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추씨 가문은 대대로 비양현의 대지주였다.
까마득한 옛날 선조 중 한 사람이 막대한 부를 일궜고, 그 돈으로 땅을 사들이며 추씨 가문은 대대로 비양현을 지배하는 가문으로 살았다.
부는 대가 이어져 내려왔지만, 그 부를 만드는 능력은 이어지지 않아. 대대로 선조가 일궈 놓은 후대가 탕진하는 형태로 가문이 이어져 내려왔고, 현재에 와선 다 낡은 호텔 하나만을 남았다.
호텔의 주인이자 지배인인 추광석은 언제든 낡은 호텔을 팔아넘기고 지긋지긋한 이 시골을 떠나 화려한 도시의 생활을 꿈꿨다.
하지만 도시와 멀리 떨어져 유동 인구 하나 없는 곳에 덜렁 있는 낡은 호텔을 사겠다는 이는 없었다.
영업을 하는 둥 마는 둥 술로 하루하루를 지내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막대한 금액으로 호텔을 사겠다고 한 것.
더구나 대금을 미루는 것이 아닌 현금으로 즉시 결제.
추광석은 다시 없을 기회에 재빨리 승낙하려 했지만, 뒤이어 따라붙는 조건에 몸이 얼어붙었다.
조건은 지난밤 찾아온 불청객들에게 약을 먹이는 것.
의도가 불순하고 행동이 의심스러웠지만, 좋은 기회를 놓칠 만큼 추광석은 바보가 아니었다.
정체도 모르는 외부인 따위야 어떻게 되건 자신의 인생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그 선택은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후에 엄청난 후회로 다가왔다.
“대체 이게….”
커다란 파괴음과 찢어지는 비명소리에 호텔 밖으로 나간 추광석은 지옥을 보고 말았다.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고 변화 없는 비양현에는 피의 비가 내리고, 사방에선 불길이 치솟아 올랐으며, 시체가 산을 쌓고 있었다.
그중 가장 추광석을 놀라게 한 것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끔찍하고 거대한 모습의 ‘그것’이었다.
“아, 악마??”
“정답!”
추광석은 자신의 의문에 답하는 존재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 들어왔던 불청객 중 한 사람이었다.
“저기 저 악마가 보이시나요?”
김준상의 팀원인 이승훈은 추광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 맹주님이 부리시는 겁니다.”
“매, 맹주??”
“그 젊은 분 기억하시죠? 이마에 상처가 있는.”
“…….”
“아무튼 우리 맹주님께서 아침을 아주 맛있게 드셨다고, 어떤 첨가물을 넣은 건지 궁금해하시네요?”
“네? 아, 아니. 저, 전 아무것도… 너, 넣지 않…았….”
“아아! 금방 까먹으셨을 수도 있는데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군대 있을 때 반인륜적인 기술을 배워 놓은 게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거든요. 자. 들어가시죠.”
“아…. 아…!!”
추광석은 절망적인 상황에 다리가 풀려 제대로 걷지 못하고 이승훈의 손길에 질질 끌려 들어갈 뿐이었다.
쾅! 쾅! 쾅! 쾅!
마치 아이가 장난을 치는 모습이었다.
발밑을 오가는 개미를 밟아 죽이려는 것처럼 아무런 긴장감이 없었다.
위기에 몰린 개미도 아이를 물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는 발을 멈추지 않는다. 개미의 공격이란 아이에게 조그마한 생채기도 내지 못할 만큼 미약했기 때문에.
그렇게 악마가 발을 구를 때마다 무인들이 고깃덩어리로 변하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검진도 검법도 모두 무용했다.
바위를 자르는 검기도 악마의 피부를 뚫지 못했다.
철을 종이처럼 자르는 검강의 고수들은 악마에게 다가갈 때마다 시우가 쏘는 마법을 방어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어갔다.
악마들은 모산파의 도사들을 한 줌의 과자를 털어 넘기는 것처럼 삼켜버렸으며, 그 도사들을 구하려던 무인들이 먼지처럼 털려 나갔다.
팔 하나를 잃은 채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정산명이 입술을 부들거리며 말했다.
“애초에… 애초에… 우리에겐 승산이 없었구나.”
시우가 손을 툭툭 털면서 정산명을 향해 다가왔다.
“그걸 진즉에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지?”
“왜, 왜… 네 힘을 제대로 보이지 않은 거지?”
정산명의 눈에 힘이 점점 빠지며 물었고, 시우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몇 번이나 보여줬지만, 너희 스스로 믿지 않았잖아. 지금도 마찬가지고.”
시우의 말에 정산명의 눈에 잠깐이지만 힘이 돌아왔다.
“무, 무슨 소리냐?”
“여전히 강호맹은 내 힘을 믿지 않는다는 거야. 내 힘을 정확하게 파악했으면 너 같은 희생양을 만들었겠어?”
“희, 희생양?”
정산명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점창의 미래라 불리는 뛰어난 후기지수들과 점창을 떠받치는 고수들이 모두 죽어 나갔다.
살아있는 이들이 몇몇 보이지만, 이미 불구가 되거나 상처가 중해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뭔가 손을 써볼 상황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인식을 할 수 있기 전투가 길었다면 생존자를 남겨 볼 생각이라도 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짧은 시간 안에 전투가 끝나 버렸다.
그런데 희생양이라니.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가 희생양이라고?”
“누가 당신에게 명령을 내렸는지는 몰라도. 당신들은 나를 상대하기 위해 전력을 다 쏟아 부었어야 해. 그런데 아직도 내 힘을 가늠하기 위해 찔끔 찔끔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저렇게 지켜보고만 있지.”
시우가 한쪽을 가리켰다.
텅빈 도시엔 인적이라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시자가 있단 말이냐?”
“그 망가진 단전으론 파악하기 힘들겠군.”
“맹이 우릴 희생양으로 삼은 거라고?!”
“아마도 최후의 전투를 위한 탐색전이겠지? 이런 식의 차륜전은 너희 전력만을 계속 깎아 먹게 될 거야.”
“마, 말도 안돼… 맹이… 맹이….”
시우가 멍해진 정산명의 머리를 부여 잡으며 말했다.
“잘 봐. 이게 현실이야. 잘난 네놈은 맹에게 이용당하고 자 파의 무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맹에게 연명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뿐이야. 이걸로 점창의 명맥도 끝이겠지.”
“크허헉!”
시우의 이야기를 듣던 정산명의 얼굴이 시꺼멓게 변하더니 울컥 핏물을 쏟아냈다.
정산명은 지금 시우에게 모든 무인들이 당했다는 사실보다 무림맹에 이용 당했다는 사실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비, 빌어먹을… 장송계….”
정산명의 입에서 장송계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시우가 혀를 찼다.
“다 끝난 후에야 화를 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크, 원통하다….”
“뭐가 원통하지?”
“패자의 설움이란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구나.”
정산명의 말에 시우가 피식 웃었다.
“웃기는군. 평생 우월하게 패자를 밟아 와놓고, 이제 와서 양육강식의 세계가 원통하다고? 네놈한테 당한 인간들이 비웃겠군.”
시우의 말을 듣던 정산명은 마지막 분노까지도 끝내 잡지 못하고 놓아 버렸다.
“그런가? 난 그저 더 강한 이에게 먹히는 먹이일 뿐인가.”
“걱정 마라. 네놈의 친구들은 곧 네놈을 따라 갈 테니까.”
시우의 말에 정산명이 스르륵 두 눈을 감았다.
“그건 좀 웃긴 말이군.”
시우의 손에서 푸른 강기가 솟아 나왔다.
“먼저 쉰다고 생각하라고.”
스윽.
시우의 손이 가볍게 휘둘러지고, 작은 절삭음과 함께, 정산명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안 돼!”
“문주님!”
전장터 이곳저곳에서 정산명의 죽음을 지켜보던 무인들이 절규하며 쏟아져 나왔다.
“네 이놈! 네놈이 사람이라면 어찌 이리 잔혹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이냐!”
점창의 무인이 핏발 선 눈동자로 시우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고, 그 모습을 보던 시우가 건조하게 말했다.
“검을 든 순간. 힘을 이용하여 누군가의 위에 선 순간. 선함과 잔혹함 따윈 없는 거다. 네놈들이 그걸 원했다면 인간의 법 테두리 안에 있었어야지. 인간을 초월한 힘 따위에 매달린 이유가 뭐였지? 결국 그 힘을 이용해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아,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네놈처럼….”
“네놈이 스스로 선하다고 믿는 것은 네놈의 힘에 상대가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네놈이 자비를 베풀었다 생각하는 거지. 누구든 타인의 지배를 받고선 좋아하는 이들은 없다. 너희들은 자신들 무리의 힘으로 나를 지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이건 그 대가일 뿐이다.”
“네놈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시우가 지겹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아크 데몬이 손을 뻗어 시우와 말싸움을 하던 점창의 무인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 네놈들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리 악독하진 않았을 거야.”
시우가 돌아선 곳에선 형원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원의 몸은 사시나무 이파리가 떨리듯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점창이 당했소.”
장송계의 말에 이제는 몇 남지 않은 존자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허….”
“아미타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혁련무궁이 피식 비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그래, 원하던 것은 얻었나?”
혁련무궁의 말에 장송계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것이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 점창을 보낸 것은 뭔갈 알아보기 위한 것 아니었나?”
장송계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쳤다.
“애초에 먼저 나서겠다 한 것은 정 문주의 의견이었소!”
“그걸 말리지 않은 것은 맹주엔 자네 책임이지.”
“말 다 하시었소? 애초에 연맹의 의견 따윈 상관없이 제 멋대로 행동하는 이가 누구였는지 묻고 싶구려.”
혁련무궁이 키득 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위선은 그만 떨라는 거다. 도사 나부랭이.”
장송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구나. 마교 교주.”
“앉아서 잔대가리나 굴리는 네가 뭘 할 수 있지?”
혁련 무궁도 참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두 사람 사이에 명진이 끼어들며 사자후를 내뱉었다.
사자후의 음공에 내기를 끌어 올리던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만들 하시지요. 어떻게 보아도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명진의 말에 혁련무궁이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 앉았다.
“최시우가 네놈을 살렸다 도사.”
혁련무궁이 자리에 앉아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자 명진이 장송계를 채근했다.
“맹주!”
그제야 장송계도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첩보를 보냈던 인원들 모두 복귀하지 못했소. 점창과 최시우 사이에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소. 이에 더 이상의 시간을 끄는 행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오.”
“어쩔 생각이오?”
명진의 물음에 장송계가 혁련무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이상의 탐색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소. 이제는 한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하오.”
“혀가 길다. 시간 끌지 말고 이야기해라.”
혁련무궁이 귀를 파며 얘기하자 장송계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퍽!
검기를 이용해 청강석을 깎아 만든 탁자에 주먹이 파고 들어갔다.
“우리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 최시우를 상대하는 것이오.”
“훗. 겨우 생각한 다는 것이 그것이더냐?”
“마교 교주는 잘 들으시오. 당신이 한 말을 책임져야 할 거니까. 난 이번 일에 강호맹의 맹도 뿐 아니라. 각 파의 모든 무인들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뭐?”
장송계의 말에 혁련무궁의 이맛살이 찡그려졌다.
“더 이상 계략과 모략은 없소. 우린 전력을 다해 최시우를 상대할 거요.”
장송계의 말에 처음으로 혁련무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