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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럽던 전장은 한순간 정적이 흐르는 공간이 되었다.
모두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기 위해 숨소리마저 참아가며 최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이나 씻지 않은 듯 떡이 진 머리칼과 지저분한 옷가지.
비추는 태양이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과거의 패기를 뿌렸던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와 삼천에 달하는 적을 보고도 조금도 변함없는 그의 모습이 강호맹의 문도들을 긴장시키게 만들기 충분했다.
시우가 주변을 보곤 검강을 뿜어내는 진문형을 바라보며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우습지도 않은 이유로 일을 크게 만들었군요.”
시우의 말에 진문형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것이오?”
“우리 관계에 서로 간에 개인사까지 밝힐 의무는 없었을 텐데요?”
진문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가지고 많이도 데려왔군요.”
시우는 끝을 모르고 줄 선 강호맹의 맹도들을 보며 말했다.
“돌아가시죠. 이번 일은 작은 오해로 인한 해프닝으로 넘어가죠. 뭐 교류하고 싶다는 정보에 대해선 차근차근 받는 걸로 하겠습니다.”
시우의 말에 진문형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시우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그가 나왔으니 더 이상 자신에겐 어떤 명분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말을 마친 시우가 돌아서서 한연맹의 부지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걸음을 떼는 것조차 쉽지 않은지 시우의 발걸음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했다.
그때 앙상하게 마른 시우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정소빈이 귀신 같은 신법으로 시우를 부축했다.
“시우 님.”
소빈은 시우가 자신의 손을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시우는 되려 그녀의 손이 반가운 듯 그녀를 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소빈 님, 살이 빠지셨군요. 그동안 너무 무리하신 건 아닌가요?”
시우의 말에 소빈은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소빈이 아주 천천히 시우의 발걸음을 맞춰 걸을 때.
뒤에서 시우의 모습을 보고 있던 진문형은 더욱 큰 갈등에 빠져들었다.
명분은 사라졌고, 자신이 세웠던 뜻은 펼쳐 보기도 전에 꺾였다.
하지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부축을 받으며 걸어 올라가는 시우의 모습에 진문형은 더욱 큰 갈등에 빠졌다.
‘지금 칠 것이냐, 평생 후회할 것이냐.’
시우의 첫 만남은 혁련무궁을 만날 때와 비슷했다.
평생 기를 익혀온 그는 인간이 흩뿌리는 기의 파장을 읽는 것에 민감했고, 그런 만큼 상대의 실력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진문형이 한연맹과 우선 동맹을 맺고자 한 것도, 시우의 부재에 그를 공격할 생각을 지닌 것도 모두 그가 풍기는 기의 파장 때문이었다.
혁련무궁처럼 노골적이고 파괴적인 느낌. 혁련무궁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긴 했지만 가장 크게 진문형을 불길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에게서 풍기는 강도 높은 마기 때문이었다.
혁련무궁보다 더욱 짙고 불길한 느낌은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진문형의 머릿속에서 시우를 지워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은 한톨의 마기도 풍기고 있지 않았다.
아니 마기는커녕 어떠한 기의 파장도 느껴지지 않았다.
흡사 일반인처럼.
‘마법사들에게도 주화입마와 같은 부작용이 존재하는가.’
높은 경지의 도가 수련자에게 주화입마는 그 어떤 검보다 위험하다. 주화입마에 걸리면 운이 좋아도 일반인처럼 살 수 없고, 운이 나쁘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된다.
대체로 무리하게 경지를 끌어 올리다가 걸리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해보면, 최시우의 지금 상태가 주화입마와 비슷한 상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리고 그가 그런 상태라면 진문형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우리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최 맹주가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야토가미의 귀술을 익히고 있다 들었소.”
소빈에게 부축받아 걷던 시우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그러기 위한 포로 교환이 아니었나요?”
“힘을 분석하고 제어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 불결한 힘을 익히는 것은 허락할 수 없소.”
진문형의 말을 듣던 시우는 눈을 껌뻑이다 말했다.
“좋습니다. 강호맹이 그렇게 하겠다면 한연맹도 그에 따르지요.”
시우의 말에 진문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결국 야토가미의 귀술을 익혔단 말이냐!”
진문형이 겨눈 검은 시우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
시우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강호맹의 맹주. 진문형. 당신은 지금 3천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거다. 알고 있나?”
“뭐, 뭣이라! 이놈이!”
시우가 소빈의 손을 놓고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아직 우리의 동맹이 유효할 때. 돌아가라.”
시우의 엄중한 경고에도 진문형은 오히려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래 어떻게든 피하고 싶을 테지. 절대 놓치지 않는다.’
진문형이 검을 들어 외쳤다.
“나 강호맹의 맹주 진문형이 강호맹의 이름으로 명한다. 야토가미의 잔혹한 귀술을 익혀 다시금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던 최시우와 한연맹을 단죄하고, 이 세상에 평화를 되찾아라.”
진문형의 말에 맹도들이 일제히 검을 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
“맹도들은 모두 적들을 척살하라!”
강호맹의 무인들이 다시금 공격을 시작했다.
진문형 또한 검강이 깃든 검을 단박에 휘둘러 시우를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반으로 가르려 했다.
“매, 맹주님!”
소빈은 섬광 같은 진문형의 검격에 가만히 선 시우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 달려나가려 했지만 진문형의 검격이 수배는 빨랐다.
삽시간에 진문형의 검이 휘둘러졌다.
퍼퍼퍼펑!
예상과 달리 진문형의 검이 휘둘러진 허공에서 반투명한 막들이 터져나가며 진문형의 검을 막아섰다.
몇 개의 배리어를 뚫고 들어간 진문형의 검은 시우의 눈앞에서 멈춰 섰다.
시우의 두 손에선 각기 다른 회색과 금색의 마법진이 완성되어 있었다.
“제길…!”
이미 완성된 마법진이 쏘아져 나가려 하자. 진문형은 검을 거두고 측면으로 수 바퀴를 회전하여 뒤로 물러섰다.
“마법이다! 모두들 대비하라!”
진문형의 외침과 동시에 주작단 소속의 무인들이 앞서며 사방으로 부적을 뿌렸다.
뿌려진 부적들이 바람에 따라 꽃잎처럼 나풀거리다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자리를 잡은 부적들은 방패 모양의 형상을 소환하여 시우의 마법을 대비했다.
완성된 시우의 마법진이 손에서 쏘아져 나가자, 진문형이 자하신공을 끌어 올려 마법진을 두 동강 내려 했다.
부웅.
허공을 격한 마법진은 진문형의 검을 그대로 통과하곤 하늘로 날아올랐다.
진문형은 영문도 모른 채 마법진이 날아간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우르르릉.
대기가 흔들리고 공기 중엔 텁텁한 습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맑았던 하늘은 순식간에 검은 구름으로 가득 메워졌다.
검은 구름들은 서로 부딪치며 스파크를 내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지직
한세아의 정령이 신난다는 듯 사방으로 몸을 흩뜨리더니 한세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커다란 늑대로 변했다.
“피, 피해! 늑대다!”
무인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늑대의 모습에 재빠르게 발을 놀려 보았지만, 신법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번개의 속도를 이겨낼 순 없었다.
“크아아악!”
늑대는 순식간에 무인 하나의 목을 물어뜯고 곧장 다음 무인을 향해 달려나갔다.
한세아는 멍하니 시우를 바라봤다.
쿠룽.
검은 구름들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며 회색의 속살을 내비쳤다.
쿠릉.
전투에 정신이 나가 있던 무인들은 저마다 불길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쿠르르릉. 쿠르르릉.
그 불길한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마스터 오브 썬더][기가 레인]
검은 구름 사이로 흰색의 섬전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쿠쿠쿠쿠쿵!
번쩍하는 순간 번개가 내려치고, 번쩍하는 순간 순식간에 무인들이 고혼이 되었다.
숲과 나무 도로와 들판을 가리지 않았다.
검은 구름은 비를 몰고 왔다.
물방울이 아닌 섬전으로 이뤄진 공포스런 번개비.
쿠르르릉 콰쾅 콰쾅 콰쾅콰쾅
“끄아아아악!”
“피, 피해!”
“으아아아악!”
전쟁터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바뀌었다.
진문형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도 그것이 현실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 * *
야토가미의 황거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일본을 넘어 아시아 상계에서 두려울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귀무사들과 음양사들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가득했다.
자박 자박 자박
자갈이 깔린 돌 위를 걷는 백의의 사내에 시선이 쏠렸다.
황거의 모든 인원을 긴장하게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오오가미였다.
야토가미에 들어와 처음으로 오오가미의 모습을 본 자는 감격에 젖어 눈물을 흘렸고, 몇십 년 만에 그의 모습을 본 노쇠한 음양사들의 모습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사전에 류신이 지시한 곳에서 한시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류신의 안내를 받아 움직이는 오오가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쪽입니다.”
류신은 허리를 굽힌 자세를 유지하며 오오가미를 안내했다.
“어째서 나까지 필요한 것이냐?”
“새로운 사천신에게 더욱 큰 힘을 부여하기 위해선 오오가미 님이 필요합니다.”
오오가미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류신을 바라봤다.
“난 내 힘을 나눌 생각이 없다.”
류신은 고개를 들지 않고 이야기했다.
“오오가미 님의 힘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귀술은 오오가미 님을 통해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류신의 말에도 오오가미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 귀술이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은 무엇이냐?”
류신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차가운 얼굴을 보였다.
“이 귀술은 제가 겪고 느낀 최시우의 힘을 분석하여 만든 것입니다.”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가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식을 나름대로 분석한 것입니다.”
오오가미의 온몸에서 투기가 흘러나왔다.
황거 전체에 그 투기가 닿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야토가미의 인원들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귀술은 최강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귀술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네 말과 한 치의 차이라도 있을 시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오오가미가 고개를 돌려 다시금 움직였다.
오오가미가 황거의 중심에 섰다.
류신은 그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섰고, 작게 귀어를 외기 시작했다.
류신을 시작으로 그의 주변에 각각 위치한 음양사들이 귀어를 외기 시작했다.
음양사 다음으로 귀무사들이 귀어를 외기 시작했다.
오오가미가 선 바닥에서 붉은빛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붉은빛은 천천히 류신에게 뻗어 나갔고, 이윽고 음양사와 귀무사들을 연결했다.
황거 전체엔 마법진과 비슷한 문양의 붉디붉은 빛이 가득해졌다.
그리고, 야토가미 인원들의 주위로 강렬한 광휘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시작하겠습니다.”
류신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