마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아. 악마에게 인간은 개미와 사슴과 다를 바 없는 존재야.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잔인하게 찢어발기고 죽인다 해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 그들은 애초에 그런 존재들이니까.”
“….”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전적 의미의 악마는 실제 악마와 가장 먼 존재들이야. 그들은 그저 다른 종족 그런 존재로 태어났지. 그런 의미에서 천사와 악마가 종이 한 장 차이가 나는 것처럼.”
“…그럼 악마라는 단어는 왜 존재하나요?”
“인간들이 정의한 사전적 의미의 악마에 가장 가까운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야. 자신의 이익과 개인의 감정을 위해 자신과 똑같은 인간에게 큰 고통을 주지.”
형원은 시우의 이야기에 답할 수 없었다.
“욕심을 위해 같은 동족을 괴롭히고 해할 수 있는 건 인간밖에 없어.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라든가, 가족이 위협을 느껴서라는 이유 없이 동족을 이용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하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넌 눈앞에 악마보다 강호맹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 거지. 내 말이 틀렸나?”
“…….”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라. 가장 아름다운 자가 가장 추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가장 추한 자가 가장 성스러운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
형원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시우가 형원을 보며 말을 곁들였다.
“만약 가장 두려운 악마가 네 편이 되어 준다면 그것만큼 든든한 게 또 없지 않겠냐?”
“…네?”
시우의 말에 당황하던 형원은 이내 웃음을 짓고 있는 시우와 소빈을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에 동화되어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펑!
그때, 미니버스가 크게 출렁거리며 좌우로 흔들렸다.
시우는 곧장 손안에 마법진을 소환하여 당장이라도 문밖으로 튀어 나갈 기세였다.
“공격인가!”
“아, 아닙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박철호가 시우를 말렸다.
“타이어가 터진 겁니다. 타이어가.”
“….”
“….”
“…잠시 쉬어 갈까?”
타이어를 교체할 동안 인근에서 쉬고 있던 형원은 작게 울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런 꽃향기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소빈이었다.
그녀는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물 하나를 형원에게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본 시우 님은 악마도 악당도 아닙니다. 조금 성격이 괴팍하시긴 하지만 그 어떤 분보다도 따뜻하게 주위 사람들을 돌보시는 분이에요.”
소빈이 타이어를 갈고 있는 박철호와 김철진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시우를 보며 말했다.
“….”
형원은 그녀의 눈빛에서 뜨거운 감정을 처음 읽으며 덜컥 마음 한켠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저, 혹시…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형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빈은 천천히 그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뭐가 궁금하신가요?”
“혹시 소빈 님은….”
띠리리리리리.
형원은 자신의 중요한 질문을 방해한 벨소리에 짜증을 내다가 벨소리의 정체를 깨닫고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품 안에서 작은 휴대폰을 꺼냈다.
“여, 여보세요?”
-오라버니! 어, 어떡하죠? 이상한 사람들이….
“여보세요! 란아! 형란아!”
형원은 당황스런 눈빛으로 소빈을 바라보았다.
소빈은 당황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 님께 바로 말씀드려요.”
두 사람이 동시에 나는 듯 시우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이야기를 듣던 시우는 예상과는 달리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첩첩산중이군.”
“시우 님, 먼저 신의 님의 여동생을 구하러 가시는 게 어떨까요? 그 자취를 놓치면 더욱 찾기 힘들 껍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지금 문제는 우리야.”
“네?”
시우가 한 걸음 나서며 주변을 보며 말했다.
“사방에 무인투성이야. 진짜 징글징글하게도 많은 숫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