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침묵이 이어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장송계였다.
“확실한 것이오?”
장송계의 물음에 그에게 시선을 쏟던 이들이 일제히 진문형을 바라봤다.
진문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라검문을 통해 확인했소. 또한 거래를 위해 한연맹에 방문했던 실무단들이 보내온 보고를 바탕으로 확실하게 확인했소.”
“결국 그 이야기는 혁련교주의 일과 관련된 것이오?”
“그렇소.”
진문형의 답변에 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거두고 자기만의 생각에 빠졌다.
“우린 어디까지 예상해야 하는 것이오? 사망까지요?”
“그건 아니라 생가되나, 제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오. 마교가 사용하는 마기는 상대에게 지독한 후유증을 남기기로 유명하잖소.”
“결국 두 사람은 싸웠다는 얘기가 되겠구려.”
진문형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사람이 이토록 동시에 칩거할 일이 없지 않겠소.”
“그렇다면 그 최시우란 자가. 혁련교주와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오?”
계상학의 이야기에 장내의 인물들은 불현듯 몸서리를 쳤다.
혁련 교주와 비슷한 수준의 존재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본토인 중국이 아니라 변방의 소국인 한국에서 그런 인물이 나왔다는 건 더더욱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니라 생각되오. 맹 내의 정보부에서 지금까지의 정보를 바탕으로 취합해 본바. 마법적 특성이라는 특수성은 있지만 가공할 파괴력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말이 안 되는 것들이 많은 것 아니오? 한연맹은 반쪽짜리 인원으로 야토가미의 주 전력을 상대했고, 사천신들 중 두 명이나 제거했소. 이것을 단순히 마법의 특수성이라는 것으로 단언하긴 힘들다고 생각하오.”
술법가답게 분석력이 뛰어난 계상학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연맹에서 그자가 보여준 그 마법 기억하시오? 우리가 언제나 느껴왔던 기를 없애고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창을 만들었던.”
안 좋은 기억이었던 듯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잊을 수 있겠소. 악몽 같은 일이었는데.”
“그렇소. 마법적 특수성이란 그것을 말하고 싶은 거요. 한연맹이 야토가미를 상대했다곤 하나 피해 규모가 컸소. 더구나 나루카미는 태백 정가가 태백검진을 이용해서 죽였다는 게 확실하다는 정보까지 있소. 결국 마법은 상대적 특수성을 가진 힘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존재적 파괴력까지는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정보부의 분석 결과였소.”
진문형의 말에 계상학은 자조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다 해도, 혁련교주와 양패구상했다면 절대 얕볼 수 없는 힘이오.”
거듭 되는 계상학의 부정적인 말에 진문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계 문주가 보기엔 혁련 교주의 무공은 천외천의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소.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그리 높은 경지는 아니오.”
“…….”
“뭣이오!”
진문형의 말에 계상학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아, 흥분하지 마시오. 기분 상하라고 한 소리가 아니라 그저 현실을 말한 것뿐이니.”
계상학은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진문형의 과한 언사에 다른 누군가 나설 법도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런 반응이 계상학을 더욱 비참하게 했다.
‘빌어먹을 놈들.’
처음부터 모산파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모산파는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중소 문파들에 비해서도 한참이나 떨어지는 작은 문파.
한 번도 부각된 적 없고, 크게 부흥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야토가미라는 존재가 등장하고 그들의 귀술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중국 상계에서 자신들이 유일하다는 것이 밝혀진 후부터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짧은 기간 부피만 확장한 세력은 결국 단단한 지지기반이 되어주지 못했다.
더구나 한연맹과 야토가미의 전쟁으로 야토가미의 세가 기운 가운데, 강호맹에서 귀술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강호맹에겐 모산파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은 아득히 먼 미래라 생각했건만, 벌써부터 이런 취급을 당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래 좋다. 하지만 그냥 끝나진 않을 것이다.’
계상학이 더 이상 말이 없자 진문형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잠시 말이 샜소. 해서 정보부는 두 사람이 싸웠고, 두 사람 다 회복이 쉽지 않은 중상을 입었다는 견해를 내놓았소.”
“허나 그렇다 한들 달라질 것이 있겠소? 우린 이미 한연맹과 협약을 맺었고, 어찌 말하면 동맹과 같은 입장 아니오? 혁련교주와 최시우 간의 대결은 두 사람의 일만으로 끝난 일로 보이는데. 굳이 우리가 그 일을 회의에서 논의할 이유가 있소?”
계상학이 분해하는 것을 안쓰럽게 보던 점창의 정산명이 가볍게 항의하듯 이야기했다.
진문형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방금 말한 마법의 특수성 때문에 말하는 것이오.”
“…….”
“정보부의 예측으로는 한연맹의 최시우가 강호맹보다 야토가미의 귀술을 더 빠르게 분석해 낼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그게 진짜요?”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지 않소? 포로 대부분은 우리가 데려왔고, 아주 일부의 인원만을 한연맹이 맡기로 했는데.”
사람들의 소란에 진문형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최시우. 그자는 이미 야토가미의 귀술을 막아 내는 무기를 만들어 냈소. 이미 야토가미 귀술에 관한 이해가 우리보다 훨씬 높다는 말이오.”
진문형은 말을 하면서 비교하듯 계상학을 슬쩍 봤다.
계상학은 진문형의 말과 눈빛에 더욱 분해했다.
“그런 그가 우리보다 늦을 거라는 건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소. 또한 우리보다 늦는다 하여도 한연맹까지 귀술을 가질 필요가 있겠소?”
“!!”
“지금……!”
“허허.”
진문형의 말에 문주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계상학이 말을 듣다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아시오? 아무리 맹의 이익을 위해서라지만 이제 막 동맹을 맺은 이들을 아무런 명분 없이 배신한다니. 강호의 동도들이 이걸 납득할 것 같소?”
계상학을 바라보던 진문형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아, 물론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자는 건 아니오. 다만 최시우 그자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은 해 볼 수 있지 않겠소?”
“음…….”
문주들은 다들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모두들 그의 말에 동의는 하고 있었지만, 그 뻔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여간 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침묵이 길어져 갈 때.
소림사의 명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승은 맹주의 말에 동의합니다.”
“오오! 그렇소?”
명진의 말은 다른 문주들에게도 의외의 말이었다.
젊은 나이에 방주로 추대되어 강호맹에 와 있었지만 명진은 단 한 번도 개인과 자신의 세력의 이익을 위해 나선 적이 없었다.
언제나 중도의 선 자세로 공익을 위해 의견을 내던 자였다.
“그가 아직 적은 아니지만, 그에 대해 확실하게 알아 둘 필요는 있다 생각합니다.”
명진의 의외의 말에 계상학이 물었다.
“방주는 어찌 그렇게 생각하시오? 맹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도 우리와 함께 하는 동도들의 의견 따윈 상관없는 것이오?”
명진이 계상학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어가는 명진.
“다만, 제가 본 최시우는 혁련 교주보다 더욱 짙고 깊은 어둠을 가진 자였습니다. 아직은 혁련교주에 비할 바는 못 되더라도 장차 그가 성장할 경우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
“그런 점에서 맹주의 의견이 맞는 것 같다 생각한 겁니다.”
명진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자 더 이상 반대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장송계가 주의를 요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해선 안 된다 생각하오. 어찌되었든 현재로썬 동맹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해서 처음엔 가볍게 알아보기만 할 생각이오.”
* * *
남궁혜자의 시선은 시우의 연구소 앞에 목석처럼 서 있는 정소빈에게 가 있었다.
소빈은 며칠째 대부분의 시간을 저렇게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남궁혜자는 소빈에게 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 한연맹의 모두의 마음이 그녀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휴…….”
그녀가 작게 한 숨을 내쉴 때.
한세아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 소식이 없느냐?”
남궁혜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그녀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한세아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매일 빌리언트를 통해 물어보고 있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다 되었는데 괜찮은 거냐?”
“빌리언트의 말로는 이상징후가 포착되기 전까지는 괜찮다고 합니다.”
“겨우 한 고비를 넘겼다 생각했거늘. 여전히 풍전등화 구나.”
탄식하던 남궁혜자가 한세아를 바라봤다.
“그래 무슨 일이냐?”
“강호맹 측에서 야토가미 귀술에 관한 연구 교류를 목적으로 최시우 님과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음. 어찌 생각하느냐?”
“단순한 교류를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벌써 눈치챘음인가…….”
남궁혜자의 얼굴엔 수심이 깊어졌다.
“다른 이를 대신 내보낼 수는 없는 것이냐?”
“빌리언트가 내용의 대부분을 알고 있지만, 빌리언트의 존재를 세상에 내보일 순 없기에…….”
“뻔히 보이는 수에 속아 넘어가 줘야만 하는 것인가?”
“그래도 최대한 시간은 끌어야 합니다.”
“이제 막 동맹이 체결됐다. 그것을 뒤엎기엔 그들도 리스크가 너무 클 것이야.”
남궁혜자의 말에 한세아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만약 제가 강호맹의 맹주라면……. 지금 당장 한연맹을 치겠어요.”
한세아의 말에 남궁혜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얘기해 보거라.”
“한국 상계는 비상식적일 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였습니다. 그 와중에 큰 성장통을 겪긴 했지만, 결국 그 일로 인하여 연맹이라는 커다란 단체를 이뤘고, 커지기 위한 기반을 모두 다졌어요.
더구나 지난 100년간 강호맹을 두렵게 만들었던 야토가미를 무찔렀습니다. 제가 호랑이는 자신의 산에 자라나는 호랑이를 두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클 가능성이 있다면 애초에 잘라내는 것이 최상책이죠.”
“하지만, 시우 그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른 채 섵불리 행동하지 않을 거다.”
“그렇기에 더더욱 확인하고 싶어 할 겁니다. 마교의 교주가 이곳에 들렀고, 저희가 아무리 함구해도 결국 이야기는 새어 나갈 거예요. 결국 의심은 확신으로 바뀔 거고요.”
“……단지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 가능 하겠느냐? 어차피 시우가 나오지 않으면…….”
남궁혜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저희가 지금 해야 하는 건. 시우 님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올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겁니다.”
생각에 잠겨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나오는 답은 없었다.
남궁혜자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방법을 생각해 두었느냐?”
* * *
“답변이 왔소.”
진문형이 말하자 각파의 문주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지금은 집중 연구 중이라 특별한 일을 제외하곤 외부 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하오.”
“음…….”
애매했다. ‘특별한 일을 제외한다’와 칩거에 대한 ‘자의성’ 무엇하나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채 무수히 많은 가능성만을 남겨 두었다.
“그리고 우리 쪽 무인에게 은근슬쩍 ‘야토가미’의 힘에 대한 것이라는 힌트를 줬다 하오.”
“그렇다는 건 한연맹이 강호맹보다 더 빨리 야토가미의 힘을 쓸 가능성도 있다는 것 아니오?”
장송계의 말에 계상학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마도 이걸 노린 것 같소.”
“무슨 말이오?”
“우리가 늦을 수도 있다는 조바심을 이용한다는 말이오.”
진문형의 말에 장송계 등은 깨달음이라도 얻은 얼굴이었다.
“그럼…….”
“확실하오. 최시우 그자는 지금 밖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오.”
최시우가 밖으로 나서지 못한다 해도 강호맹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의 반경은 넓지 않다.
명분 없는 싸움은 연맹의 결속력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야토가미의 힘이 약해져가는 지금 강호맹 자체의 힘이 점점 느슨해지는 것도 사실.
“명분을 만들도록 하겠소.”
“어찌 말이오?”
“한국에 있는 강호맹의 맹도들을 이용할 생각이오.”
“……무력시위처럼 보이지 않겠소?”
누군가가 자신 없게 흐리듯 이야기를 했다.
진문형의 그의 물음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을 놓치면, 우리에겐 천추의 한이 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