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시우는 한세아가 만들어준 기숙학원 영수증을 가지고 집과 학교에 통보한 후 중국행 준비를 마쳤다.
본래 약속은 시우와 우빈만이 동행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진문형으로 인해 파기된 탓에 시우 측은 더 많은 인원을 동행하기로 했다.
“중국 상계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 인원으로 가능하겠느냐?”
시우가 꾸린 팀원은 시우, 우빈, 소빈, 그리고 김준상의 이프리트 팀과 중국행을 안내할 정현민이 전부였다.
“이 정도 인원이 가장 좋습니다. 이 이상 더 많은 인원이 붙는다면 이동에 불편함이 생기고 한연맹 또한 보전해야 할 기본 전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번 행보에 가장 함께 하고 싶어 했던 두 사람. 한세아와 남궁혜자는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시우를 바라봤다.
한세아는 새롭게 지배하게 된 일본 상계의 지배권을 확대하느라 잠이 부족할 지경이었고, 남궁혜자는 시우가 비운 한연맹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우빈이의 단전만 고치면 크게 부딪칠 일이 없을 겁니다. 그리하면 올땐 갈 때 보다 훨씬 빨리 돌아올 수 있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우가 웃으며 얘기하자 남궁혜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위험해진다면 바로 연락하거라. 한연맹의 맹주를 건드리는 것은 한연맹을 건드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필시 명심하고.”
“알겠습니다.”
남궁혜자가 시우 옆에서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소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절대로 실력을 과신하지 말고, 항상 평정심을 잃지 말거라.”
남궁혜자의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던 소빈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 * *
시우 일행은 작은 미니버스를 타고 공항을 떠나 강호맹이 있는 중국 수도로 향했다.
공항에서 내리자 공항 관계자들과 맹의 관계자들이 먼저 나와 있었고, 시우 일행은 특급 귀빈 대우를 받으며 공항을 나올 수 있었다.
“네 덕분에 호강한다.”
맹에서 보내온 대형 리무진에 탑승한 우빈이 휘황찬란한 내부를 둘러 보며 말했고, 시우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호강? 아마 나랑 같이 이곳에 온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다.”
“무슨 소리야?”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그럼 뭐가 보이는데?”
“가령 이 음료수.”
시우가 샴페인 잔을 툭 치며 말했다.
“내공을 끌어 올리지 못하게 하는 산공독이 들어가 있어.”
푸욱!
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준상과 소빈도 입에 물고 있던 음료를 뱉어냈다.
“쯧쯧. 무인이라는 사람들이 이 정도 조심성이 없어서 원.”
시우는 마시던 음료를 계속 마셨다.
“너, 넌 괜찮은 거야?”
“내가 해독했어. 다른 분들도 해독 마법을 걸어 놨으니 걱정마세요.”
시우의 말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찝찝한 탓인지 소빈과 김준상은 마시던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차라리 이런 건 귀엽기라도 하지.”
시우는 선루프를 열어 선루프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패밀리어]
시우가 뻗은 손바닥에서 마법진이 생겨나며 마법진을 통해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중국 상공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끼익.
도로 위를 달리던 리무진이 급정거하고 사방의 리무진 문들이 열렸다.
소빈과 우빈이 검을 뽑으며 당장 나갈 태세를 했지만, 리무진 문 밖에는 이미 무인들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뭐하는 거지?”
시우가 리무진 밖의 무인들에게 말했다.
“손을 내려 주십시오.”
아직도 뻗어 나가고 있는 패밀리어를 보며 잔뜩 긴장한 무인이 말했다.
시우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난 강호맹에 초대를 받은 손님일 텐데. 강호맹은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나?”
“방금 뭘 한 건지 알려 주셔야 겠습니다.”
“그걸 알려줄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실력행사가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시우가 다시금 손을 썬루프 위로 뻗었다.
무인들이 대경실색하며 시우의 손을 자르려 몸을 던지는 순간.
시우의 손에서 초록색의 안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 삽시간의 무인들을 덮쳤다.
“흡!”
“이건!”
“모두 숨을 멈춰!”
무인들은 자신의 몸에서 내공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아연실색 했다.
[아이스 자벨린]
수십 개의 얼음 창이 나타나 검을 든 무인들의 목에 날카로운 창 끝을 겨누었다.
“계속해보겠나?”
맨 처음 시우에게 강하게 나왔던 무인의 입에서 신음성 같은 대답이 흘러 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 * *
강호맹의 최상층은 평소와 달리 모든 문이 열려 있는 상태였다.
이제는 사존이 된 4명의 수뇌부들은 자리에 서서 최시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강기 멈추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림과 함께 최시우 일행이 승강기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꿀꺽.
누군가의 목울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시우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그들은 이전에 알던 시우와 전혀 다른 기도가 뿜어나오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분명 마기가 넘실대던 자였는데.
그들의 전음은 시우의 인사로 멈추었다.
“다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송계가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받았다 그의 얼굴엔 인자한 미소가 가득했다.
“허허. 어서 오시오 최 맹주. 반년 사이에 많이 달라진 거 같소.”
“그걸 알아보기 위한 환영회치곤 조금 과격하셨습니다.”
시우가 표정을 차갑게 바꾸며 말하자 장송계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답했다.
“내 대신 사과드리리다. 아마 아랫것들이 지난 과거의 일을 잊지 못하고 한 일 같으니 용서해 주시오. 내부적으로 징계는 확실히 하겠소.”
“좋습니다. 단전을 고칠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뭐가 그리 급하시오. 이곳 맹에 며칠 묵으면서 아시아를 호령할 두 맹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도 좀 나누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장송계의 말에 시우도 입가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 된다면 싫어도 두 맹은 돈독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겠지요.”
시우의 말에 장송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역시 젊음이 좋소.”
장송계가 손짓하자 맹의 인원 하나가 사각형의 쟁반 위에 서류 봉투를 담아 다가왔다.
“현생의 화타라 불리는 생사신의가 있는 장소요. 보는 즉시 불태워 주시오.”
시우가 펼친 종이 안에는 중국 지도와 생사신의가 있는 위치 좌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한눈에 좌표를 모두 익힌 시우는 불꽃을 일으켜 지도를 태워 버렸다.
기의 이동 없이 갑작스레 나타나는 불꽃의 행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맹에서 차량과 사람을 준비했소.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라오.”
장송계가 말하자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차량은 사용하겠으나, 사람은 됐습니다. 괜히 큰 사건에 휘말려 무고한 생명을 낭비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흠흠… 크, 큰 사건이 뭐가 있겠소?”
“만약을 대비 하는 거지요. 강호맹의 무인이 저희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군요.”
연신 시우의 직설적인 이야기에 마음이 상한 장송계가 끝내 가면을 유지하지 못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크흠. 뭐 그렇게까지 이야기하겠다면 말리진 않겠소.”
“그럼 내일 출발 전에 뵙도록 하지요.”
시우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장송계 또한 시우를 향해 포권을 쥐었다.
시우 일행은 시우를 필두로 돌아서 회의장을 나갔다.
돌아가는 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명진 방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 *
“생사신의가 있는 곳은 이곳입니다.”
시우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시우가 내민 지도를 보던 정가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정현민의 말에 시우가 물었다.
“어째서 말입니까?”
“안후이 성의 옛 지명은 안휘네. 그리고 안휘성에는 남궁세가가 있다네.”
정현민의 말에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남궁세가를 섣불리 끌어들여선 안 됩니다. 그들이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성에 생사신의를 그대로 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남궁세가에도 미리 이야기해 두겠네.”
“알겠습니다. 내일 비행기 시간을 맞추려면 빠듯 할 테니 어서 주무시지요.”
시우가 회의를 파장시키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빈은 나가려다 말고 시우를 보며 물었다.
“나도 여기서 잘까?”
우빈의 말에 시우가 살기를 내뿜었다.
“죽을래?”
“아, 아니. 이렇게 큰데 다른 방에서 자면 되잖아.”
“꺼져, 남자하고 같은 방 쓰는 취미 없으니까.”
우빈이 시무룩하게 돌아서려는 찰나 다시금 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 고맙다.”
우빈의 말에 시우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은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이야기해.”
시우의 말에 우빈은 한 결 편안해진 얼굴로 방을 나섰다.
우빈이 방을 나서자 시우가 열린 베란다 창문을 향해 말했다.
“그만 나오시지요. 스님. 밤 공기가 찰 텐데.”
베란다 창문으로는 바람이 불어 커튼이 휘날릴 뿐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하실 말이 없으시면, 저도 그만 자러 들어갑니다.”
시우가 재차 이야기하자 아무도 없었던 베란다에 명진이 솟아 나왔다.
갑작스레 나타난 명진은 시우에게 정중이 합장을 했다.
“갑작스레 방문하여 미안합니다.”
“양상군자치고는 예의가 바르시군요.”
“시주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이리 예를 어겼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지요.”
“무엇이 궁금하시어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합장 자세를 하고 있던 명진이 고개를 들며 시우를 바라봤다.
“시주께선 마(魔)의 길을 걷는 분이 맞습니까?”
명진의 물음에 시우는 질문으로 답했다.
“그것이 왜 궁금하시지요?”
“일전에 본 시우 시주의 모습은 이전 극마에 이르렀던 마교 교주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 시주의 모습은 평생을 도만 닦아 온 도인의 모습이라 그렇습니다.”
시우는 다시금 물었다.
“제 질문은 그 질문의 답이 명진 스님과 소림사의 행동을 바꿀만하냐 이겁니다.”
“…….”
시우가 호텔에 놓인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 하나를 꺼내어 뚜껑을 따며 말했다.
“고대 중국 상계의 맹의 창설은 대부분 거대 적대 세력인 마교와 사파를 대응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현대에 와선 정사마의 구분이 사라지고, 오직 야토가미 하나에 대응하기 위해 정사마가 힘을 합쳐 맹을 창설했다고 했는데. 아닙니까?”
“…….”
“스님의 질문은 무용합니다. 저의 어떤 대답도 스님의 행동을 바꿀 수 없고, 스님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겠지요. 단지 스님의 질문은 자신의 마음속에 걸리는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까?”
시우의 말에 명진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제가 마의 길을 걷는 자이건, 도의 길을 걷는 자이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전 제 앞길을 막는 자들에게 마귀처럼 보일 거고, 함께 길을 걷는 자들에겐 도인처럼 보일 테니까요.”
“굳이 위악자 행세를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화로도 많은 일들을 충분히 풀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님의 말이야 말로 위선자들이나 할 이야기입니다. 대화로 풀어 간다는 건 서로간의 입장을 이해하고 양보하며 손해를 감내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강호맹은 강자로서 누구의 입장도 이해해 본 적 없고, 손해를 감수한 적도 없으니 강호맹이 말하는 대화는 명령의 다른 말일 뿐이겠지요. 지금의 사태가 이렇게 까지 번진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명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시우 시주께선 많은 피를 봐야 만족하시렵니까?”
명진의 말에 시우가 작게 웃었다.
“중국에 발을 딛자마자 산공독 공격을 받았습니다. 강호맹의 무인들은 작은 틈만으로도 우리 한연맹 사람들의 목을 노리려 했고, 지금도 아닌 밤중에 강호맹 최강의 고수가 숙소로 숨어들기도 했지요. 피를 보고자 하는 건 다름 아닌 강호맹이지요.”
“….”
시우가 다 마신 음료수병을 휙 하니 쓰레기통에 던졌다.
음료수병은 마치 깃털처럼 바람을 타고 천천히 날아가 쓰레기통 안에 들어갔다.
“강호맹은 자신들이 한연맹 보다 약자라는 걸 인정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 비이성적인 사고가 지금의 사태를 만든 거고요. 만약 명진 스님께서 비극을 막고 싶은 거라면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시우의 말에 명진이 기대된다는 듯 시우를 바라봤다.
“우리가 우빈의 단전을 고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으면 그뿐입니다.”
“….”
명진은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시우는 그런 명진을 보며 말했다.
“돌아가시지요. 밤이 깊었고, 전 내일 일찍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아미타불.”
명진은 그렇게 합장을 하곤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우는 베란다로 나가 도시를 밝히는 불빛을 보았다.
“아름다운 곳이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