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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허허허…. 허허.”
봉두난발의 머리카락, 내력을 다 쏟아붓고도 결국 막아내지 못한 번개의 공격에, 온몸은 불에 그을린 듯 거뭇한 화상 자국을 남겼다.
간신히 붙들고 있는 검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아니라 번개의 고온을 견뎌내지 못하고 녹아 눌러 붙어버린 탓이었다.
“허허, 허허허허, 허허.”
진문형은 그렇게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허탈한 웃음을 내비쳤다.
코로 매캐한 살 타는 냄새가 스며들고 귀로는 죽어가는 이들의 신음 소리만이 들려왔다.
강호맹과 더불어 한라검문과 해도문의 전 병력까지.
삼천 오백에 달하던 인원들 중에 멀쩡히 서 있는 이들은 없었다.
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 진문형은 허탈한 웃음만을 내뱉었다.
“네놈은… 인간이 아니구나.”
진문형이 돌아서며 시우를 바라봤다.
삐쩍 마른 앙상한 몸에 퀭한 눈동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그는 어느새 다가온 소빈의 부축을 다시 받고 있었다.
“야토가미도… 이런 힘은 가지지 못했다.”
매마른 시우의 입술이 달짝 거렸다.
“강호맹의 맹주. 진문형. 나는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를 발로 찬 것은 스스로의 힘을 맹신하고 상대를 짓밟으려 한 쓰레기 같은 네 자신이다.”
진문형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웃기는 소리. …이런 힘 앞에 우리에겐 이미 희망 따윈 없었다.”
진문형을 바라보는 시우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보다 약한 자는 무시하고,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선 스스로를 불신하는가. 그렇기에 너희가 나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시우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돌아섰다.
“강호맹에 연락해라. 쓰레기는 스스로 치우라고.”
진문형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며 오열했다.
“흐어어어엉”
그의 울음소리는 남은 강호맹의 맹도들의 자부심마저도 산산이 부숴버렸다.
* * *
소빈의 부축을 받은 시우는 곧장 집무실로 향한 뒤 모두를 소집했다.
방금 시우의 엄청난 신위를 목격해서인지 집무실에 모인 이들의 얼굴엔 하나 같이 긴장감이 멤돌았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시우가 메마른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 했다.
“꼴이 그게 무엇이냐? 그래서 사내 구실이라도 하겠느냐?”
남궁혜자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간신히 시간을 맞추느라 그랬습니다. 저라고 이런 꼴로 나타나고 싶었겠습니까?”
“쯧쯧, 사내놈이 되어 가지곤, 계집아이 품에 파묻히려고나 하고.”
남궁혜자의 말에 소빈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그제서야 장내의 인물들은 조금씩 긴장을 풀고 하나 둘 입가에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긴 저한테 자꾸 이러실 겁니까?”
“그래. 원하던 것은 얻어가지고 돌아온 게냐?”
“얻지 못했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시우의 말에 남궁혜자는 기쁨보단 안타까움을 더 느꼈다.
‘어린 녀석에게 몹쓸 짐을 지우는구나.’
“고생했다. 그래. 한동안은 쉬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그나마 한연맹에 피해가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시우의 말에 장내의 인물들은 다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미안함은 느끼지 않겠다. 대신 네가 시키는 것은 제대로 하마. 우린 무엇을 해야 하느냐?”
시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한 문주는 강호맹에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도록 해.”
“예. 이미 의견서를 정리 중입니다.”
“선배님께선 강호맹의 무인들을 정리하는 일을 지휘해 주십시오.”
“남은 이들은 어쩔 셈이냐? 모두 죽일 셈이냐?”
강호맹의 행동은 명백한 살의에 의한 행동이었다.
설사 보복으로 남은 포로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모든 일의 명분은 한연맹에 있었다.
“아니요. 남은 이들은 강호맹에 돌려보낼 겁니다. 대신 그 대가를 좀 받아야겠지요.”
“그 이후엔?”
“나머지 분들은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한연맹을 재정비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래.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리고?”
시우가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강호맹에게 약속을 지키라는 이야기도 전해줘.”
“어떤 약속 말인가요?”
“우빈이의 단전을 회복시키겠다는 약속.”
시우의 말에 장내의 모인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특히 우빈은 당황하는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남궁혜자가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우리 우빈이를 아끼는 것은 고맙다만, 이런 상황에서는 공사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빈이도 그 점은 이해할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우빈아?”
남궁혜자가 우빈을 보며 말하자 우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증조할머님. 전 앞으로 단전을 가지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빈의 말을 듣던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닙니다. 공적인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시우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원탁에 둘러앉은 네 명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본래 여섯 명이 앉았어야 할 자리에 비어 버린 두 자리는 생각보다 큰 허전함을 안겨주었다.
“…….”
“…….”
서로가 눈치만을 보며 누가 먼저 입을 열지 기다리고 있을 때.
모산파의 계상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계상학은 그나마 조금 편안한 표정이었다.
“다음 대의 맹주는 무당에서 맡기로 했으니 조금 이르더라도 장 문주께서 맹주직을 맡아 주시는 것이 어떻소?”
계상학의 말에 장송계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아직 임기가 7년이나 남은 진문형을 제치고 맹주직에 오르는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나 현재 사태가 너무도 좋지 않았다.
강호맹의 전력은 절반이 날아가 버렸고, 중국 상계는 내·외부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단순히 전력이 되는 맹도들의 죽음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문파와 상계인들에게 마땅한 보상까지 해줘야 하는 최악의 상황인 것이다.
현재 강호맹은 잘하면 현상 유지, 잘못하면 분열이라는 사태를 겪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이리된 것, 기수를 흔드는 이가 낫겠지.’
장송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쥐며 말했다.
“다른 동도들께서도 이견이 없으시다면 소인이 그 책임을 맡도록 하겠소.”
의견을 내거나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고맙소. 미약하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소.”
장송계가 고개를 숙이자. 작은 박수 소리가 난 뒤 사라졌다.
“진문형 문주의 어리석고 독단적인 선택으로 맹은 지금 큰 위험에 빠졌소.”
말을 듣던 계상학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른 문주들을 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 다들 이 정도였던 거지.’
계상학도 표정을 관리하며 장송계를 바라봤다.
“맹도의 절반이 한연맹의 암계에 당해 대부분이 죽고, 일부는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오. 더구나 진 문주 또한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이니. 이는 전후 가장 최악의 사태라 할 수 있소.”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표정도 편치 않았다.
이번에 희생된 맹도들 중 다수가 자파의 제자들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까마득한 후배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자파의 제자들이 죽었다는 건 그들의 마음속에 불편함을 남겼다.
“한연맹 측에선 뭐라고 합니까?”
평소 말이 없는 명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연맹 측은 우리가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말과 함께 이번 사태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 말해왔소.”
“그럼 한연맹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오?”
정산명의 말에 장송계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소. 하지만 한연맹은 이번 일에 대해 우리 강호맹에 책임을 묻고 있소.”
“…어떤 책임 말이오?”
“진 문주가 일으킨 일에 대한 피해보상이오.”
잠자코 있던 계상학이 나섰다.
“그렇다면 잘된 일 아니오? 어쨌든 진 문주가 잘못한 것은 맞지 않소.”
하지만 장송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 규모가 꽤나 크오.”
“얼마나 말이오?”
“우리가 한연맹에게 지불했던 동맹 보상금 수준의 보상이오.”
장송계의 말에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마, 말도 안 되오.”
“그렇소. 그 일로 우리 점창파에는 남은 영약이 없소이다.”
가장 놀란 계상학도 말을 거들었다.
“내 알기론 그 보상금으로 인해 강호맹의 재정이 향후 5년간은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들었는데. 지금 그것을 줘 버린다면….”
다시금 장내엔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소림사의 명진이 입을 열었다.
“다시 한연맹과 척을 질 수는 없습니다.”
미간을 찌푸리던 점창의 정산명이 명진의 말을 끊었다.
“명진 방장은 우리가 한연맹에게 질 거라 생각하는 것이오?”
정산명의 도발에도 명진은 차분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이기고 지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요.”
“그것이 무엇이오?”
“우리는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명진은 차근차근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삼천에 가까운 강호맹의 맹도가 한연맹에게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그 일은 분명하게 벌어졌고, 한연맹에는 큰 피해가 없었지요. 이게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암계나 사술이….”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이토록 압도적인 전력차에 의해 당했다는 것은 한 가지밖에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
“바로 상대에게 압도적인 무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명진은 말을 이어갔다.
“함정에 빠졌을 수도 있고, 암계에 당했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가망성이 높은 것은 그 마법이라는 것이 삼천의 인원을 몰살시킬 만큼 압도적인 힘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장내의 인물들이 명진의 말을 멍하니 들었다.
“이것은 우리는 물론이고, 야토가미도 가지지 못했던 힘입니다. 만약 이것이 지형 지물을 이용한 특수한 물건이나 술법에 의한 것이 아닌 일개 개인이 가진 힘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각 파의 문주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만약 그렇다면 우린 절대로 한연맹과 싸움을 벌여선 안 됩니다.”
“끄응.”
이곳저곳에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지 않소이까. 방장도 전에 그가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다고 하지 않았소?”
정산명의 말에 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대와 싸우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명진의 말에 정산명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명진 또한 그를 몰아세울 뜻이 없었는지 조용히 장송계를 바라봤다.
“명진 방장의 의견에 적극 찬성하는 바요. 하지만 우리 강호맹이 그저 가만히 앉아서 자리를 내어 줄 수는 없지요.”
계상학이 물었다.
“무슨 방도가 있겠소?”
“우선은 한연맹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게 내 생각이오.”
“그건 쉽게 정할 일이 아니지 않소.”
“끝까지 들어보시오. 우리 강호맹은 맹의 뜻에 어긋난 행동을 단독적으로 한 진문형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오. 이 일을 계기로 화산파를 탈맹하고 진문형을 맹규로 처벌하겠다는 의견서를 보내는 것이오.”
“그런 이후엔?”
“우리 전체의 뜻이 아니었던 만큼 보상금의 절반만을 보상하는 것이오.”
“그것이 받아들여지겠소?”
계상학이 과연 이렇게까지 당한 한연맹에서 눈 가리고 아웅할만 한 제안을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한연맹에선 이번 일에 책임을 묻는 동시에 약속했던 것을 이행하라는 이야기를 전해왔소.”
“어떤 것 말이오?”
“망가진 단전을 고치는 것 말이오.”
장송계의 말을 듣던 계상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소.”
“이해가 안 되는구려. 굳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것도 겨우 한 명에 불과한 무인의 단전을 고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해 온다는 것이.”
“내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았소. 한번 들어보시겠소?”
“얘기해 보시오.”
“내 생각에 한연맹… 아니, 최시우는 우리 강호맹과 정면으로 붙어볼 작정인 것 같소.”
“…?”
“그게 무슨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