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네 사람은 개별실이 존재하는 레스토랑에 와 있었다.
수많은 인파를 정리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시우가 작은 마법을 부리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관심이 사라진 것처럼 제 갈 길을 갔다.
연우는 처음 겪는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당연하게도 어떤 이유로 사람들의 인파가 확 줄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연우는 지혜의 미모를 보고 놀라며 그녀의 미모가 자신의 존재감을 지운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이 정도면 연예인을 해야 하는 거 아냐?’
잘난 사람들 중에서 잘난 사람들만 모인다는 연예계에도 서로 격의 차이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이쁜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돋보이는 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의 존재감을 지우기도 한다.
연우는 지혜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연예계에 진출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그러는 한편 지혜는 지혜 나름대로 궁금증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부밖에 모르고 항상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 그녀였지만, TV, 버스 광고판, 화장품 광고 모델 등으로 대한민국 안 나오는 곳이 없는 데이지의 연우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연우가 시우와 아는 사이라는 것이 더욱 신기했다.
“여긴 전에 말했던, 내 동생. 최민서.”
“안녕하세요.”
시우의 소개에 민서가 지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인사를 했다.
“반가워 얘기 많이 들었어.”
지혜가 손을 내밀자 민서가 공손하게 두 손을 내밀었다.
연우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연우가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는 막 피어난 꽃 같은 느낌이라면 지혜는 어쩐지 성숙함과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여고생에게 마치 롤모델이 되어 줄 것 같은 반듯한 인상의 지혜에게 민서는 금세 호감을 가졌다.
“그리고 여긴 민서 친구.”
시우가 대충 소개하자 지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TV로는 자주 봤는데…. 실물이 더 이쁜 거 같아요.”
“언니도 너무 이쁘신데요. 언니 혹시 연예인 할 생각 없으세요? 제가 저희 회사 소개시켜 드릴게요.”
연우의 말에 지혜가 시우의 팔을 팡팡 치며 말했다.
“어머, 어떻게. 시우야. 나 연예인 할 생각 없냐는데? 연예인 할까?”
시우는 미소만을 띄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가 나오고 대화는 주로 민서, 연우, 지혜 위주로 돌아갔다.
세 사람은 화장품부터 시작해, 연예계의 뒷이야기와 대학 생활 이야기 등 주제를 막론하고 한순간도 쉬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세 사람은 오랜 시간 함께 지내 온 것처럼 급속도로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시우는 그 옆에서 말없이 계속 음식들을 먹어 치우고 있을 뿐이었다.
“언니 연우 오원오의 송다니엘이랑 엄청 친하데요. 저 사인 시디랑 폴라로이드 사진도 가져다줬어요.”
민서의 말에 지혜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말했다.
“진짜?”
“연습생 때 같이 연습했거든요. 그 친구도 준비하던 그룹 무산되고 힘들 뻔했는데 이번에 프로듀스가 잘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진짜 친한가 보구나.”
지혜가 부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언니도 사인 씨디 가져다드릴까요? 아… 아니면 나중에 우리 같이 송다니엘이랑 밥 먹지 않을래요?”
연우의 말에 민서와 지혜가 소리를 질렀다.
“꺅! 진짜?!
“그럴 수 있어?!”
연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케줄 바쁜 것만 끝나면 같이 밥 먹기로 했거든요. 그때 같이 봐요. 다른 연예인들 빼고 우리끼리 오붓한 자리 만들게요.”
연우의 말에 지혜가 시우를 보며 물었다.
“시우야. 나 송다니엘이랑 밥 먹어도 돼?”
시우가 스산한 눈으로 지혜를 봤다.
“그럼 난 송다니엘 발목 부러뜨려도 되냐?”
시우가 썰렁한 농담을 무섭게 했다.
연우와 민서는 꽤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지혜는 긴장은커녕 어린애가 되어서 시우에게 앙탈을 부렸다.
“어엉~ 그러지 말고! 밥만 먹을게. 응? 응? 내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밥을 먹겠어.”
지혜의 보챔에도 시우는 연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연우가 입을 열었다.
“두 사귀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응 우리?”
지혜가 시우의 목에 스스럼없이 팔을 걸며 생각하듯 천정을 잠시 바라봤다.
“이제 조금 있으면 1년 되지?”
“298일 째야.”
시우가 그렇게 말하곤 삐진 듯 고개를 돌렸다.
지혜는 찢어질 듯 벌어질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아마 어린 동생들이 지켜보고 있지 않았으면 지금 느낀 감정을 다 표현했을 것이 분명했다.
“언니 시우 오빠 많이 좋아하세요?”
연우의 물음에 민서의 얼굴이 조금 경직되었다.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지. 그건 왜? 연우 너도 연애하고 싶니?”
지혜의 말에 연우는 시우를 지그시 바라봤다.
시우 또한 연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네. 저도 연애하고 싶어요. 시우 오빠랑요.”
결국 터져버린 이야기에 민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안엔 급작스레 침묵이 감돌았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두운 밤 골목을 지날 즈음 지혜가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디저트를 생각하며 말했다.
“디저트 너무 맛있더라. 또 먹고 싶어….”
“…다음에 또 가자. 다음번엔 단둘이.”
“나 이번 달에 과외비 받거든? 그때 가자.”
지혜가 벌써 신난다는 듯 시우의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시우가 지혜를 바라봤다.
그녀는 정말 몰라보게 달라졌다.
1년 전 공부에 치이고 돈에 치이고 생활고에 치이던 생활을 가까스로 버텨내고 있었다.
오직 살기 위해선 공부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는 모든 기력을 짜내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끔찍한 일을 당할 뻔하였고, 그 일은 그녀의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때에 지혜는 시우를 만났고, 지혜는 시우를 만난 뒤 달라졌다.
더 이상 자신을 숨기거나 감추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이고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녀의 본 모습은 시우의 앞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시우는 가끔 지혜가 걱정되었다.
너무 급작스런 변화가 그녀에게 혼란을 주는 건 아닌지. 자신의 존재가 그녀의 자연스런 변화를 막은 건 아닌지.
“알바 그만뒀다면서… 또 하는 거야?”
“으응. 그만두려 했는데. 그 친구 부모님이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셔서. 나두 어차피 로스쿨 가기 전까진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원래 남는 시간에 남자친구 만나야 하는데. 남자친구가 고3이라.”
지혜의 말에 시우가 피식 웃었다.
잠시 말없이 걷던 중에 시우가 문득 물었다.
“…아까 기분 안 나빴어?”
시우의 질문에 지혜가 시우를 봤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계속 말 없던 게 그거 때문이었구나?”
* * *
연우의 급작스런 고백에 레스토랑 개별실 내부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민서는 숨 막히는 침묵에 웨이터가 물이라도 가져다주길 바랐지만, 웨이터가 콜 없이 먼저 들어올 일은 없었다.
레스토랑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라도 들린다면 어색함이 덜 할지도 몰랐지만, 방음시설 마저 완벽한 실내 내부 인테리어는 방 밖의 소음마저 완벽히 차단하고 있었다.
꿀꺽.
민서의 목에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던 행동이 되려 큰 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민서는 조심스레 시우를 바라봤다.
시우는 차갑고 냉정한 표정으로 흔들림 없이 연우를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오빠의 모습에 민서는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이, 이게 왜 이러지?’
민서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손을 내리자. 그 작은 소음을 타고 연우가 입을 열었다.
“저 시우 오빠 좋아해요. 엄청요. 그래서 시우 오빠랑 연애… 하고 싶어요.”
연우의 말에 민서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연우는 불안감이나 초조함 없이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민서는 조심스레 지혜를 바라봤다. 그녀가 얼마나 화를 낼지 감당도 되지 않았다. 이 일로 오빠랑 헤어지는 건 아닌가. 그럼 결국 자신이 두 사람을 헤어진 건 아닌가. 찰나의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걱정과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지혜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는 좀 달랐다.
“호호. 연우가 우리 시우를 탐내는구나? 근데 어쩌지? 시우는 이 언니 건데?”
지혜가 시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연우는 개의치 않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건 괜찮나요? 저도 참아 보려 했는데. 이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요.”
지혜가 시우를 바라봤다.
“하긴 이렇게 매력적이면 좋아하지 않고는 힘들지.”
“그럼 저도 좋아해도 되죠?”
“음….”
지혜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시우가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해.”
시우가 차갑다 못해 싸늘한 눈빛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내가 어른이든 아이든 한 가지만 하라 그랬지.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장난하면 재미없을 거야.”
시우는 말과 함께 피어를 슬쩍 흘렸다.
소량의 마나를 이용한 피어는 사람들에게 공포영화를 보는 정도의 공포심을 주곤 한다.
세 사람은 시우의 말이 험악한 조폭들에게 듣는 협박의 말보다 더 무서웠다.
민서가 피어의 영향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연우도 그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지혜도 등골이 오싹한 지 몸을 털고 시우에게 말했다.
“그만해… 아직 애들이잖아.”
지혜가 말하자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는 길 지혜는 문을 닫기 전 두려움에 떠는 연우를 한 번 더 바라보고 문을 조용히 닫았다.
지혜는 딱딱하게 굳은 시우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연우 처음 본 순간 알고 있었어. 시우 널 좋아하고 있다는 거.”
스무 살이 다 되어 가는 시우의 얼굴은 마치 신생아의 피부처럼 보드라웠다.
시우가 자신의 얼굴에 닿아있는 지혜의 손을 만지며 물었다.
“어떻게?”
“여자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를 볼 때 어떤 눈을 하는지 알거든.”
지혜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 나이대의 소녀가 멋진 남자에게 동경의 마음을 가지는 건 당연한 거잖아. 나도 고등학교 때 경제 선생님 짝사랑하고 그랬는 걸 뭐.”
“기분 나쁘지 않았어?”
“난 시우 널 믿으니까.”
시우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
지혜는 두 손을 올려 시우의 목을 감았다.
“나를 위해 목숨을 거는 남자친구를 어떻게 못 믿겠어.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 없지.”
삼진 그룹의 아들 김종철 일당에게 폭행을 당할 뻔하던 날.
선배라는 인간이 나타나 법으로 협박하던 날.
성창파에 납치되어 죽을 뻔하던 날까지.
그녀는 아직도 가끔 꿈속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을 위해 싸웠던 시우를 잊을 수 없었다.
끔찍하고 잔인한 기억이었지만, 그 꿈의 끝에 언제나 자신을 보호해 주었던 것은 언제나 시우였다.
그녀는 그를 만나 변하고, 사랑하게 하고, 살아가게 했다.
신비롭고, 찬란하고, 단단하고, 가끔은 쓸쓸해 보이는 남자.
지금 이 순간 보다 30대, 40대의 모습은 어떨지 더 궁금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연우의 솔직한 마음도 표현도 오히려 기분이 좋아질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안아줘. 내가 걱정되면 그러지 않게 더 꽉 안아줘.”
지혜가 시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시우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들어 그녀를 품에 넣었다.
“여름 방학 때. 또 기숙학원 들어간다고 했지?”
“응.”
“벌써 보고 싶어서 어쩌지?”
“그 전에 자주 봐두면 되지 뭐.”
“대신 성적 떨어지면 안 돼. 그럼 미안하니까.”
지혜는 한동안 보지 못할 자신의 남자친구를 기억하기 위해 더욱 깊게 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 * *
지혜의 연락을 받은 시우는 지혜가 이야기한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한 달 전에 연우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공교롭게도 지혜가 기다리고 있는 방 또한 이전의 그곳과 똑같았다.
똑똑
안내를 맡은 호스트가 문을 조심스레 두들기고 안에선 지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호스트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간 시우는 뜻밖의 광경에 말문을 잃었다.
개별실 안에는 평범한 트레이닝 복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쓴 묘령의 여자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엔 그녀를 위로하는 지혜가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왔어?”
“…….”
시우가 말없이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도 시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꽁꽁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시우를 보며 아는 듯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하세요.”
마스크를 벗어든 여자는 다름 아닌 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