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우빈의 머리채를 잡은 채 한쪽 귀로 이야기를 흘려듣고 있던 소혜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와 얘 장난 아니네.’
짧은 몇 마디의 문장 속에 남자들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함정 같은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과외, 숙소.
“와, 좋겠다!”
소혜가 연우의 당돌함에 놀란 것과 달리 우빈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무의식에 의지한 듯 말했다.
“저, 연우 씨 시우 과외하러 갈 때 저도 가면… 욱!”
결국 참지 못한 소혜의 팔꿈치가 우빈의 옆구리를 가격했고, 우빈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우빈의 모습을 보던 시우가 연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을 반짝 거리며 시우를 바라보고 있는 표정은 남성으로서 거부하기 힘든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연우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필요한 곳에서 사용하곤 했다.
“그건 힘들겠는데.”
시우의 음성은 단호했다.
“학업으로도 바쁜 고3한테 부탁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대학생을 찾아보던지 아니면 개인 교습을 알아보도록 해.”
연우는 데뷔하고 인기를 얻은 뒤에 간만에 들어보는 차가운 거절의 말에 조금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드라마 주연을 하면서 쌓은 연기 내공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어나갔다.
“그게, 구해 보기도 했는데, 데이지 숙소에 오는 걸 알고 지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어린 나이에 유명인으로서 삶이 얼마나 혹독한지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그래, 시우야. 바쁘겠지만 좀 도와줘라. 저 바쁜 연우 씨가 공부하려고 얼마나 애를 쓰… 커억! 자, 잠깐 잠깐! 명치! 명치 맞았어!”
우빈은 결국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혜가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우빈과 소혜의 모습을 보던 시우가 슬쩍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네.”
“오, 오빠!”
시우의 차가운 말에 연우보다 더욱 놀란 건 민서였다.
민서에게 시우는 언제나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감정 표현이 서투르지만 그 배려가 항상 느껴지고, 말은 많지 않아도 가족과 친구들에게 언제나 관심을 쏟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오빠가 타인에게 차갑게 대하는 것이 놀라웠다.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공부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시우는 놀란 표정의 민서를 보곤 다시 연우를 바라봤다.
“어른으로 대접받고 싶으면 어른이 되던가, 아이로 배려받고 싶으면 아이처럼 굴던가 하나만 하렴. 안 어울리는 옷을 걸치고 있다간 언젠가 큰코다친다.”
시우는 그 말을 끝으로 교실로 돌아갔다.
덩그러니 남은 연우의 얼굴은 조금 경직된 상태였다.
“괘, 괜찮아?”
민서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연우에게 물었다.
“오빠가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데… 내가 나중에 얘기할 게 과외 해 줄 수 없겠냐고.”
“…너희 오빠….”
연우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응?”
“너희 오빠 너무 멋지다! 완전 대~박! 나 저런 사람 처음 봐.”
연우가 민서의 두 손을 잡고 설레는 표정을 마구 표현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나 너희 오빠 좋아해도 돼?”
“어? 뭐… 그거야 네 자유지 근데 여자친구 있다고 얘기 들었는데….”
“진짜! 고마워!”
연우가 기쁨에 겨워 민서를 푹 껴안았다.
‘여자친구 있다는 소리 못 들은 건가?’
민서는 연우의 상태가 걱정되는 한편,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에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했다.
* * *
거울을 보던 시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머리가 옅은 파마기가 가득한 스왈로우 펌 형태의 머리로 바뀌었다.
잠시 모습을 보던 시우가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옅은 볼륨펌 형태의 머리카락에 6:4 가르마가 생겼다.
다시금 손가락을 튕기자 머리는 크롭컷의 형태가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을 튕길 때마다 시우의 머리카락은 미용실 샘플 책에 나와 있는 다양한 형태의 헤어 스타일로 변했다.
평소 학교에 다닐 때면 그저 차분하고 깔끔하게 내린 스타일로 하고 다녔다.
하지만 지혜를 만나러 가는 날이면 머리스타일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하아, 천살지존검의 영향인가?’
그것은 바로 외형적으로 자꾸 변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아직 외적으로 어린 나이인 것은 분명했지만, 이제 성인이 다 되어 가는 시우의 피부엔 잡티 하나 없었다.
젖살은 원래부터 없었지만, 회귀 전에 여드름도 있고 주근깨도 있었던 얼굴은 마치 신생아의 그것처럼 모공 하나 보이지 않았다.
평소 무지막지한 훈련을 하고, 샤워 후에는 민서가 억지로 사다 넘긴 로션을 대충 바르는 것을 빼고는 기본적인 관리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태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시우가 집안일을 하게 된 이후엔 식단을 짜면서 영양 좋은 음식들을 위주로 만들었던 탓에 민서도 그랬지만 시우의 얼굴에도 트러블 하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7서클에 도달한 이후로 피부가 더 좋아지고 있었다.
신생아처럼 탱탱해진 것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였다.
‘알게니하 대륙에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알게니하 대륙에 있을 때는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나이를 훨씬 든 후에 7서클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법적 깨달음에는 신체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
그랬기에 기력을 되찾기 위해 요정들을 족쳐서 젊음의 요체를 빼앗아 다시금 젊음을 찾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 7서클의 도달 이후엔 조금 바뀌었다.
7서클에 도달함과 동시에 온몸엔 수련하지도 않았던 혈도들이 타동되고 극적이진 않았지만 약한 환골탈태도 겪었다.
강호맹과의 일전 이후에 집에 와서 샤워하던 도중에 때가 허물처럼 벗겨져 샤워를 다섯 번이나 해야 했다.
아마도 7서클에 도달하면서 습득하고 있었던 천살지존검이나 천요검법이 영향을 준 게 아닌가 대략적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그 이후론 피부는 마치 조명을 받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시우 스스로 판단하기론 아마 자신은 앞으로 평생 남들보다 더 늦게 나이를 먹으리라고 짐작했다.
아니 어쩌면 이 상태에서 더 나이를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직 그에겐 올라가야 할 길이 더 남아 있으니까.
‘으… 그건 안 되지.’
남들은 부러워 죽을 일이었지만 시우는 생각하기도 싫은지 고개를 저었다.
‘겉모습이야 마법으로 손보면 되니까.’
시우는 결국 부드럽게 가르마가 보이는 스타일로 머리를 고정시켰다.
이마의 상처가 두드러져 보였지만, 환골탈태하며 상처가 많이 아물었고, 이런 상처라도 없으면 더욱 어리게 보여 지혜와 다닐 때 불편함이 많았다.
그렇게 블레이저를 대충 걸친 시우가 집을 나가려는 사이 문이 열리며 민서와 연우가 들어왔다.
“어? 오빠. 어디가?”
“응. 약속 있어서.”
시우가 신발을 신으며 그렇게 이야기하자 연우가 뒤에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우 오빠.”
연우의 호칭은 어느새 선배에서 오빠로 바뀌었다.
“어, 그래. 공부하러 왔니?”
“…오늘 스케줄 없어서 내가 놀러 오라고 했는데. 어디 가는데? 우빈 오빠 만나러 가는 거면 우리도 같이 가면 안 돼?”
“안 돼. 오늘 데이트 있어. 그리고 고2는 예비 고3이란 말도 몰라? 들어가서 공부해.”
시우가 그렇게 말하곤 민서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오빤 고3인데 데이트할 시간은 있어?”
“억울하면 너도 전국 1등 해.”
“우씨!”
시우는 쌩하니 나가버렸다.
시우가 그렇게 나가버리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민서였다.
“어떡해, 오빠 보러 왔는데….”
민서가 걱정스런 얼굴로 연우를 봤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 달리 연우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오늘은 너랑 놀러 온 거잖아. 근데 너 오빠 여자친구 본 적 있어?”
“아니, 근데 우빈 오빠한테 듣기는 했어. 엄청 이쁘다고.”
“흠 그래?”
연우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우리 오빠 쫓아 가보지 않을래? 여자친구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아?”
“……에이 뭘 궁금해….”
아닌 척했지만 민서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진짜? 안 궁금해?”
“아니, 사실 궁금하긴 해. 바로 가 볼까?”
“잠깐, 잠깐!”
“응? 왜?”
“사람들 많은 데 가는 거잖아. 그냥 이렇게 나가면 안 되지.”
연우가 자신들의 트레이닝복 차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옷 좀 봐도 돼? 그리고 내가 아이돌 메이크업 알려 줄게.”
연우의 말에 민서가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었다.
* * *
“야야, 저기 봐.”
“왜? 어?”
두 여자의 시선이 한쪽에 몰렸다.
고개는 살짝 돌린 채 보지 않은 척 시선을 감추는 그들의 얼굴엔 발그레 붉은 빛이 감돌았다.
“아직 어린 거 같지 않아?”
“쫌 동안인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쫌 남자다워 보이기도 하고.”
“말 걸어 볼까?”
“미쳤어!”
호들갑을 떠는 것과는 별개로 여자의 얼굴엔 기대감이 감돌았다.
“어?”
자신들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바꾸려던 두 여자의 얼굴에 실망감이 감돌았다.
“에휴, 그럼 그렇지.”
그들의 시선에 맴돌던 남자 뒤로 늘씬한 몸매에 풍만한 가슴, 수수한 듯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인이 친근하게 남자를 안았던 것.
“여자도 이쁘다. 연예인인가?”
“가자. 남의 떡 봐봐야 뭐해. 오빠들 기다리겠다.”
“저 오빠가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
여자들은 아쉬움 반, 눈이 호강했다는 즐거움 반이 섞인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길을 갔다.
“오래 기다렸어?”
시우를 깊게 안았던 지혜는 시우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아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우의 얼굴을 지혜는 뚫어지게 바라봤다.
“왜?”
시우의 물음에도 지혜는 금방 입술이 닿을 듯 가깝게 얼굴을 대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고3 피부가 이렇게 좋아? 난 고3 때 피부 트러블에 살까지 쪄서 엉망진창이었는데.”
지혜는 거리낌 없이 시우의 팔과 어깨 등을 만지며 그 탄탄한 근육에 감탄했다.
“그만해 간지러.”
시우가 간지러운지 몸을 빼며 말했다.
“왜 어때서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조금 부끄러워하는 시우의 모습이 더욱 좋은지 지혜는 거리낌 없이 몸을 밀착하며 시우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서 향긋한 봄 냄새가 풍겼다.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시우가 지혜를 떼어 내려 했지만, 지혜는 앙탈 부리듯 고개를 저으며 시우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몰캉한 감촉이 시우의 단단한 복근에 맞닿았다.
“잠깐만 이렇게 있을래. 너무 오랜만에 보잖아.”
“일주일밖에 안 됐거든.”
시우의 말에 지혜가 고개를 들어 시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 조금 컸던 시우의 키가 이제는 훤칠하게 커져 이렇게 올려다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우의 키가 그렇게 큰 뒤부터 지혜는 이렇게 시우의 품 안에 안기는 게 시우를 만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확 어디 납치해서 하루 종일 이렇게 안고만 있고 싶어.”
“저기요. 누나. 저 아직 미성년자거든요.”
시우가 너스레를 떨자 지혜가 시우의 입을 손가락으로 잡았다.
“누가 뭐래! 그냥 이렇게 안고만 있고 싶다고!”
시우가 지혜의 손을 떼어 냈다.
지혜가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시우가 지혜를 품에 안았다.
꽉 껴안은 시우의 힘에 지혜는 숨이 막힐 것처럼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아쉬웠던 마음이 채워지며 만족감이 자리했다.
시우가 그렇게 서서히 지혜를 안았던 팔을 풀자 지혜의 얼굴이 발그레 붉어져 있었다.
“뭐 먹고 싶어?”
“족발! 매운 족발!”
시우가 지혜의 손을 잡자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우가 선물한 반지가 느껴졌다.
“아직 끼고 다니네?”
“그럼 누가 준 건데.”
“새로 만들어 줄까?”
7서클 이전에 만들었던 아티팩트라 흑마나의 기운이 착용자에게 조금씩 스며 들어가는 부작용이 있었다.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새로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기에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싫어. 이게 좋아.”
지혜는 반지를 빼앗길 것이 두려운 것처럼 손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우의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안 뺏을게. 손 이리 줘.”
지혜는 그제야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캔슬]
[디스펠 마나]
보드랍고 따듯한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시우는 캔슬 마법과 디 매직 마법을 이용해 그녀의 몸에 쌓이는 미약한 흑마나의 기운을 지웠다.
“무슨 일이지?”
족발집으로 향하던 시우와 지혜의 앞으로 사람들이 잔뜩 모여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촬영이라도 하나?”
시우는 관심 없이 그저 지나가려 했지만, 시우의 손을 잡은 지혜는 뭐가 궁금한지 고개를 이곳저곳 내밀며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지혜가 인파 속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유를 찾을 즈음 인파 속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우 오빠!”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지혜와 시우에게 쏠렸다.
그 수많은 인파가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며, TV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소녀 두 명이 시우와 지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 여기 있었네요?”
다름 아닌 민서와 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