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고3이 되었지만, 어린 학생들의 혈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가장 체력적으로 왕성한 그들에게 하루 십여 시간을 앉아서 공부만 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큰 고문인지도 몰랐다.
점심시간, 학생들은 자신들의 혈기를 발산하기 위해 더욱 시끄럽게 떠들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중 단 한 명의 학생은 마치 기력이 다 한 것처럼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얘, 괜찮은 거야?”
소혜는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시우의 볼을 콕콕 찔러 보며 말했다.
“수업 시작하면 다시 일어날 거니까 걱정 마.”
“진짜… 얼마나 공부하는 거야…. 괴물 같은 놈.”
소혜는 심통이 난 다는 듯 시우의 얼굴을 연신 찔러댔다.
“야, 야…. 그, 그만해. 그러다 깨겠어….”
잠든 시우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우빈이 불안한 듯 말했지만, 소혜는 한술 더 뜨며 그의 볼을 잡아당겼다.
고3이 되어서도 소혜와 우빈은 시우와 같은 반이 되었다.
호들갑을 떠는 우빈과 소혜와는 달리 시우는 그저 무덤덤하게 ‘잘됐네.’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학기 초의 기억이 떠올린 소혜가 시우의 코를 돼지코로 만들며 말했다.
“학생이 말이야. 쉬는 시간이면 떠들고 매점도 가고 그래야지. 부족한 잠을 채우기나 하고 말이야. 아주 마음에 안 들어.”
시우는 고3이 된 이후에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서울에서 꽤 알아주는 명문고등학교에서 흔들림 없이 1등을 유지하는 것도 억울한 마당에 모의고사를 치면 줄곧 전국 순위권 안에 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멀어져 버려 경쟁의 의지도 사라져 버린 소혜는 퍽이나 약오른 것처럼 시우를 계속 괴롭혔다.
“근데 넌 뭘 보고 있는 거야?”
“이거? 모의고사 풀이….”
우빈은 시우의 옆 자리에서 지난 번 모의고사 문제 풀이를 하고 있었다.
처음 얼마나 갈까 생각했던 우빈의 모습은 꽤 오래 갔고, 점점 오르는 성적으로 보며 우빈이 과연 자신이 알던 우빈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어떻게 푸는 거냐면….”
우빈의 펜을 뺏어든 소혜가 우빈의 옆자리로 이동해 고민하던 문제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답은 4번이야. 알겠지?”
소혜가 우빈을 돌아보자. 우빈이 소혜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우빈의 눈빛에 갑자기 부끄러워진 소혜가 시선을 슬쩍 피했다.
“왜… 왜?”
“너 혹시 주말에 시간 있어?”
“어, 어?”
우빈의 질문을 받은 소혜가 슬쩍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여전히 세상 모르는 듯 잠을 자고 있었다.
“어… 딱히 약속이 없긴 한데… 왜?”
“주말에 ……나 공부 좀 알려 주지 않을 래? 내가 진도가 느려서 쫓아가기가 힘드네….”
“…!”
소혜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내가 네 과외 선생이냐! 왜 공부를 나한테 알려 달라고 해!”
심통이 난 소혜가 우빈의 목을 잡고 헤드락을 걸었다.
그때, 교실 스피커로 알림음이 울렸다.
[각 교실에 알립니다. 학생들은 티비를 켜고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학생들은 티비를 켜고 자리에 앉아 뉴스를 시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가 나왔지만, 안내에 따르는 학생들은 없었다.
유일한 자유가 보장된 1시간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빼앗길 마음이 없었던 것.
소혜가 작게 한숨을 쉬며 TV를 켰다.
TV에선 일본 방송에서 송출되는 화면을 비춰주고 있었다.
많은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었고, 그 중심엔 이토 신조가 침울한 기색으로 담화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나운서의 음성이 지금의 현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일본 내각 총리인 이토 신조가 담화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담화의 주된 내용은 역사 인식에 대한 재정리와 다케시마 영유권 주장에 대한 사과가 주 내용이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 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와 갈등 관계를 빚어 온 일들에 대한 전격적으로 교정해 나갈 것이라 밝힌 것에 대해서 일부 전문가들은 이토 신조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이야기에 떠들썩하던 교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
“뭐, 뭐라고 하는 거야?”
“조용히 해봐!”
아나운서의 음성이 끝나고 손과 이마에 살색 반창고를 붙인 이토 신조가 작성해 온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일본은 그동안 그릇된 역사관과 제국주의적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거듭 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 피해를 끼친 점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드립니다.
이토 신조는 잠시 카메라 앞으로 서며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환한 플래시 불빛이 연신 터지며 그의 횡한 머리가 훤히 보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소혜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떨떨해 하자 우빈이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 했다.
“그 동안 반성의 시간을 가졌나 보지 뭐.”
“시우 좀 깨워봐.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
소혜의 말에 우빈이 시우를 슬쩍 보곤 말했다.
“그냥 둬. 그 동안 피곤했을 거야.”
* * *
-그리하여 기본적인 자위권을 제외하곤 군대 해산과 함께 국제 사회의 조치를 기다리며….
커다란 집무실 한켠에 간이로 가져다 놓은 TV에선 이토 신조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이 대통령의 집무실의 주인인 김윤성은 턱을 괸 채 이토 신조의 담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중대한 사건이었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그의 집무실엔 국가 운영의 중책을 담당하는 인물들 대신 SNH의 수장인 곽동원만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함께 앉아 있었다.
“내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군.”
김윤성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이토 신조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김윤성의 말에 곽동원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바빠지실 겁니다. 저 자가 왜 저런 행동을 한 지는 대외적으로 밝힐 수 없을 테니까요.”
외교부의 일부터 국내 정책부서의 장·차관들까지 이번 일에 대해서 난리를 떨고 있었다.
일부 의원들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속임수를 쓰는 것 아니냐며 되려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동안 음과 양으로 일본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들의 편에 섰던 현대판 친일파들은 갑작스런 일본의 태도에 당황해하며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벌써 몇몇이나 많은 이들이 그의 개인 회선을 통해 연락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피곤하겠군. 이제 임기도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에겐 과분한 일이야.”
김윤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토록 바래오던 일이기도 하지.”
곽동원이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었다.
고풍스런 자개로 만들어진 작은 함은 한눈에도 고급스러움이 묻어 났다.
“이게 뭔가?”
“이번 중국 상계로부터 받아낸 보상품 중 하나입니다.”
김윤성은 함을 열어 보았다.
작은 사이즈의 함 안에는 그보다 더욱 작은 크기의 금빛 타원형 캡슐이 존재하고 있었다.
캡슐을 열자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윽하고 깊은 향이 흘러 나왔다.
“이게 뭔가?”
“연맹 내부에서 제조 된 한연단입니다. 일종의 영약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공진단 같은 건가?”
김윤성의 물음에 곽동원이 쓰게 웃었다.
“일반 사람이 먹으면 죽을 때까지 병치레에 걸리지 않고 무인이 먹으면 몇 년의 공력을 얻을 수 있는 귀한 겁니다.”
곽동원의 이야기를 들은 김윤성이 놀란 표정으로 단환을 보다가 다시금 캡슐을 잠갔다.
“되었네. 공진단으로도 충분히 기력을 체우고 있네. 이런 귀한 건 필요한 곳에 요긴하게 쓰도록 하게나.”
김윤성이 함을 다시 곽동원에게 밀어냈지만, 곽동원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김윤성에게 건냈다.
“이건 한연맹의 맹주인 시우 님이 대통령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앞으로 혼란에 빠질 나라를 위해 불철주야 일해 주십사 하는 부탁이기도 하고요.”
“허허, 대체 대통령을 얼마나 부려 먹으려는 수작인건가?”
김윤성의 웃음 소리가 잦아지자 곽동원이 진중하게 이야기 했다.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겁니다. 일본은 단지 시작입니다. 이미 중국 상계와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대격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국 상계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흠. 그런가?”
“네.”
“알았네. 조만간 시우 군과 식사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요즘 중간고사라 바쁘다고 하셨습니다.”
곽동원의 말에 김윤성이 다시금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중간고사? 허허. 허허허.”
* * *
-이에 일본은 앞으로 올바른 자세로서 국제 사회에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일체의 행위 등을 삼갈 것을 다짐합니다.
TV속에서 흘러 나오는 이토 신조의 담화문을 듣는 이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이게, 말이 담화문이지….”
계상학이 말을 끊었다가 뒤 늦게 이었다.
“숫제 항복 선언문이랑 뭐가 다른 것인가….”
계상학의 말은 자신들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 암울하게 느껴졌다.
“야토가미는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오?”
계상학이 입을 꾹 다문 장송계에게 물었다.
“일본에 나가 있는 정보원들에게 연락이 왔소.”
“뭐라 하더이까?”
장송계가 고개를 돌려 진문형을 바라봤다.
“야토가미의 황거가 있던 곳이….”
장송계가 잠시 말을 쉬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더이다.”
장송계의 말에 모두들 탄식을 터트렸다.
“허어.”
“그토록 강했던 야토가미가….”
“아미타불.”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들 말을 잃었다.
강호맹을 이끌던 진문형은 지금 맹 내의 감옥에 들어가 있다.
부상이 심하여 맹의 모든 심력을 쏟아부어 치료했지만, 이미 마음이 죽어 버린 것인지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한연맹과의 전투에 대한 피해로 인해 강호맹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명진 방장, 교주를 만난 일은 어찌 되었소.”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던 명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주는 나설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
명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시우와 교주간의 약속에 대해선 함구하기로 이미 약속했던 것.
“정확히 말씀은 드릴 수 없지만, 교주가 한가지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한연맹을 뛰어 넘어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
“아마도… 한연맹이라 함은 최시우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명진이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명진의 몇 마디 말 속에서 시우와 교주의 대결. 그리고 그 결과와 현재 시우의 힘까지 예측할 수 있었다.
“부디 그 자가 최대한 늦게 중국 땅을 밟길 바래야 겠군요.”
회의장 내부에선 그 누구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 * *
영국 런던.
-끝으로 그동안 우리의 조상과 우리로 인해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당한 모든 분들게 깊은 사과를 올립니다.
담화를 끝으로 이토 신조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허리는 펴질 줄 몰랐다.
핸드폰으로 그 광경을 보던 사내가 핸드폰을 끄고 뜨거운 김이 모락 피어 나는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댔다.
길가를 지나가는 금발의 늘씬한 미녀들은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저들끼리 소근 거렸다.
“루비, 저 남자 귀엽지 않아?”
“헤이, 에밀리, 동양인이잖아.”
“어때, 저 얼굴 하며 어깨 봐. 비리한 동양 애들이랑은 좀 다른 느낌이야. 뭔가 몽환적이기도 하고.”
“동양의 신비로움을 맛보고 싶은 거야?”
두 미녀가 그렇게 깔깔 거리며 지나 간 뒤.
커다란 중절모를 쓴 중년의 사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던 사내에게 다가갔다.
중년 사내는 중절모를 벗으며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커피를 마시던 사내는 자리를 권했다.
“잠시 소나기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런던의 날씨는 사람을 죽이기로 유명하죠. 아마 계시던 곳과는 많이 달라 힘들겁니다.”
중년의 사내가 웃으며 말하자 커피를 마시던 사내가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뇨. 걱정과 달리 원래 이런 날씨를 좋아합니다.”
사내의 말에 중년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협회 사람들이 모두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류신.”
중년 사내의 말에 류신이란 불린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그림으로 그린 듯 차가운 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