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천살지존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최대한 당황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시우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시우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의외로군요. 사실 한국 상계에서도 잃어버린 물건이 있어. 그걸 강호맹에 요청할 생각이었는데.”
시우의 말에 진문형은 반색하며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달마심법.”
“……!”
명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마행공.”
“이놈이!”
혁련무궁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태극심법.”
“허허!”
장송계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자하신공입니다.”
“…….”
진문형은 부글거리는 분노를 참아내고 있었다.
“지금…… 농담하자는 것이오?”
시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저 서로 잃어버린 물건을 되돌려 주자는 것인데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이야기한 무공들은 강호맹에서도 가장 최상위에 위치한 무공들이오. 그것을 한국 상계가 잃어버렸다는 것이오!”
“천살지존검을 강호맹이 잃어버렸다는 증거는 어디 있습니까?”
“……그, 그건!”
“본래 강호맹의 것이었다면,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천살지존검을 익힌 자는 어디 있습니까?”
“과거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진문형의 말이 구차하게 이어지자 시우가 그의 말을 잘랐다.
“피차 증명할 수 없는 것에 심력을 쏟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하지요?”
“크흠! 그렇다면 천살지존검의 진전을 이어받은 자와 이야기하겠소! 우리가 그자를 통해 증명해 보이면 되겠지.”
진문형은 한쪽에 서 있는 우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빈은 갑작스레 시선이 몰리자 당황했다.
우빈에게 몰린 시선을 환기시킨 것은 시우였다.
“어딜 보십니까?”
“천살지존검의 진전을 이은 자와 이야기하고 싶다 하였소.”
“지금 눈앞에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육존의 시선이 시우에게 모였다.
그들의 시선엔 당혹감이 가득했다.
“설마…….”
“……아미타불.”
“그대가 천살지존의 진전을 이었단 말이오? 하지만 내가 알기론…….”
진문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우와 우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친구가 천살지존의 무공을 익힌 건 제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죠. 천살지존의 진전을 이은 사람은 저 하나입니다.”
“진전을 이었다면, 그 무공의 연원이 어디인지 알고 있지 않소?”
“물론 과거 중국 상계였던 무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시우의 말에 중국 측 무인들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만, 천살지존께서 남기신 진전엔 무림을 향한 끝없는 원망과 복수심만이 남아 있더군요. 마지막에 적혀 있기론, 만약 이 땅에서 몸이 회복되어 무림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림에 무공을 익힌 종자를 하나도 남겨 놓지 않겠다는 다짐과 혹여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의 진전을 이은자는 필생의 목표를 단 하나. 무림의 멸살로만 하라는 유언도 남아 있었습니다.”
“……!”
시우의 말에 진문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진전을 이은 전 당연히 그 진전을 이어 가야 했으나, 오랜 세월이 흘렀고, 결국 용서가 가장 큰 복수라는 생각에 유언을 실행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이 적혀 있는 걸 보여줄 수 있겠소?”
“지금 무인에게 비급을 보여 달라는 이야기입니까?”
“그저,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싶소.”
“불쾌하네요. 제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가 과연 있을까요?”
시우가 냉정하게 이야기하자 진문형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진문형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다른 이들에게 보내봤지만 다들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 이자들을.’
생떼를 써서 뺏어도 모자란 판에 발을 빼는 꼴을 보니 심기가 뒤틀리는 진문형이었다.
“그럼, 제 부탁은 없었던 일이 되는 건가요?”
시우가 다시 이야기를 꺼내자. 진문형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하려 할 때.
“그야 당연…….”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한 것 같소.”
갑자기 계상학이 끼어들자 진문형이 말을 잇지 못했다.
“친구이기도 하지만 함께 싸운 전우를 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전우라. 좋은 말이군. 그 단전을 고치는 것 말이오. 우리가 화해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오만.”
계상학이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묻자, 모두들 의아한 눈빛으로 계상학을 바라봤다.
-지금 뭐 하는 짓이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않소.
-그렇다고 아무런 대가 없이 단전을 고쳐주자는 말이오?
-그 대가는 우리가 스스로 취하면 되지 않겠소?
이어지는 계상학의 이야기에 다른 이들은 탄성을 내뱉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생각해보니. 그렇소. 우리가 최 소협에게 실수한 것도 있고, 앞으로의 관계를 돈독하게 이어나가고자 하는 바람에서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오.”
“그것참 반가운 이야기로군요.”
“다만, 우리의 사정을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소.”
“어떤 것이지요?”
“단전을 고친다는 건, 무인들에게 또 다른 심장을 하나 갖는 것과 같은 의미요. 그렇기 때문에 강호맹 내에서도 아주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그가 있는 위치를 알고 있소. 치료를 위해서 우빈군과 시우 소협만이 움직여 주었으면 좋겠소.”
진문형의 말에 남궁혜자가 시우에게 전음을 날렸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렇죠?
-빤히 보이는 함정에 스스로 들어갈 필요 없다. 우빈이도 그 일로 너에게 서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겠죠.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색한 포권을 취했다.
“용단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우의 포권에 육존 모두가 일어나 포권으로 답했다.
“함께 하게 되어 영광이오.”
* * *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육존들이 차에 타자마자 저마다 입을 굳게 다물었다.
차가 출발한 후에야 딱딱하게 굳었던 그들의 얼굴이 펴졌다.
“말해 보시오. 그에게 우리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단전의 비밀을 알려주어야 했는지.”
“아까 느끼셨소? 우리 일대의 기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 나는 그 순간 산소가 없어 숨을 못 쉬는 것 같은 느낌이었소.”
계상학이 끔찍하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하는 말 아니오. 최시우 그자는 마법이라는 특이한 학문을 익히고 있는 데다가 자신의 말론 천살지존검의 진전을 이었다 하지 않았소? 정우빈이라는 소년을 통해서든 직접적이든 단전의 근원에 대해 알아낸다면 우리를 제압할 더 큰 힘을 얻을 수도 있는 것 아니요!”
“그래서 그를 중국으로 데려오자 한 것이오. 생각해 보시오. 야토가미의 술법과 천살지존검에 더해…….”
계상학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잠시 뜸을 들였다.
“……마법까지 가지게 된 강호맹의 힘을.”
“……!”
“……!”
“설마, 마법을 뺏어 내겠다는 말이오?”
계상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영국 왕립마법연구협회의 초대로 유럽의 마법사들을 만난 적 있소. 우린 서로의 기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능력만을 서로에게 보여주고 기초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교류하였소. 아주 간단한 것만 교류하는 정도였지만, 대략적인 마법에 대한 지도는 그릴 수 있었소. 그런데…….”
계상학이 고개를 저었다.
“최시우, 그자의 마법은 다르오.”
“뭐가 다르단 말이오?”
“궤가 다르오. 내가 아는 마법의 형태가 아니었소. 대지에 진을 새겨 넣는 것은 우리 모산파의 아해들도 할 수 있소. 아주 쉽사리 무인들을 속일만한 진은 만들 수 있소. 하지만 기를 조정한다?”
계상학이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이건 다르오. 그는 그 공간 안에서 자신이 신과 같은 존재처럼 서 있었소. 기를 없애고 무기를 만들고 다시 사라지게 만들었소. 그 대부분의 일이 손가락 하나만을 사용한 것이오. 만약 강호맹의 건물 주위, 아니 도시 하나 전체를 그렇게 조종할 수 있다 생각해 보시오.”
계상학의 말에 각 문주들이 눈을 치켜떴다.
“아마도 마법의 효용성은 그뿐만이 아닐 것이오. 우린 천살지존검보다, 야토가미의 귀술보다도 마법이라는 것을 더 탐내야 하오.”
“흠……하지만 그것을 순순히 내놓겠소?”
계상학이 의외라는 듯 진문형을 바라보았다.
“이거 왜 이러시오. 내가 부득불 최시우와 정우빈만을 초대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는 것이오?”
“아…….”
그제야, 깨달은 듯 각 문파의 문주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혁련무궁은 그들을 향해 비웃어 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내 잘 아는 고문 기술자가 있소. 그에게 걸리면 자기 할아버지 애인의 엉덩이 점까지도 알아낸다고 하오. 그가 중국에 들어오는 날이 우리 강호맹이 다시금 새롭게 비상을 시작하는 해가 될 것이오.”
계상학의 말에 각자 입을 다물고 자신들의 부푼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 * *
강호맹의 인사들은 한라검문과 해도문 문주들의 수행을 받고서 시우의 연구소를 떠나고 있었다.
“나 때문이라면 굳이 안 가도 돼.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 때문에 세상 다 산 것처럼 굴지 않을 테니까.”
우빈의 말에 시우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공을 가진 사람들도 네 힘에는 미치지 못하잖아? 그렇다면 난 내공의 도움 없이 너를 뛰어넘을 만큼 실력을 키우겠어.”
모두가 우빈의 말에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스스로의 부끄러움 때문에 말을 내뱉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시우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넘볼 수 없는 존재.
뛰어넘을 수 없는 절대적 존재.
한두 사람이 아닌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다들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한계에 만족하기 시작했으리라.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연무장에서 밤을 새우며 연무를 하는 이들이 줄었고, 손과 발을 맞추며 합격진을 연구하는 이들도 줄었다.
우빈의 말은 그런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를 뛰어넘으려면 백 년의 시간 가지곤 부족해. 더구나 내공도 없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힘들고.”
“…….”
우빈은 시우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 한편 강호맹이 과연 어떤 함정을 파둘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놈들의 속셈을 알고도 들어가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셨지요?”
“그래, 순순히 포기할 것 같지 않더구나.”
“강한 자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약자의 무기를 무서워하는 법이지요. 어차피 중국과의 격돌은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중국으로 들어가고자 한 것이냐?”
“이번 전투로 우린 너무 많은 힘을 잃었습니다. 또다시 적들을 끌고 들어와 맞붙는다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하겠지요. 더구나 이번 상대의 숫자는 야토가미의 몇 배나 됩니다. 단순히 상대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추느냐 아니냐로 판이 갈리는 싸움이 아니지요.”
“하지만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들 안에 둘러싸이기라도 한다면.”
남궁혜자의 말에 시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하하, 그렇지. 역시 네놈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게로구나. 저들은 모르고 한 행동이겠지?”
“아마 그랬으니 선뜻 저희를 불러들였겠지요.”
“자신의 목장 안에 닭 한 마리를 몰아넣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겠구나.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날개달린 호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선하구나.”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남궁세가는 괜찮습니까?”
“어차피 강호맹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인 가문이다. 더욱 주의하여 참견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놓겠다.”
“감사합니다.”
“강호맹의 늙은 호랑이들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하루빨리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