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강호맹은 절반의 인원을 사후 처리 인원으로 잡고 한국에 상주하게 했다.
그 대부분의 인원들은 한라검문과 해도문이 맡기로 하여 두 문파에 막대한 재정적 짐을 지우게 했지만, 현재로서 강호맹에 꼼짝없이 매달려야 하는 두 문파는 울며 겨자 먹기로 강호맹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남은 절반의 인원은 대여한 크루즈에 나뉘어 중국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또 한 번 잡음이 발생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혁련 교주.”
“말 그대로다. 본좌는 더 이상 배를 타고 돌아갈 생각이 없다.”
천년마교의 교주가 갑작스레 배의 탑승을 거부하며 비행기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
‘이 빌어먹을 놈의 고약한 심보가 다시 한번 발동하는구나.’
어쩐지 얌전하다고 생각했던 혁련무궁이 아니나 다를까 여행 막판에 개인적 변심으로 일정에 차질을 빚어버렸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소? 비행편은 준비하지 않았는데.”
“본좌의 일은 본좌가 알아서 하겠으니. 알아서들 돌아가라.”
“알겠소. 그럼 그리하시오.”
교주를 호위하는 일부 인원만을 남기고는 배는 출발하기로 했다.
“저 빌어먹을 놈의 변덕. 마교가 준동하지 않고 얌전히 있는 것이 용하다.”
진문형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일까. 계상학이 그의 심경을 거들며 나섰다.
“교주가 저 정도면 많이 참은 거겠지요.”
“많이 참다니?”
계상학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교주가 어디 자리가 불편해서 비행기를 타겠다고 했겠습니까.”
크루즈를 통째로 대여해 한국에 들어올 때도, 가장 크고 화려한 방을 교주에게 주었다.
그가 가장 높은 연배는 아니지만, 힘이 가장 강했고, 자존심도 지랄 맞게 높아 혹여라도 다른 이에게 큰 방을 주었다간 상상하기도 끔찍한 난리가 벌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맹주인 자신에게 배정된 방을 교주에게 넘겼었다.
“다른 속셈이 있단 말이오?”
“모르긴 몰라도 한국 상계에 다시금 찾아가겠지요.”
“……끄응.”
혁련무궁이 잘 참는다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 참은 분노를 속으로 삭일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문제를 일으키면…….”
진문형이 걱정된다는 듯 말을 흐렸다.
최시우가 혁련무궁의 손에 박살이 나건 한국 상계가 반파되건 진문형에게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회담이 겨우 잘 끝나고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에 혁련무궁의 사고로 일이 엎어지게 될 경우 다시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크게 걱정할 필요 있겠습니까? 어차피 교주는 비공식적인 일정이고, 저희들은 공식적으로 회담을 마무리했으니.”
“우린 그저 구경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교주를 핑계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저희에겐 또다시 명분이 생기는 거겠지요.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그 정도 아니겠습니까.”
“호오.”
계상학의 이야기를 듣던 진문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가 한국 상계에서 사고를 치면 칠수록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의 행동을 제재할 필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 고민 그만하시고 술이나 한잔 하시지요. 좋은 술이 많습니다.”
“허허.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려. 어디 나도 한 잔 주시오. 간만에 편안하게 여행을 즐겨야겠소.”
진문형과 계상학의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 * *
“1차적으론 시우 님께서 처음 발견하신 신사를 중심으로 구출 작전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야토가미의 본진의 수복으로 인해 신사와 각 지부들의 경계가 낮아졌다곤 해도 다시금 지휘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있는 만큼 주의를 기울여 작전을 수행할 예정입니다.”
“대원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하고, 하는 김에 실전에 준하는 훈련은 내가 직접 준비할 테니까. 준비들 하라고 해.”
시우의 말에 한세아가 빙긋 웃었다.
물론 미화관의 전투원들이 지금 시우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사색이 되었겠지만, 한세아는 시우의 훈련을 반기는 편이었다.
시우의 훈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식하고 강도가 강했다.
더구나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고 쉴 틈을 주지 않아. 훈련을 한번 받고 난 이들은 며칠씩 악몽에 시달릴 정도였다.
하지만 철저한 훈련의 결과는 확실했다.
이번 야토가미와의 전투에서 사망자가 없는 세력은 미화관이 유일했다.
이 모든 것은 시우의 지옥훈련에 따른 성과.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쉬운 미화관의 입장에선 시우의 훈련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이주해 올 분들에 대한 비자와…….”
한세아가 보고를 계속 이어나가는 와중에 시우가 손을 들었다.
“왜…….”
“손님이 오셨네.”
“네? 손님이요?”
“관주가 좀 나가봐야겠어.”
시우의 말에 한세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김준상과 1팀원들은 꽤 당황스런 얼굴로 자신들의 앞에 선 일단의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중국으로 돌아가고 있어야 할 강호맹의 주요 인사가 떡하니 눈앞에 서 있었던 탓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최시우를 만나러 왔다.”
가운데 선 중년의 사내 앞으로 검은 망토를 둘러싼 사내 하나가 나와 말을 하자 김준상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새파랗게 어리고 아직 젖살이 채 가시지 않은 애송이처럼 보이긴 하지만 최시우는 어쨌든 자신들이 모시는 사람이었다.
가장 앞서 전투에 나서는 사람이었고 상대 보스와 항상 맞붙는 사람이었다.
그런 최시우를 동네 개 부르듯 찍찍 이름을 부르는 중국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속은 하셨습니까?”
“필요 없다.”
“그럼 안 되겠습니다. 최시우 님은 개나 소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
김준상이 가시 돋친 말투로 말하자 망토 사내는 금방 반응을 해 왔다.
“이놈! 감히 어떤 분 앞에서 그따위 망발을…….”
“아! 모르겠고. 약속하고 다시 오든지 하시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김준상의 말에 망토를 입은 사내가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망토가 부풀며 펄럭였다.
“네놈이 명을 재촉했다!”
망토의 사내의 손에서 검은 장력이 쏘아져 나가 김준상의 가슴을 직격했다.
펑!
충격음과 함께 김준상이 뒤로 3미터나 날아가 버렸다.
당연히 한 방에 절명했을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공중에서 바닥에 착지한 김준상의 눈앞에는 직사각형의 주황색으로 만들어진 판이 김준상을 보호하고 있었다.
‘추혼암살장을?!’
망토의 사내는 육 할의 공력을 쏟아부은 장력을 막아낸 김준상을 보며 놀랐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살수를 써!”
김준상의 거친 욕설 음과 함께 그의 팀원들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오냐! 아무래도 건방진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 그 잘난 무공이란 것을 보여 보거라!”
김준상의 손짓과 함께 허공에는 불로 만든 화살들이 빽빽하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허공에 나타난 불화살들은 득달같이 망토의 사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화살들이 망토 사내의 급소를 노리며 공격해 들어갔고, 그때마다 망토의 사내는 어지럽게 손을 놀리며 김준상의 공격을 막아서고 있었다.
퍼퍼퍼퍼퍼퍼펑
전면으로 수십 개의 화살을 쏘아 공격하는 한편 공중으로 불의 창을 쏘아 올리자 망토 사내의 손이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하늘로 쏘아 올린 불의 창들이 돌아올 곳이야 자명한 일 망토 사내는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불화살들이 아슬아슬하게 망토 사내의 급소를 노려 피할 수도 없었다.
망토 사내가 불리한 정황을 보이자 다른 이들도 망토 사내의 싸움에 나서려 했고, 그러자 김준상의 팀원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전투에 나서려 했다.
그때, 중년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손을 뻗었다.
“사라져라.”
중년 사내의 손에서 응축된 검은 장력이 발사되었다.
검은 장력은 수십 개로 이뤄진 불화살을 순식간에 소멸시키고, 불의 창을 소멸시키는 한편 위기감을 느끼고 달려든 팀원들의 정령 공격도 모두 소멸시켰다.
거대한 압력을 품고 날아드는 장력을 보며 김준상은 절망감을 느꼈다.
‘피하지 못한다! 팀원들만이라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령의 힘을 모두 끌어 올린 김준상이 온몸으로 검은 장력을 받아내려는 그때.
공간이 번쩍여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나타난 전륜의 늑대가 순식간에 검은 장력을 입에 물었다.
마치 맹수가 먹이의 목덜미를 잡은 것처럼 검은 장력을 입에 문 늑대는 사방으로 장력을 휘두르며 힘을 약화시켰고, 끝내는 장력과 함께 사라졌다.
중년의 장력이 사라짐과 함께 망토를 입은 사내들도, 중년의 사내도 꽤 놀란 듯한 눈빛으로 전륜의 늑대가 나타난 곳을 바라봤다.
“교주님께서 방문하시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닙니까?”
한세아의 말에 중년의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시끄럽다. 계집. 놈은 내가 온 것을 알고 있겠지?”
“모시라 하여서 소녀가 직접 나왔습니다.”
“가자.”
말과 함께 혁련무궁이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한세아 옆에 나타났다.
그의 귀신같은 신법에 김준상과 그의 팀원들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변했다.
“저, 저게 사람의 움직임 맞나요?”
“들은 적 있다. 그 신법이란 것이 극성에 이르면 귀신처럼 움직일 수 있다고.”
“저희도 저걸 알려 달라고 할까요?”
팀원 하나의 말에 김준상과 다른 팀원들이 도끼눈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미쳤어! 지금 훈련만 해도 혼이 빠질 것 같은데!”
“말조심해! 시우 님은 어디에서나 듣고 계시니까!”
한바탕 소란이 인 후.
정적 속에 다시금 경계를 서던 김준상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어렸다.
‘예전처럼 무력하게 당하지 않았다.’
그는 지옥 같은 훈련을 이겨낸 스스로를 조용하게 칭찬했다.
* * *
시우의 연구소가 위치한 대지의 정중앙은 우연히도 조그마한 언덕 위에 있었다.
연구소 단지, 아직 정식 명칭이 지어지지 않은 이곳에 소속된 이들은 시우가 기거하는 연구소를 센터라 불렀고, 센터 주변으론 다가가지 않는 것을 암묵적인 규칙처럼 지켜졌다.
센터는 본부와는 달리 대외적인 일 외의 상황에만 사용되어왔다.
시우의 기거와 연구가 대부분의 일이었고, 비밀리에 시우와 미팅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센터를 이용했다.
센터를 향해 오르는 혁련무궁의 눈에 센터의 앞에서 오연히 서 있는 시우가 눈에 보였다.
야트마학 언덕 탓에 약간 내려다보고 있는 자세가 된 시우의 모습을 보며 혁련무궁은 미간을 찌푸렸다.
혁련무궁이 한 발을 크게 들었다가 바닥에 대는 순간.
다시 한번 혁련무궁의 신형이 사라졌다.
혁련무궁을 따르던 한세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혁련무궁이 시우 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대략 100미터.
극상의 신법이 한 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10장이라는 상계의 불문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그녀는 과연 혁련무궁의 무공이 얼만 큼의 깊이에 다다라 있는지 가늠하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중국으로 가는 배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릴 만큼 예의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고 들었는데. 네놈에겐 기본적인 예의도 보이지 않는구나?”
“상대가 예의를 보이지 않는데. 내가 보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뒷짐을 진 시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한 태도가 네놈의 명을 줄이는 것이다.”
“천년마교는 강자존을 추구하며 능력만으로 위아래를 따진다고 들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한 것인가?”
“강호맹에선 함부로 강자존이란 말을 하지 않는다.”
“…….”
“강자존의 논리라면 이 세계에 천년마교 외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
혁련무궁의 말을 듣던 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떤 걸 원하지? 마법? 무공? 내 집에 방문한 만큼 대우는 해드려야지.”
시우의 말에 혁련무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혁련무궁은 손으로 얼굴을 집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본좌를 이토록 화나게 하고 겁 없이 달려든 애송이는…….”
그의 들썩이는 어깨 위로 검은색의 아지랑이들이 피어올랐다.
뒤에선 망토 사내들은 혁련무궁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무림에 출타하여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그였다.
그가 이토록 흥분하는 모습은 그들로서도 처음이었기에 도리어 버릇없는 시우의 상태가 걱정되기까지 했다.
“네놈이 처음이다. 거침없는 오만함이라 ……나쁘지 않군. 상으로 목숨만은 붙여주마.”
혁련무궁의 말에 시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걱정이나 해. 뭘 원하지?”
부르르 몸을 떨던 혁련무궁이 우뚝 멈춰 섰다.
펑 하는 진동음과 함께 그의 내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연구소 단지 내에 기거하는 무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네놈의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