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사경을 헤매던 정현미는 소빈이 먹인 포션들로 인해 정신을 되찾고 깨어났다.
깊은 상처에도 포션을 뿌리면서 조금씩 회복이 되어갔지만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정현미는 소빈의 품에 안겨 어둠 속에서 야가미와 싸우고 있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야가미가 만든 어둠의 공간은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제약이 없고, 위아래가 구분이 없어 마치 무저갱에 들어온 듯했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 선명하게 보이는 동료들이 영문을 모른 채 쓰러져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신적 압박감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 중 하나였다.
자신과 동료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니 야가미의 공격은 그 실체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이것이 무인이기 전에 사람을 혼란시키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시우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아름답구나.’
무인들끼리 모이면 대부분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중 하나가 동작에 대한 이야기다.
무공을 목적은 나 자신에 대한 보호를 넘어 상대를 힘으로 굴복시키고 심할 경우 그 목숨을 빼앗는 것까지를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에 실전에서는 초식의 화려함보다는 동작의 효율성을 더 극대화하는 것을 대부분 선호하는 편이나.
무공이란 것은 결국 도를 이루는 것이고 도란 자신의 올바른 자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의견에는 결국 동작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또한 무공의 목적이라 생각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결국 무공의 과정에 대해서 논하는 이는 실질적 동작과 아름다운 동작이라는 두 가지 논점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한 무인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결국 효율적이과 정확한 동작은 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운 동작은 최고의 효율을 나타낸다.
강호맹 소속이었던 이 무인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일본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타국의 상계 인들이 일본에 발을 딛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겁 없는 행동이었다.
내공을 금제하고 혈도를 막아 일반인처럼 코스프레를 한 이 무인은 야토가미의 힘의 정체를 파악하려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여행을 마무리하려다 어느 조그만 초밥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작은 초밥집이라 가격이 얼마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이 무인은 거기에 적힌 상상도 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가격표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고 한다.
야토가미에 대한 원망과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 이 무인은 그 분노를 주인에게 풀어낼 요량으로 음식을 주문했다고 한다.
엄청난 수준의 돈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친절한 기색도 없이 묵묵히 초밥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 무인은 그가 초밥을 만드는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고 했다.
일말의 주저함이나 고민 없이 과감하게 초밥을 만드는 그의 행동은 일견 대충 만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평생 무공을 익혀온 그의 눈에는 그의 행동이 수천 수만 번의 연습과 경험 끝에 만들어진 단련된 행동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더구나 그렇게 만들어져 나온 초밥은 그가 이전에는 먹어보지 못한 극상의 맛을 표현했으며 조금의 부족함이나 넘침도 없이 최고의 만족감을 내었다고 했다.
무인은 결국 말없이 엄청난 수준의 돈을 내고 식당을 나와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전후 중국 상계를 수습하고 강호맹을 정리하여 최장 시간 강호맹의 맹주를 역임했던 검왕(劍王) 동방청의 유명한 일화였다.
정현미는 시우의 움직임을 보며 구전으로만 들어왔던 그 이야기 속 움직임이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시우가 가진 힘은 단순히 마법적 화려함만이 아니었다.
그는 때때로 공격을 허하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했지만 그의 행동엔 초조함이나 불안함이 없었다.
공격할 땐 주저함이 없었고, 물러설 때 두려움이 없었다.
마치 노련한 투우사가 맹렬하게 돌진하는 소를 상대로 춤을 추는 듯 움직였다.
시우가 거인의 손을 소환하여 야가미를 사로잡았다.
야가미는 몸에서 나오는 어떤 힘을 이용해 거인의 손을 부수고 다시 어둠 속에 사라지면, 시우는 지휘하듯 완드를 휘둘러 마법을 흩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가미는 다시금 시우에게 위치를 들켰다.
이러한 팽팽한 결투가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우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고, 야가미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야가미는 점점 구석에 몰리게 되었고, 종국에는 시우의 손에 죽고 말았다.
“야가미…… 분하다. 야가미 힘을 잃어서 그랬다. 야가미…… 분하다.”
시우는 거인의 손에 붙잡혀 있는 야가미를 향해 완드를 휘둘렀다.
그의 몸을 타고 검은 불이 붙었다.
괴로워 버둥거리던 야가미는 종국에 그렇게 불타 죽었다.
야가미가 죽자 어둠이 걷혔다.
숲속은 태백 정가의 무인들이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을 알지 못하는 듯 평화롭게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불에 탄 야가미의 시체를 다크 사이트가 삼키려 하자 시우가 막아섰다.
“안돼. 이건 내 거야.”
그렇게 말한 시우는 완드를 야가미의 시체에 향해 내밀었고, 이윽고 야가미의 몸에선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피어오르며 시우의 완드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빛을 뽑아낸 시우가 돌아서려 하자 다크 사이트가 제 차례라는 듯 야가미의 시체를 건드렸고, 시체는 파사삭 부서지며 가루로 변했다.
크아아아악!
다크 사이트의 불만을 뒤로한 시우가 정현미와 소빈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완드를 품속에 챙겨 넣는 시우를 보며 정현미가 처음 한 대답은 시우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자넨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지?”
“네?”
“자네에게 마법이 없다면, ……그래서 무공만으로 야토가미를 상대해야 한다면 할 수 있겠나?”
뜬금없는 질문을 무시하려던 시우는 다 죽어가는 행색 중에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정현미의 눈을 보고 시우 또한 진지하게 답했다.
“네.”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무공을 익힌 수백만의 이들이 못한 일이었어. 그래도 할 수 있겠나?”
“설사 4,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수천만의 이들이 못해 냈다 하더라도 해내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할 수 있지? 그건 자네가 마법을 익혔기 때문이 아닌가?”
정현미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세워 놓은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태백 정가가 시우와 관계를 가까이할 때 가장 탐탁지 않아 했던 이가 바로 그녀였다.
마법이 아무리 신기하다 해도 그저 화려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우의 마법은 절대 이길 수 없었던 야토가미를 이기고, 절대 넘볼 수 없었던 강호맹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닥치는 이 많은 일들이 그녀에겐 시련으로 다가온다.
깨어지지 않아야 할 그녀의 진리가 바닥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마법을 익혔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시우의 말에 정현미가 ‘그럼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이전에 평생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식으로든 매달렸을 겁니다.”
“……!”
“무공으로 할 수 없다면 술법으로, 술법으로 할 수 없다면 다른 현대 무기를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으려 했을 겁니다.”
정현미를 바라보는 시우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전 제 앞을 가로막는 시련 앞에 도망치지 않습니다.”
시우의 말에 정현미의 음성이 떨렸다.
“하지만…… 넘을 수 없는 시련도 있다. 누구나 그런 것을 맞닥뜨리면 도망칠 수밖에 없지. 어찌 그리 자신할 수 있는 건가?”
“물론 시련을 외면하고 도망치면 편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있으니까요.”
“…….”
시우의 말엔 가시가 있었다.
시우 또한 정현미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적대감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에 대해 단 한 번도 불만을 품거나 불쾌감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피하면서 도망치면서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것이 대부분의 인간이 가진 행동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시우는 정현미를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열등감에 갖혀 있는 인간 따위 무서울 게 없다.
“하지만 어디로든 피할 수 없는 절대적 절망을 겪어 본다면, 진짜 무서운 것이란 시련이 아니라 시련에서 도망치는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절대적 절망…….”
정현미는 시우가 한 말은 몇 번이나 대뇌이다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절대적 절망이란 것을 넘어서려면.”
정현미의 물음에 시우는 가만히 정현미를 바라보았다.
정현미와 시우가 담론을 펼치는 사이 부상자들과 포로들까지도 자신을 건사하는 것을 잊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정현미의 질문은 스스로를 위함과 동시에 태백 정가를 위한 것이었다.
“넘어서야 한다는 목적성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물어보는 것이다.”
“절망적 시련이란 언제나 자신이 잡은 기준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해 낸 절대적 불행의 기준점이 있기에 그것을 넘어서는 절망을 맞이했을 때. 인간은 시련에서 도망치고 절망에서 눈 돌리는 것입니다.”
시우는 오랜만에 알게니하 대륙에 떨어졌던 스스로를 떠올렸다.
아는 이가 아무도 없고 난생처음 듣는 언어와 인종, 문화와 예절 사이에서 시우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어떤 곳에도 기댈 곳 없는 그가 타인의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채이고 까이고 맞는 것을 반복하며 자연적으로 쉬어지는 생명을 이어가며 살아갈 뿐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 닥쳐도, 어떤 시련과 절망이 나를 덮쳐도 그것에 좌절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냉정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언어를 익히고 그 세계의 풍습을 익혔다.
“그저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건 다시 그 안에 빨려 들어가기만 할 뿐입니다. 언제까지 벗어나겠다. 언제까지 이겨내겠다는 그 목적성이 스스로를 다시금 좌절 속에 빠뜨리는 겁니다.”
마법을 익혀 스스로를 보호했다.
시우의 머리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좋은 학교이긴 했지만 성적은 반에서 중간을 넘어 본 적이 없었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고 사색이 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세계에서 새로운 언어를 익히고 그 세계의 학문의 정점에 있는 마법을 익힌 다는 것은 글자도 제대로 떼지 않은 아이가 박사과정의 공부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하는 겁니다. 언제까지라는 목적성이 아닌. 지금 이 순간.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전력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 일을 해내는 겁니다.”
그저 매일 매일, 매 순간 매 순간.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몇 없는 친구들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 오직 이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해 살았다.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진척이 없어도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순간순간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며 계속 나아가는 겁니다. 우빈이 고모님이 찾는 그 ‘무언가’는 바로 그것일 겁니다.”
좌절과 실패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감상에 젖는 것도 사치였다.
흑마법을 익힌 다크 위저드였기 때문에 살고자 마법을 쓰는 순간 또 다른 낙인을 받고 쫓기는 것에 반복이었다.
홀로 수백만에 달하는 적들에게 쫓기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전투에서의 패배에도 낙심할 순간이 없었다.
다시 일어서서 도망치고 싸워야 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시우를 만들어냈다.
“그런가…… 그것이 다른 것인가……? 하지만……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정현미는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과연 그가 말하는 차이점이 단지 그것일 뿐이던가?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1년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야가미의 죽음을 목도할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절대적이고 강력한 적에 대한 이미지가 그녀의 머릿속에 흔들림 없이 박혀 있었다. 바로 야토가미.
하지만 그 야토가미가 수수깡으로 만든 모형 집처럼 박살이 났고, 이제는 야토가미의 압제 속에 있던 포로들을 구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봐온 최시우는 앞으로 어떤 적이 나타나도 굴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그녀에게 절대적 시련과 절망을 주는 것은 야토가미나 강호맹이 아닌 최시우 같았다.
“어찌하면, 어찌하면 무공으로 너를 이길 수 있느냐?”
정현미의 질문에 시우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는 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난 알고 싶다. 내가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우리 태백 정가에서 너를 뛰어넘는 아이가 나왔으면 좋겠다.”
바닥까지 내보인 그녀에게 더 이상 자신의 속내를 훤히 보인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제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오직 저를 뛰어넘을 일념 하나로 삶을 살아가는 것. 오직 일념(一念). 그 하나만으로.”
시우의 말에 정현미와 태백 정가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정현미를 안고 있던 정소빈이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서, 설마.’
시우를 바라보던 정소빈은 눈을 감고는 계속 몸을 떨었다. 그녀는 마치 혹한의 추위 속에 홀로 있는 듯 몸을 떨다가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듯 땀을 흘렸다.
시우가 손을 뻗자. 소빈의 품에 안겨 있던 정현미가 둥실 떠올랐다.
“뭔가 얻은 것일까요?”
모른 척 웃는 시우의 음성은 정현미의 귓가를 스쳐 갈 뿐이었다.
자신의 몸이 둥실 떠 있는 것도 잊은 채 정현미는 오직 소빈만을 보고 있었다.
‘그래, 이 아이다. 이 아이야말로 태백 정가를 다시 세우고 시우를 넘어설 아이야.’
정현미의 눈가엔 절망이 지워지고 희망의 빛이 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