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연우에게 일갈을 내뱉은 뒤로 연우가 다시 시우의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학교에선 아직도 민서와 연우가 함께 붙어 다니는 듯했고, 민서가 연우를 통해서 연예인들의 사인 씨디를 받아오는 등 했지만, 민서도 그 일로 토라졌는지 시우에게 보여주는 일은 없었다.
가끔 민서의 집에도 놀러 오긴 했지만 전처럼 행동하진 않았다.
그렇게 연우의 일은 차츰 시우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시우가 지혜에게 물었다.
하지만 답변은 연우에게서 돌아왔다.
“죄송해요. 가급적이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연우가 고개를 숙이자. 지혜가 연우를 한 팔로 안으며 말했다.
“내가 만나자고 했어. 그러니까 시우 너도 너무 뭐라 하지 마.”
연우는 마치 무서운 맹수 앞에 선 고양이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시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 긴장해.”
시우가 날선 목소리를 잠재우자 실내의 공기는 한층 편안해 졌다.
연우는 목이 타는지 잔을 들었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연우야, 괜찮아. 이제 시우도 있잖아.”
지혜는 시우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연우를 다독였다.
“무슨 일 있어?”
시우가 묻자. 연우가 시우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직 선글라스를 쓴 채였다.
연우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선글라스 아래로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괜찮아. 얘기해.”
지혜를 보던 연우가 지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선글라스를 벗고 모자까지 벗자 그늘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의 눈에는 퍼런 멍 자국과 자잘한 상처들이 있었고, 얼굴은 한쪽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대한민국 탑을 달리는 아이돌 스타의 얼굴이 이런 상태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뭐야, 그 얼굴은.”
“…맞았어요.”
“누구한테?”
“회사 대표님한테요.”
시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연우의 회사는 신생 매니지먼트 회사였다.
자본이나 투자처도 없었지만, 연예계 생활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김정수 프로듀서가 자비로 차린 회사였다.
데이지는 그 회사의 첫 프로덕션 팀이었다.
대부분의 팀들이 그렇듯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리 잡는 것은 꽤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데이지의 리더인 연우의 활약으로 데이지와 함께 회사는 급성장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렇게 중국의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엄청난 금액의 투자를 받게 되었다.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됐어요.”
중국 엔터테인먼트 회사는 처음에 호의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돈의 사용처나 자금 유용에 관한 보고서를 올려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무한한 신뢰에 김정수 대표는 더욱 열심히 뛰었고, 회사는 급성장했다.
하지만 중국 회사에서 사람을 하나씩 보내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처음엔 자리 이사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차츰 이사의 종적 수를 늘리고 실무자들을 중국에서 데려온 사람으로 교체했다. 처음엔 이런 행동에 불편함을 표현할 때마다 중국회사는 자금이라는 카드를 들며 회사를 흔들었다.
이런 행동이 거듭되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김정수 대표가 확실하게 반기를 들자 며칠 뒤 김정수 대표가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회사는 중국회사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데이지의 회사는 강형운이라는 사람이 차지해 버렸다.
“강형운… 그 사람은 자기 멋대로 행동했어요. 무리하게 스케쥴을 잡고 이상한 행사에도 끌고 다녔어요. 저희 팀원들은 너무 혹독한 스케줄에 쓰러지기까지 했는데도 그 사람은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저희를 계속 괴롭혔어요.”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대표님 실종 신고도 했고, 저희 일에 대해서도 신고 했지만. 증거가 없다면서 돌아갔어요. 그리고 어쩐지 경찰이랑 강형운이란 사람이 서로 친구인 거 같고요.”
경찰들이 조사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날. 연우는 경찰들이 강형운에게 돈을 받는 것을 봤다고 했다.
“이대로면 죽을 거 같아서…. 그래서 법적으로 해결해 보기 위해 변호사도 찾아봤는데… 강형운. 그 사람은 절 감시하고 있는지 제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서 저를 방해해요.”
“….”
“그래서 민서 통해서…. 겨우 지혜 언니한테 계약서를 보여주고, 계약 해지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그 사람한테 이야기했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시우가 건조하게 이야기 했다.
“그런 건 좀 더 큰 어른들한테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떻겠어?”
“…….”
연우는 여전한 시우의 말투에 감정이 복받치는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죄, 죄송해요. 괜히… 괜히… 저 그만 가볼게요.”
그렇게 연우가 나가려 하자 지혜가 연우를 강하게 잡았다.
“안 돼! 너 여기서 그냥 가면 큰일 나. 그리고 시우! 너 자꾸 이럴래? 너 이런 사람이었어?”
지혜의 호통에 시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시우의 입에서 한숨이 푹 나왔다.
“미안하다. 차분하게 이야기 해봐.”
시우의 말투가 부드러워지자 연우가 주저앉아 한참이나 울었다.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듯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저도 이것 저것 다 해봤어요.”
연우는 경호원도 고용해 보고, 운동한 삼촌도 불러 봤다고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리 크고 강한 사람을 불러서 보호받으려 해도 강형운 그 사람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 못 한다고 했다.
“전에, 시우 오빠가 매점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말 몇 마디에 오줌을 지리는 것도 봤어요. 그리고 전에 여기서 시우 오빠가 무섭게 말하던 것처럼. 그 사람이 말할 땐 그런 무서운 분위기가 풍겨요.”
“그래서 민서를 통해 나한테 접근한 거야?”
연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선 금방 눈물이 맺혔다.
‘하아….’
지혜가 연우를 다시금 다독이며 시우를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시우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흘러 나왔다.
* * *
지혜와 시우는 연우의 숙소까지 동행한 후에 돌아왔다.
연우는 숙소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도와줄 거지?”
지혜가 시우를 보며 물었다.
“나는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야…….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평범?”
지혜가 피식 웃었다.
“세상 어떤 평범한 고등학생이 재벌 변호사를 협박하고 조폭이랑 싸울 수 있는데?”
“…….”
“나한테 뭘 숨기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굳이 무리해가면서 숨길 필욘 없어.”
시우는 겸언 쩍은 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몰라,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말이 안 되잖아. 스무 살도 안 되었는데, 대학생들이랑 싸움하고, 변호사의 협박에도 꿈쩍 안 하고, 겁이라곤 없이 행동하면서 보복도 안당하고. 특히나 국민 아이돌 연우가 눈물을 흘리는 데 꿈쩍도 안 하고. 안 이상할 수가 없지.”
“…….”
“정체가 뭐야? 혹시 재벌 2세? 아니면 3세 같은 거야?”
“우리 아버지 치킨집 하다 재취직하셔서 직장 다니셔.”
“뭐, 난 크게 상관없어. 시우가 재벌이면 더 좋은 거니까.”
“그런 목적으로 만나는 거였어?”
지혜가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거든, 난 이 얼굴 때문에 만나는 거거든.”
지혜가 시우의 볼을 양쪽으로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그리고 긴장 풀지 말아라. 나 좋다는 남자 널렸으니까.”
“참 내….”
시우가 툴툴거리자 지혜가 시우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손을 잡았다.
“연우 잘 도와줘. 저 어린 애가 자기 그룹의 친구들까지 챙기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알았어. 걱정 마.”
지혜가 시우의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 * *
“가자.”
수업이 끝나고 보충 수업과 야자를 면제받은 시우는 곧장 연우의 교실로 향했다.
시우가 연우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자 사방에서 난리가 났다.
“우어어어어어!”
“대박! 시우 선배랑 연우랑 사귀는 거야?”
“빅뉴스! 빅뉴스!”
학생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시우는 주변의 난리에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연우는 가방을 싸고 시우를 따라나섰다.
학교 앞에는 이미 데이지의 밴이 와 있었다.
시우가 문을 열어주자 연우가 올라탔고 시우가 그 뒤를 따라 탔다.
“야! 너 뭐야!”
시우가 탑승하자마자 운전석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시우의 귓가를 때렸다.
데이지의 멤버들도 갑작스런 시우의 등장에 놀란 표정이었다.
“연우 개인 경호원입니다. 조용히 하고 가시죠.”
“이런 미친. 야! 서연우 얘 뭐야?!”
로드 매니저가 악다구니를 써가며 말하자 데이지의 멤버들 마저 두려워 하기 시작했다.
“내가 고용했어요. 출발해요.”
“미친…. 회사에 말도 안 하고 네 맘대로 고용했다고? 그리고 고삐리 아냐?”
로드 매니저의 말에 시우가 운전석을 발로 찼다.
“언어 순화 좀 하지? 국민 요정 데이지 앞에서 ‘미친’이라니 자격 미달인 거 같은데?”
“이 새끼가 돌았나!”
철컥.
로드 매니저는 벨트를 풀고 곧장 돌아 밴의 문을 열었다.
퍽!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날아오는 것은 시우의 발차기였다.
“커흑.”
명치를 때려 맞은 로드 매니저는 아프지 않은 척 일어나려 했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시우가 로드 매니저의 머리채를 잡고 당겼다.
“야, 어차피 너한테 볼 일 없으니까. 조용히 하고 운전이나 해. 괜히 나서서 불똥 튀지 말고. 그렇게 까불다가 뼈 부러진다.”
로드 매니저는 한낱 고등학생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했지만, 머리채를 통째를 쥐어뜯기는 것 같은 엄청난 악력과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시우의 힘으로 일어난 매니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칙칙해. 신나는 음악이라도 틀어봐. 데이지 이번에 1위 했다며.”
“…….”
시우를 노려보던 매니저는 살며시 블루투스에 연결된 데이지의 노래를 틀었다.
데이지의 히트곡, ‘SOS’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시우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편안하게 앉아 가기 시작했다.
밴의 뒷자리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데이지의 멤버들이 시우를 가리키며 조용하게 속삭였다.
“저분은 누구야?”
“…내가 얘기했지? 우리 학교에 있는 전국 1등….”
“저 사람이 대표님이랑 똑같은… 그?”
“응.”
“근데 고등학생 아니야? 괜찮을까?”
연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봤다.
한참 울은 후에야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다.
시우는 그냥 고등학생이다.
공부를 썩 잘하는 거 말고는 집안도 대단히 잘 사는 집안은 아니었다. 싸움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청소년들 사이에서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연우는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시우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표를 비롯해 회사를 채우는 사람들은 정말 무섭게 생긴 건달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우는 자신이 빠진 늪에 시우마저도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었다.
다음 날 시우의 전화를 받은 연우는 도와주겠다는 시우의 말에 좋은 마음보다는 시우를 끌어들여선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이 더 컸다. 연우는 시우의 도움을 거절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거다.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오빤 그냥 고등학생이잖아요. 제가 뭐에 씌웠던 거 같아요. 그냥 제가 했던 말 잊어주세요.”
-이렇게까지 난리를 쳐 놓고 이제 와서 뭔 소리야. 나 여자친구한테 잔소리 듣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냐? 아무튼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시우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자 연우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우를 믿어 보기로 했다.
2절 후렴구가 나올 즈음, 시우는 금방 외웠는지 콧노래를 불렀다.
“노래 좋네! 1위 할 만하네. 야! 소리 좀 더 키워봐.”
“…….”
로드 매니저가 말이 없었다.
“안 들려? 소리 좀 키우라고!”
시우의 언성이 높아지자, 주춤거리던 로드 매니저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볼륨을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