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깊은 밤.
숲속을 이동하는 일단의 무리들은 발에 밟히는 낙엽 소리마저 죽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고, 가슴이 답답할 만큼 숨을 작게 쉬었다.
적의 용태를 파악하기 위해 급하게 꾸려진 수색조는 달의 위치가 한 뼘은 이동했음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휴대폰은 재머 사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어떤 방향으로 돌려봐도 전파가 잡히지 않았다.
무리의 가장 앞선 정현미는 다시금 검을 고쳐 잡았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신체는 한계에 다다른 듯 잔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뚝.
그때 누군가 나뭇가지를 밟고 소음을 냈다.
사람들은 갑작스레 천둥번개의 굉음이라도 들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뭇가지를 밟은 노인은 대역죄라도 지은 것처럼 바르르 몸을 떨었다.
노인을 비롯한 포로였던 상계인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제길…….’
정현미는 40명에 달하는 노인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과거 무인이었다고는 하나 무공이 금제 당한 채로 수십 년을 살아온 이들에게 무인들과 같은 기민한 동작으로 움직이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시우의 연구소에선 야토가미의 금제를 풀고 있었지만, 간단한 방법이 아닌지라 하루 두 명꼴로 금제를 풀었을 뿐이었다.
‘어쩌지…….’
미화관의 주도로 첫 번째 구출조가 혁혁한 성과를 내면서 정현미는 두 번째 구출조를 자처했다.
한 세계를 이끌어 가는 주도적 세력이란 것은 단순한 힘의 크기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신뢰와 경외에서 오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이란 단순한 힘과 재산의 분배를 뜻하는 것이 아닌 구성원들의 신뢰를 얻는 작업인 것이다.
그랬기에 태백 정가는 오랜 시간 한국 상계에서 절대적 존재로 버텨왔다.
하지만 미화관이라는 새로운 세력의 최시우란 존재가 경외에 가까운 힘을 보여주고.
포로의 구출이라는 상계에 대한 신뢰까지 보여주면서 한국 상계에는 새로운 세력인 미화관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암암리에 돌고 있었다.
물론 태백 정가의 소속인 정현미가 있는 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얼간이들은 없겠지만.
소문이란 나는 새보다 빠르고 공기보다 더 빽빽하게 인간 사이를 채우지 않던가.
첫 번째 구출조와 그들이 구출해 낸 사람들 앞에서 한국 상계의 무인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며 정현미는 절박한 위기감을 느꼈다.
정현미는 자신과 뜻이 맞는 태백 정가의 정예들을 고르고 골라 구출조를 구성했다.
미화관과 보타암, 그리고 여타 상계의 문파들도 지원했지만, 정현미는 태백 정가의 무인들이 책임을 다하고 싶어 한다며 양보를 부탁했다.
그렇게 구성된 두 번째 구출조는 성공적으로 신사를 파괴하고 야토가미의 잔당들을 처리하는 한편 포로들을 구출해 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숫자가…….’
약속한 대로 지원조를 만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정현미의 눈앞에 걸린 것은 포로들의 숫자.
스물이 안 되는 숫자에 정현미는 순간적으로 심한 갈등을 했다.
첫 번째 구출조가 구해온 포로들의 숫자가 서른.
태백 정가의 정예들로 이뤄진 자신들이 그보다 못한 숫자를 데려간다면 한국 상계는 결국 태백 정가가 미화관보다 못 하다는 인식만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일정이 틀어진다면 지원조까지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아요.”
갈등하는 정현미를 바로 잡은 것은 일행으로 따라온 조카인 정소빈이었다.
최근 들어 태백 정가의 검이 아닌 최시우의 검을 익히고 있다는 점 때문에 개인적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갑작스레 무위가 급격히 높아지는 것을 보며 구출조의 합류를 대환영했었다.
정소빈의 말 대로 자신들의 실수가 지원조에게까지 위험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정현미는 결국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때.
“바로 옆 산에도 동료들이 붙잡혀 있습니다. 그들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본래는 한 신사에서 함께 일하던 이들이 새로운 신사가 생기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친우를 그리워하던 노인의 말이 결국은 정현미의 마음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정소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계를 위해 희생한 포로들을 단 하루라도 더 야토가미의 땅에 둘 수 없다는 정현미의 말에 결국 구출조는 또 다른 신사를 향해 나아갔다.
포로였던 노인들에 의해 무리의 속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무인들의 도움을 받아 시간은 크게 지체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째 신사를 공격하여 포로들을 빼 내올 때.
그 악몽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잠시 악몽 같은 존재를 떠올렸던 정현미가 생각을 지우듯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움직인다. 계속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그때, 소빈이 표횰한 신법으로 정현미 옆에 나타났다.
“뒤에 부상자들이 있어서 움직일 수 없어요.”
“엎고서라도 간다. 계속 여기 있다간 당하고 말아.”
“그렇게 되면 대응 인원들이 부족해요. ……이미 너무 많이 죽었어요.”
“…….”
정현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잠시간 말이 없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빈이 너는 정가의 사람들을 이끌고 지원조에게 가거라. 내가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남아 있겠다.”
“고모! 그건 안돼요!”
“가서, 도움을 요청해라. 연락해서…….”
정현미의 음성은 서글픔으로 가득했다.
‘결국 태백 정가는 그 아이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인가?’
“최시우란 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거라.”
정현미는 스스로 말을 내뱉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지 입술을 꽉 물었다.
“가거라. 야토가미는 포로였던 이들까지 노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내겠다.”
“그럼 저도 남겠어요.”
“안 된다. 넌 다음 대의 정가를 이어가야 할 몸. 이런 곳에서 헛되이 죽어선 안 된다.”
“정가의 사람으로서 다음 대를 이어야 하는 소가주로서 비굴하게 살아남아 대를 잇는 것보다 이곳에서 죽는 것이 명예롭다 생각해요. 저에겐 지금 이곳에서 싸우는 것이 정가를 이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소빈의 말에 정현미는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아이다. 이 아이가 바로 태백 정가를 다시 세울 아이야.’
정현미는 고개를 저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명령이다. 소가주는 정가의 무인을 이끌고 반드시 구조 신호를 보내도록 해라.”
“하지만…….”
“어서!”
정현미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절박함을 보이며 이야기했다.
“…….”
흔들리는 눈동자, 결의에 찬 표정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듯한 정현미의 단호함에 고민하던 정소빈이 주춤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검은 밤의 유일한 조명이었던 달이 모습을 감추며 사방은 밤보다 더욱 짙은 어둠이 되었다.
“야가미에게서 도망 못 간다. 야가미. 너희들 목 다 부러뜨린다. 너희들 여기서 다 죽는다.”
정현미가 음성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정현미를 공포로 물들게 했던 하얀 가면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깊은 밤이었지만 비상사태에 주요 인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대부분 엉망인 상태로 회의에 참석했고 그중 곽동원이 가장 엉망인 상태로 들어섰다.
오랜 기간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고, 이번 사태에 대한 막대한 책임감을 느꼈고 있는 그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팀장님. 진정하세요.”
전혜성이 옆에서 조용히 곽동원을 진정시켰지만, 곽동원은 전혜성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우와 남궁혜자가 회의실에 들어오자 회의실 문은 닫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남궁혜자가 노기를 숨기지 않으며 쩌렁하게 외쳤다.
“분명 야토가미가 한국에 들어올 때 모든 병력이 들어왔다 하지 않았나요?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수분들이 이곳에 남아 있던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니었나요?”
시우의 목소리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구출작전은 본래 시우를 비롯한 한국 상계의 최고수들을 위주로 시행하려 했다.
태백정가는 물론이고 보타암의 혜광을 비롯한 고수들의 부상이 모두 회복되었고 그들 또한 이번 구출 작전이 가진바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선뜻 나서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더구나 한국 상계 무인들의 숫자가 급격히 준 탓에 더 이상의 손실은 감당할 수 없었기에 고수들을 직접 파견하여 만약에 사태에 대비하려 했던 것.
하지만 아직 강호맹과의 협약이 시행되는 중이었고, 고수들의 출타는 아직 한국에 남아 있는 강호맹의 인원들에게 계기를 줄지도 모른다며 최고수를 제외한 정예들로 구출조를 짜자고 했던 것이 곽동원의 제안이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해외에 나가 있던 인원들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곽동원이 허리를 숙이자 전혜성도 허리를 숙였다.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현 사항을 파악하고 사람들을 구출해야 합니다. 어째서 모르고 있었던 겁니까?”
“사천신 중의 하나인 야가미에 대해선 계속해서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사천신 중에서도 은둔 생활을 지속하는 존재였고, 평소에도 오오가미를 호위하기 위해 황거에 함께 머무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도 그곳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야가미 혼자서 구출조를 습격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저희가 야토가미의 인원들을 조사하고 있을 때. 야갸미가 중국을 치기 위해 대규모의 인원을 이끌고 일본을 떠나 있었다고 합니다.”
“왜 그 소식을 모르고 있었던 거죠?”
“강호맹에서 피해 사실을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습니다. 야가미가 중국 상계를 습격했다는 것도 방금 강호맹으로부터 알게 된 사실입니다.”
“동맹을 맺는 거라면 확실하게 하라고 전해 주세요.”
시우가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습격을 가한 야토가미의 규모는 어느 정도죠?”
“그것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공격받았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모든 신호가 끊긴 상태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 곽동원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미화관의 전투원들 중에 특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지?”
회의에 참석하게 될 줄 몰랐던 김준상이 살짝 놀라며 답했다.
“네? 네.”
“강하훈련을 이수한 사람이 몇이나 되지?”
“마흔 명 정도 됩니다.”
“곽동원 팀장님. 수송기 섭외 가능합니까?”
“네! 최대한 빨리 조치하겠습니다.”
곽동원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하기 시작했다.
“김 팀장 강하 훈련을 마친 이들을 선별해서 곽동원 팀장님 쪽으로 보내드려.”
“알겠습니다. ……시우 님?”
김준상의 물음에 시우가 말없이 바라봤다.
“제가 팀을 이끌어도 되겠습니까?”
“물론.”
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준상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섰다.
* * *
미화관의 강하팀은 특수 훈련을 받은 사람들답게 가장 먼저 준비가 되어 군비행장으로 떠났다.
상계에 들어선 뒤에도 틈틈이 비상 출동 훈련을 해오던 김준상의 훈련에 의한 쾌거였다.
순식간에 전투원이 떠난 이후에 상계의 무인들 중 정예의 요원들이 연무장에 모였다.
선별된 인원들은 인천을 통해 쾌속정을 타고 이동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검은 코트 차림에 완드를 든 시우가 떠날 준비를 하자 남궁혜자가 그의 옆에 섰다.
“남궁 선배님께선 후위 부대를 이끌어 주십시오.”
시우는 함께 가려는 남궁혜자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냐. 너와 함께 가겠다.”
“함께 가면 너무 늦습니다.”
“너에겐 공간을 격하는 술이 있지 않느냐?”
남궁혜자가 언제나 불쑥불쑥 나타나는 시우의 모습을 생각하며 말했다.
“아직 제 수준에선 타인을 함께 이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선배님께서 함께 가시면 비행마법으로 가야 하는데. 아무리 빨리 가도 워프로 가는 것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
남궁혜자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빌리언트!”
시우의 외침과 함께 연구소에서 4개의 은색 파츠가 빠른 속도로 날아와 시우의 팔뚝과 정강이에 안착하며 감싸기 시작했다.
“선배님.”
시우는 결연한 음성으로 남궁혜자에게 말했다.
“제가 반드시 모두를 구해오겠습니다.”
“……부탁한다.”
남궁혜자의 말을 끝으로 시우의 신형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공중으로 치솟은 시우는 허공에 워프 마법진을 생성하곤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영롱하게 빛나던 워프가 사라지고 어둠이 돌아오자.
남궁혜자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말했다.
“꼭 살아만 있거라.”
그녀의 바람은 스스로도 모르게 누군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