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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질 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아무리 쏟아져 내려도 단단한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성주의 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성주와 일반 백성이 쓰고 남은 자재로 얼기설기 만든 좀비굴의 집들은 이토록 억센 비를 맞으면 천정이 무너져 내린다.
쏴아아아.
물에 젖은 짚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쪽이 무너져 내린 천장 아래에서, 비를 피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동자엔 어떠한 슬픔이나 괴로움도 없었다.
괴로움과 고통은 가장 순수해야 할 아이를 황폐하게 만든다.
울어도 들어줄 이 없고, 괴로워도 바뀌는 게 없는 현실을 깨달은 아이들은 울음으로 인한 배고픔을 줄이기 위해 어떠한 슬픔도 표현하지 않는다.
눈을 끔뻑거리며 아무런 생각도 가지지 않은 채 하늘을 바라보던 아이의 눈동자에 이체가 어렸다.
덜컹
바닥에 무너져 내린 나무 기둥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하더니 둥실 떠오른다.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나무들은 중력을 거슬러 올라 지붕을 잇기 시작한다.
더불어 지붕 밖에서도 새로운 나무들이 날아와 지붕을 보강하고 검은색의 천과 짚단들이 부족한 부분을 메운다.
그 황홀한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쏜살같이 밖으로 나간다.
문 앞에는 아이 몸통만한 가방이 놓여져 있다.
가방을 열자 안에는 베이컨과 빵등이 들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가방 안을 보느라 정신없는 사이,
가장 먼저 밖으로 나왔던 아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 인형을 향해 외친다.
“다크!”
아이가 외친 방향엔 온 몸을 감싼 검은 로브를 쓴 형체가 걸음을 멈춰서고, 슬쩍 고개를 돌린다.
그림자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손을 흔드는 것이 아이의 시선에 보였다.
“고마워! 다크!”
다크라 불린 형체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골목길을 걷는 다크는 세찬 비에도 씻겨나가지 않는 거리의 오물들을 보고 있었다.
‘더러워, 기본적인 위생시설이라도 갖출 수는 없는 건가?’
천부인권설을 부르짖으면서도 봉건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이 세계에는 빈민가의 사람들을 위해 투자를 하지 않는다.
배수시설이 되지 않은 곳에 하수시설까지 존재하지 않으니 이곳의 사람들은 아무 곳에나 용변을 보고 치우지 않는다.
검은 로브 한쪽이 슬쩍 들리자 그 안에서 완드가 튀어 나왔다.
[클린 업]
완드에서 퍼져나간 검은 빛이 물의 파장처럼 넓게 퍼져 나간다.
오물들은 흐르는 물에 쉽게 휩쓸려 떠내려가기 시작한다.
그제야 다크라 불린 사내는 천천히 골목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참을 걷던 그의 눈에 좀비굴에 유일하게 불이 켜진 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를 여닫는 문은 누군가의 싸움에 부서져 나가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유쾌한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직업의 정체성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매일 술집에 처박혀 있는 하급 용병들.
세차게 내리는 비를 피해 산을 내려온 산적 떼.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술로 풀기 위해 묵묵히 맛이 간 맥주를 마시는 농노들과.
천박한 옷차림과 화장으로 그들을 유혹하는 창녀들까지.
이 성안의 가장 천박하고 저열한 인간들이 가득한 곳임에도 누구 하나 서로를 멸시하거나 경멸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서로가 모두 비슷한 입장.
다크가 술집을 가로질러가자 용병들과 산적들이 마시던 술잔을 내밀었고, 창녀들은 다크를 유혹하는 척 주머니에서 동전을 빼내기 위해 몸을 부볐다.
다크가 모두를 물리치고 바에 앉았다.
“로잔이 너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그 애를 위해 하룻밤 정도는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지 그래?”
“로잔 실력이 늘었어. 오늘은 50페소나 가져갔네.”
다크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세며 말하자 턱수염의 바텐더가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미쉘이 매일 훈련시키고 있거든. 너도 언제 구경해봐. 가슴 큰 애 둘이 서로 몸을 비비면서 주머니를 터는 모습이 얼마나 재밌는데.”
“그럴까? 요즘엔 나한테 유혹하는 시늉도 안 하더군. 자고 있을 때 당당히 가져가던데.”
“크하하하하! 역시 기술이 대단하네! 주머니를 털어가도 못 깰 정도로 혹사시키는 건가! 크하하하하하!”
“닥쳐 털보. 재미없으니까.”
“그나저나 왜 자꾸 애새끼들을 도와주는 거야. 그것들 숫자만 늘어나면 나중에 골치 아프다고.”
“애들 때문에 인테리어 공사비가 안 모여? 공사는 내가 도와줄게.”
다크의 말에 바텐더는 얼굴을 정색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설마 마법을 쓴 건 아니겠지?”
“집이 부서져 있더라.”
다크의 말에 바텐더가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미쳤어? 정체가 들키면 어쩌려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마. 어차피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마나 감응기도 꺼두니까.”
“조심해. 들키는 순간…… 으흠.”
말을 잇던 바텐더는 옆에 앉은 새로운 손님에 의해 입을 다물었다.
“나 올라갈 게 마스터.”
“내 말 명심해!”
바텐더의 말에 손을 휘휘 저은 다크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아래층의 창녀들과 마찬가지로 천박한 화장에 천박한 옷차림을 한 미쉘이 나타났다.
다크는 코르셋으로 가뜩이나 큰 가슴을 더욱 부풀리듯 치켜올린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이제 손님 받지 말랬지?”
다크의 말에 미쉘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제일 큰 손님 받으려고 차려 입은 건데.”
미쉘은 다크를 방 안으로 끌어 당겼다.
* * *
한바탕 열기가 가신 방 안엔 창틈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통기성이 좋지 않은 모포를 걷고 맨다리를 드러내고 있던 미쉘은 다크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집어넣으며 다크의 품 안에 안겼다.
“추워.”
다크는 자신의 상처투성이인 가슴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쉘은 다크의 가슴에 흉측한 흉터들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그의 눈동자까지 시선을 옮겼다.
“아름다워.”
미쉘의 말에 다크가 그녀의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대륙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눈이야.”
미쉘은 멍하니 흑요석 색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거야. ……자신들은 가질 수 없어서.”
미쉘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다크의 입이 무겁게 움찔 거렸다.
“……해.”
다크의 눈동자에 취해 있던 미쉘이 제대로 듣지 못하고 되 물었다.
“응?”
다크가 다시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랑해.”
다크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그를 바라봤다.
미쉘의 행동에 두려워진 다크가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흔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안 되는 거야?”
그의 음성은 종전과는 달리 심하게 가볍고 떨렸다.
미쉘은 대답대신 다크의 몸 위로 오르며 그를 껴 안았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다고 네 그 말.”
그녀의 온기가 전해진다.
피부와 피부를 지나 그 안의 느끼지 못하는 뜨거운 온기가 전해진다.
다크는 이세계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따뜻함을 느꼈다.
다크의 눈에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다크의 눈물이 자신의 몸에 닿자 미쉘은 안았던 팔을 풀고는 다크에게 깊게 키스했다.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까 벌을 받아야지.”
미쉘이 다크를 다시 눕혔다.
다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푸욱.
그때, 기괴한 음성과 함께 핏물이 미쉘의 얼굴로 튀어 올랐다.
“…왜?”
다크는 자신의 심장에 깊게 박힌 단도와 그 단도를 들고 선 미쉘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기다렸어. 네가 날 사랑할 때까지. 그래야 널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 있잖아?”
다크의 심장에서 뿜어진 피가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미쉘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 * *
한연맹의 부지 입구 앞으론 한 개의 도로만이 정비되어 있었다.
방어를 위한 차단선이나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계 인물들에게 있어 민간인들의 차단선은 의미가 없었으니까.
대신 시우의 강력한 마법이 부지 전체를 감시, 통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입구에는 그저 평범한 주차 차단기만이 존재했다.
‘차단선이 있었어야 했을 지도.’
좁은 도로를 따라 수백 명의 강호맹 무인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김준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맹주님을 만나 뵐 수 없으니 돌아가시죠.”
“동맹을 이리 대할 수는 없는 것이외다. 어서 한연맹의 맹주를 만나게 해주시오.”
김준상은 강형산의 말에 기가 찼다.
‘숫제 동네 강아지를 부르는 것도 아니고 지들이 뭐라고…….’
성질 같아선 당장에라도 판을 깡이라도 부리고 싶었지만, 엄중한 이 사태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진정한 동맹이라면 이토록 많은 무인을 이끌고 무력시위를 하러 오지 않겠지요. 서로간의 얼굴 붉힐 일을 만들기 전에 그만 돌아가십시오.”
“뭣이야! 감히 우리와 싸우겠다는 말인가!”
김준상의 말꼬리를 붙잡고 싶은 듯 강형산은 버럭 화를 냈다.
그때 옆에선 단청이 말리듯 나서며 말했다.
“소제.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현 사태의 중요성 때문이오. 무력시위라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소.”
김준상은 단청의 말에서도 욕지기가 튀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어떤 중요한 일 때문입니까?”
“어… 그건….”
단청이 뒤를 보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대신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게 극비요. 극비라 말해줄 수 없소이다.”
“그렇다면 맹을 통해 직접 연락을 하시고 오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저는 결정의 권한이 없습니다.”
김준상의 말에 강형산이 다시금 나섰다.
“이미 공식적인 연락이 되지 않아 이리 찾아 온 것 아니냐! 네놈이 우리 강호맹을 무시하는 것이냐!”
“절차 무시하고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자체가 비상식적인 일이라 생각되는 군요. 강호맹은 한연맹을 진정한 동맹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겁니까?!”
강형산이 결국 검을 뽑아 들려 하자 김준상도 정령을 소환했다.
강형산의 어깨 위로 불을 뿜어내는 정령이 나타나자 강호맹의 무인들이 모두 움찔 하는 모양새였다.
“잠깐!”
그때 단청이 나서며 말했다.
“그럼 그것만 알려주시오. 맹 내에 맹주가 상주하고 있소?”
단청의 물음에 김준상이 고개를 저었다.
“맹주님의 행적은 한연맹 내의 특급 기밀입니다.”
그 말에 강형산이 이죽거렸다.
“개미만한 조직이 별게 다 기밀이군.”
“…뭐라 하시었소?”
김준상이 스산하게 살기를 뿌리며 말했다.
“흥! 그따위 것도 살기라고 뿌리는 것이냐?”
강형산이 강력한 살기를 뿌리며 김준상을 압박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김준상은 꽤나 의연하게 살기를 버텨냈다.
[파이어 미사일]
김준상의 주위로 커다란 불의 미사일이 생성되었다.
순식간의 생성된 열 두 개의 불의 미사일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했다.
“진정 해 보시려는 겁니까?”
김준상이 오연하게 말하자 강형산의 얼굴이 구겨졌다.
“네 이놈! 내가 감히 누군 줄 아는 것이냐!”
강형산이 순식간에 아홉 개의 분신을 만들며 김준상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동시에 그의 검에선 열두 개의 매화가 피어나며 섬뜩하게 김준상을 노리기 시작했다.
김준상이 뒤로 물러나며 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했다.
새롭게 만들어진 파이어 미사일은 파이어 애로우보다 훨씬 속도가 느렸다.
열두 개의 매화는 미사일 사이를 피해 김준상에게 다가갔다.
섬뜩한 매화가 김준상의 몸에 닿기 직전.
파츠.
강형산은 미세한 전류가 온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츠츠츠츠. 펑펑펑펑.
김준상의 뒤편에서 날아든 하얀 섬광이 순식간에 열두 개의 매화를 소멸시키고 강형산의 검에 작렬했다.
“끄아아아아아아.”
수식간의 엄청난 양의 전기 충격에 강형산은 소리를 지르다 바닥에 쓰러졌다.
척척척척척척척.
일제히 발 맞춘 걸음걸이가 한연맹의 입구를 향해 다가왔다.
맨 앞에 선 아름다운 여인이 전기 충격으로 기절해 버린 강형산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이 시간 이후로 한연맹의 땅에 발을 행위를 자의성 강한 적대적 행위라 생각하고 즉시 사살하겠습니다.”
한세아의 말에 얼이 빠진 단청이 물었다.
“우린 동맹입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습니까?”
“불순한 의도를 보인 순간부터 우리의 동맹은 이미 깨어졌습니다.”
한세아가 차가운 표정으로 서늘하게 말했다.
단청을 비롯한 강호맹의 대표로 온 인사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