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허어….”
전투가 끝난 후. 피가 흐르는 검을 쥐고 있는 남궁청은 충격에 말을 잊었다.
세가 내에서도 나름 알아주는 실력을 지녔고, 맹에서 활동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일개 단주 급 정도는 된다고 자신하던 그였기에 서너 명의 무인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근 삼백에 달하는 인원을 다 상대하기 위해선 내공이 남아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보단 잠은 잘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압도적인 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제일 좋은 방법은 진을 사용하는 것이다.
공방이 일체를 이룬 진은 내공과 체력의 소모를 줄인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기계가 아닌 인간인 이상 장기화되는 전투에서 정신적 신체적 피로가 쌓이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시우 일행이 진도 이루지 않고 각개전투를 벌일 때만 해도 남궁청은 이곳에 뼈를 묻을 각오까지 했었다.
하지만 세 명의 무인을 처리하고 다음 무인을 상대하려는 찰나 고개를 들었을 때 확연하게 줄은 무인의 숫자를 확인할 수 있었고, 다섯 명의 무인을 상대하고 다음 무인을 찾으려 고개를 돌렸을 때, 지상에 남아 있는 무인은 없었다.
“이, 이게 대체….”
충격에 빠져 있는 남궁청의 옆으로 정현민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숙부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남궁청의 질문에 정현민은 쓰러진 무인 사이를 돌아다니며 공마인 마법을 시전하는 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차 적응될 게다.”
정현민의 대답은 남궁청의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 * *
내비게이션은 도로를 벗어나 숲길로 안내했다.
인적이 드문 지역엔 인가나 편의시설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땅도 없었고, 일대의 모든 산과 들은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태초의 상태로 보존되었다.
오직 깨끗한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만이 이곳에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도로를 타고 숲을 오르자 이윽고 거대한 크기의 연구단지가 나타났다.
최신의 건축 공법으로 만든 듯 연구소는 자연 친화적이었고, 화려한 모습이었다.
“인적이 없군요.”
연구소를 둘러보는 김준상의 짧은 감상이었다.
연구소엔 주거 시설과 연구 시설을 겸용하는 듯 거대한 규모로 지어져 있었고, 주차장 또한 경기장 수준으로 큰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 지어진 연구소엔 아직 사람이 입주하지 않은 듯 인적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준상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저흰 주위를 둘러보겠습니다.”
“그냥 내가 해도 돼.”
시우가 패밀리어 몇 마리를 소환하여 날렸다.
하지만 김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최소한의 경계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흰 밖에서 동태를 살피고 있겠습니다.”
“그래.”
김준상의 팀을 제외한 인원들이 가장 큰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소의 대부분 시설은 보안 장치가 걸려 있었음에도, 아무런 검사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급하게 나갔나 보네.”
휴게 시설을 지나던 시우가 설거지가 되어 있지 않은 씽크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빈이 걱정스레 말했다.
“생사신의까지 빼돌린 건 아닐까요?”
시우는 별 반응 없이 담담히 말했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시우의 시야에 초조한 표정의 우빈이 보였다.
“걱정마.”
“걱정은 무슨….”
연구소의 규모는 어지간한 국가 단위 급에 필적하는 광대한 수준의 설비를 갖추고 있었고, 주로 인간 내부의 신체에 관한 연구를 하는 듯 보였다.
연구소 중간중간 창 너머로는 해부되어 폼알데하이드 안에 갇힌 시체들이 즐비했다.
“대체 이곳은….”
소빈은 시체들을 보면서 말문을 잃었다.
그녀도 개구리나 일반 동물에 대한 보존된 시체들은 본 적 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타락시키는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한국 상계에서도 이 정도 하나요?”
시우가 태백정가의 연구소를 맡은 정현민에게 물었다.
“…못하네. 이건 인륜에 벗어난 행위야.”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소빈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 설마 강호맹에서 이렇게까지….”
남궁청도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힘에 대학 욕망이 인간에 대한 도덕을 뛰어넘을 때, 목적이 과정을 정당화할 때 인간은 못 할 일이 없죠.”
시우 일행은 말없이 연구소 내부를 걷기 시작했다.
연구소 중심에 다다르자 처음으로 연구소 내부에 사람이 보였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들어간 듯 어린 티를 벗어내지 못한 소년은 연구원들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소년은 홀로 남은 연구소 내부에서 컴퓨터 기판을 만지며 작업을 하는 듯 보였다.
시우 일행이 다가가자 소년이 돌아서며 시우 일행을 보았다.
“꼬마야 이곳엔 너뿐이니?”
시우가 말하자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맹에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라고요?”
“그래. 우리가 무슨 목적으로 온 지는 알고 있지?”
“네. 이미 들었어요.”
시우가 주위를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겠구나.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지?”
소년이 담담히 답했다.
“일주일 전에 맹에서 모두 철수했어요. 어디로 간지는 모릅니다.”
시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역시 약속을 어긴 건가?”
시우가 자조적으로 이야기하자 우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넌 왜 남아 있는 거니?”
“저를 만나러 오신 거 아닌가요?”
“뭐?”
“맹에서 저를 만나러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네가 생사신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여러분들이 찾으시는 생사신의입니다.”
소년의 말에 시우 일행은 모두 깜짝 놀랐다.
“난 장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시우가 담담이 말했다.
“특히나 나를 기만하려는 상대는 애든 여자든 가리지 않아.”
생사신의라 밝힌 소년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한연맹의 맹주는 약관이 되기 전에 절대 무경에 올라 바람과 구름을 지배하고, 하늘과 땅을 구분 없이 걸으며, 불과 물을 생성한다고 들었습니다. 겨우 단전을 치료할 뿐인 제가 그리 대단한가요?”
생사신의의 말에 시우가 피식 웃었다.
“산골에서 지내는 것 치고는 정보가 밝네.”
“아뇨, 맹에선 한연맹의 맹주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자를 만들어 내라고 주문을 했거든요.”
“성공했나?”
생사신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해부라도 해보면 모를까 어떤 힘인지 감도 못 잡았어요.”
“그럼 앞으로도 성공할 일은 없겠네.”
“그런가요?”
“왜 의문인지 모르겠네.”
생사신의는 허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호맹과 중국 상계의 진짜 힘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숱한 인물들이 상계를 지배하거나 제거하려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었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런 거대한 힘에 비하면 한연맹의 맹주라도 대응하긴 힘들 거예요.”
“지금 네가 말하는 한연맹의 맹주가 나라는 건 알고 있는 거니?”
“네.”
시우의 손에서 작은 불꽃이 일렁였다.
팟!
펑!
시우가 손을 휘두르자 시우의 손에서 발사된 불꽃이 연구소 내부의 기자재들을 폭발시켰다.
“그럼 말을 조심히 해야지. 내 성격이 그지같다는 소리는 못 들었나 보지?”
“어떤 파괴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저항해본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소년의 말에 시우는 손가락을 튕겼고, 화르륵 타오르던 불꽃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연구소 내부의 공조 시스템이 탄내를 순식간에 제거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우리가 온 목적은 알고 있겠지?”
“네. 태백정가의 정우빈이란 분의 단전을 고치러 오신 거죠?”
“맞아. 바로 할 수 있지?”
시우의 말에 생사신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생사신의의 단호함에 우빈이 물었다.
“왜…?”
“죄송한 말씀이지만, 맹의 허락 없이 아무나 단전을 고쳐 줄 수 없어요.”
소년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우리가 온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네. 하지만 오시는 것과 맹의 허락을 받는 것은 다른 이야기예요. 맹에선 한국에서 오는 이들 그 누구도 단전을 고쳐주지 말라 했어요.”
“하하…. 하하….”
맹의 말장난에 시우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제 보니 강호맹이 말장난을 좋아하네. 장난치는 걸 좋아해. 음….”
시우는 그렇게 고민하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래, 뭐 어차피 안 고쳐준다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너 잠깐 이리 와봐라.”
시우가 손을 치켜들자 생사신의의 몸이 붕 떠올라 시우에게 끌려왔다.
“뭐, 뭐 하는 거죠?”
“혹시 이야기는 들었니? 내가 정신과 기억조작 쪽으로도 꽤 실력이 있는 편이거든. 굳이 네 도움 없이도 방법은 알아낼 수 있다는 소리지. 뭐 조금 부작용이 생겨서 실어인이 되거나 바보가 될 수도 있지만, 그거야 뭐 내 알 바 아니고.”
“히익!”
세상을 달관한 듯 보이던 생사신의의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감돌기 시작했다.
시우의 손에서 뻗어 나간 검은 촉수들이 생사신의의 몸을 고정하고 그를 허공에 눕혔다.
마치 수술대 위에 올라온 듯 허공엔 커다란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생사신의의 온몸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그런 부작용이라면 받을 수 없어요!”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그런 억울함이라면 강호맹에 이야기해.”
“아, 안돼요! 전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고요!”
“그것도 강호맹에 이야기하면 되겠네. 강호맹이 다 알아서 해 줄 거 아냐?”
시우의 손에서 마법진이 나타나 검은빛을 쏘기 시작했다.
검은빛이 서서히 생사신의의 머리 쪽으로 향하자 생사신의가 절박하게 외쳤다.
“저도 강호맹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쓸모없어 지면 제 누이가 죽을 거예요!”
생사신의가 절박하게 외쳤지만 시우는 혀를 찰 뿐이었다.
“쯧쯧, 안타깝네. 그런데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결국 시우의 검은 빛이 생사신의의 관자놀이에 닿자 생사신의는 온몸에 힘이 빠지며 시신경이 끌어 당겨지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야이! 악마야! 지옥에나 떨어져라!”
시우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마법을 시전하려는 그때. 소빈이 시우의 옷자락을 잡았다.
“잠깐만요. 시우 님. 이야기는 좀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
시우가 소빈을 보았다. 이어 우빈을 돌아보자 우빈도 고개를 젓고 있었다.
“다들 마음이 너무 좋다니까.”
시우가 손가락을 튕기자 생사신의의 온몸을 감고 있던 촉수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생사신의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악! 크…. 씨….”
“욕하지 마라. 욕도 다 배워서 알고 있다.”
시우가 서늘하게 이야기하자 생사신의가 치켜떴던 도끼눈을 내리깔았다.
“괜찮아요?”
소빈이 생사신의에게 다가가 그를 보며 말하자 생사신의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거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고, 고맙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이야기해 줄래요? 혹시 우리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생사신의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시우가 나서서 말했다.
“혹시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라면 제가 기억을 뽑아내서 들려드릴게요.”
시우가 다시금 손을 내밀자 생사신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희 집안은 대대로 강호맹이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습니다. 생사신의라는 명칭은 대대로 의술을 익힌 장자에게 명해지고, 새로운 계승자가 나타나면 전대의 계승자는 죽는 게 철칙입니다. 저희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모두 강호맹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생사신의의 이야기를 듣던 남궁청이 자신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他?的(젠장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