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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아는 천천히 걸어오는 시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남궁 선배님께서, 시우 님을 정가의 사위로 들이실 거라고 하셨는데. 시우 님도 그럴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세아가 생글거리며 묻자, 시우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쓸데없는 소리.”
“우빈이가 자신이 익힌 검은 무인들이라면 꿈에서라도 바랄 법한 지고지순한 경지의 검법이라고 하던데. 그런 검법까지 받으면 소빈 양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전우로서 준다고 이야기했어.”
“시우 님은 여인의 마음에 대해선 모르시는군요.”
“관주가 오늘따라 이상한 데 호기심을 갖는군.”
“어쩌면 연적이 될지도 모르는데. 시우 님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
세아의 말에 시우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세아는 여전히 생글 웃으며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흠흠.”
세아의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곽동원이 머쓱한지 헛기침을 내뱉자 그제야 두 사람의 시선이 곽동원에게 돌아갔다.
“자리를 피해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관주는 날 놀리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니까.”
“그렇습니까?”
세아는 시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다가 말했다.
“소녀 정말 궁금하네요. 아무리 시우 님께 별거 아닌 것이라 하여도 보물은 보물. 어찌하여 그것을 나누시는 건가요?”
“…….”
곽동원도 궁금하다는 듯 시우를 바라봤다.
“더구나 다른 문파에도 각기 다른 것들을 선물하셨죠?”
시우는 이번 전투에 참전한 모든 곳을 돌며, 그들에게 필요할 만한 것들을 하나씩 선물했다.
마력 응축기를 선물 받은 곳도 있고, 특수한 처리가 된 무기나 도구를 받은 곳도 있었다.
백면궁의 무공을 선사 받은 곳도 있었고, 차후의 문파 재건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은 곳도 있었다.
“전리품을 나눠 갖는 건 전투의 즐거움이니까.”
“전리품이요?”
“그래, 전투에 이겼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 단지 신의나 충성, 명예 등에 멈추지 않는 실리적인 무언가가.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거야. 어리석은 국가는 참전 용사에게 명예와 충성을 강요하고, 지혜로운 국가는 참전 용사에게 실리적 이익과 대우를 보장하지. 참된 충성심이란 건 거기에서 나오는 거야.”
시우의 이야기에 한세아와 곽동원은 고개를 절로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투로 피해가 막심한 문파와 무인들이 많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은 차지하고라도 손과 발을 잃어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단지 치료와 보상이라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자부심을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그런 실리적인 것들. 보상 이상의 소중한 무언가를 얻는 이들의 마음속엔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충성과 자부심이라는 나무가 절로 자라는 것은 당연한 바였다.
“역시 한국 상계를 이끌만한 분은 시우 님밖에 없습니다.”
“원래는 팀장님이 해야 할 일이었죠. 말 몇 마디로 떠넘길 생각 하지 마세요.”
“능력이 안 되는 저는 그저 보좌하는 것에 만족하겠습니다.”
“이번 전투로 부상이 심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되는 거죠?”
“국가 차원에서 연금을 조성해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할 겁니다. 그런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태백 정가와 저희 미화관도 연금 조성에 함께 참여하기로 했어요. 한국 상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공동 이사진을 출범해서 연금이 다른 곳으로 쓰일 일 없게 할거고요.”
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시우가 곽동원을 보며 물었다.
“좋아. 제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죠?”
곽동원은 자신이 가져온 파일을 시우에게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말씀하신 대로, 한라검문과 해도문의 문주들이 강호맹으로 갔었습니다. 전 처음엔 소환당한 건가 했는데, 시우 님의 말대로 그게 아니었더군요.”
“강호맹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추적을 했나요?”
“그게, 추적 중간에 놓쳤습니다.”
“놓쳐요?”
“그게 워낙에 은밀하게 움직이던 자들이라. 아직 인원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저희 인력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곽동원의 말에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근데 그들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어디서요?”
“강호맹입니다. 이번 육존출맹에 그들이 함께 동행하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시우는 곽동원이 건넨 서류 안에서 강호맹의 인사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들과 한라검문과 해도문의 문주들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웃고 있네요?”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니, 근심이 없어 보여서. 그럼 이번 회담에 참석하는 건가요, 이들도?”
“사실 그것 때문에 말씀드릴 것이 있었습니다.”
“말하세요.”
시우의 말에 곽동원은 잠시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이번 회담에 강호맹의 무인들과 함께 방문하겠다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뭐, 그들이 단독으로 올 일은 없으니 수행원이라든가 호위 등을 붙였겠지요?”
“단순히 호위나 수행원의 수준이 아닙니다.”
“그럼요?”
“육천의 인원이 이곳에 함께 하겠다고 통보해왔습니다.”
“육천?”
육천이라는 숫자에 시우의 음성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회담이 아니라 전쟁을 하자는 것인가?”
“물론 전 절대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만, 강호맹에선 자신들의 육존출맹을 이야기하면서 육존의 호위로 그 정도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그래서요?”
“일단은 육천의 숫자가 이곳에 오는 것은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고, 그들도 인근 자신들의 숙소에서 대기하겠다는 이야기는 전해 왔습니다만, 최소 호위 인원으로 백 명은 동반하겠다는 뜻을 전해 왔습니다.”
“하하.”
시우가 비웃음 가득한 웃음을 터트리자 곽동원은 이후의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전전긍긍했다.
그때 세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우 님, 곽 팀장님께서 아직 더 할 얘기가 있으신 거 같아요.”
“뭐죠?”
“한라검문과 해도문이 이번 회담의 중계자로 참석하겠다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자신들의 문도들과 함께.”
곽동원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시우가 입을 열었다.
“그쪽 인원은?”
“각기 이백씩, 총 사백입니다.”
“그들은 왜 그 많은 인원을 데려온다는 거죠?”
“같은 한국 상계의 소속 인원으로서 자신들이 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입니다.”
“뻔뻔하네요.”
세아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럼 총 오백의 인원이 이곳에 발을 디디겠다는 거군요.”
“…….”
“무력시위라도 하겠다는 걸까요?”
“주 의제는 야토가미에 대한 것이리라 생각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저희가 승리함으로써 그들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대비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관주는 어떻게 생각하지?”
“단지 무력시위로서 끝날 것 같지는 않아요. 단지 시위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힘을 드러낸다는 것은 결국 싸우고 싶어 하고 그 싸움으로 인해서 무언 갈 얻어가려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해요.”
세아의 이야기를 듣던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 측의 전투 가능 인원이 얼마나 되죠?”
“경상 환자들을 포함 시켜도 삼백이 조금 안됩니다.”
“그렇군.”
“어찌해야 할까요? 불편하시다면 참석 인원을 줄이는 것으로 조정해 보겠습니다.”
“아니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세요.”
“원하는 대로 말입니까?”
곽동원의 말에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주 원하는 대로는 안 되겠지만 말이죠.”
* * *
세아와 곽동원을 뒤로한 시우는 곧장 연구소 지하로 향했다.
연구소로 들어서자 야구공만 한 구형의 기체가 시우의 옆을 따라붙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스터.]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시우는 지하 연구소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크린에는 지구인들은 알 수 없는 룬어와 마법 도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상당히 강한 금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저들의 능력을 분석하려면 실험체의 신체에 무리가 갈 수도 있습니다.]
시우는 고개를 돌려 벽면에 고정되어 잠들어 있는 야토가미의 음양사들과 귀무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스크린을 바라보던 시우가 다시금 물었다.
“곽동원 팀장에게 받은 주술 관련 자료에 대해선 해석이 다 끝났나?”
[연구소 일대에 상주하고 있는 주술사분들을 통해 완벽하게 해석했습니다. 어떤 자료가 필요하십니까?”
“현재의 주술로 야토가미의 금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야토가미의 귀술은 근원이 다르기 때문에 풀 수 없습니다.]
“한국 상계의 주술사들 수준에 두 배에 달하는 주술사라면?”
[풀 수 없습니다.]
“그 귀신 얼굴을 한 놈이 꽤 대단한 놈인 거 같네.”
[마지막에 사용한 주술은 제가 있던 곳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겠지. 영혼 이동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해 본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야토가미의 귀술이 효용성은 있지만 마스터의 능력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실체와 령체의 전환되는 그 기능은 마법에 접목하면 꽤 재미난 일이 벌어질 거 같아서.”
[실험체에 대한 기본 보호만 풀어 주시면 전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우는 빌리언트의 말에 잠시 야토가미의 인들을 보다 입을 열었다.
“해석해. 어차피 우릴 죽이러 왔던 놈들이야. 살려서 되돌려 보낼 생각 없어.”
[포로들 모두를 사용할까요?]
“아니, 절반은 남겨둬. 거래용으로 써야 하니까.”
[예쓰. 마스터]
야구공만 한 구체는 스크린 아래의 기판에 끼워졌다.
구체가 기판에 끼워지자 스크린이 빠른 속도로 화면을 바꾸기 시작했고, 벽면에 매달린 야토가미의 인원들은 고통스런 신음을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 * *
“여기부턴 걸어가셔야 합니다.”
안내인의 말에 한종수가 그 우락부락한 얼굴을 잔뜩 구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한라검문 문주 한종수라고 몇 번을 말해!!”
“알고 있습니다. 함께 오신 분들도 알고 있고요.”
“그걸 아는 놈이 걸어가라고?! 너 뭐야!”
“전 이곳 관리 책임자 김준상입니다.”
“됐고! 책임자 나오라 그래!”
“제가 책임자입니다.”
“너 말고 너보다 더 높은 놈! 아니지, 이곳이 미화관 그 계집이랑 연관 있는 곳이라 했지? 그년 나오라 그래!”
한종수의 이야기에 김준상의 분위기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적당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뭐야!”
김준상이 기운을 퍼트리자 뒤에 섰던 장만재가 나섰다.
“오늘의 회담이 한국 상계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나? 이번 회담으로 한국 상계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음인데, 그런 중요한 손님을 모신 자리에서 걸어 들어가라니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장만재가 차갑게 이야기하자, 한종수를 응시하던 김준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말했다.
“두 분을 비롯한 강호맹의 손님들께서 이끌고 오는 대단위 인원 때문에 장내의 교통 혼잡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부득이하게 걸어오시도록 결정한 겁니다.”
“좋아,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걸어가라 하고, VIP만 차로 모시도록 하지.”
“모.든.인.원. 걸어오라는 특별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김준상의 말에 더 이상 인내심이 남아나지 않았던 장만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최시우 님께서 내리신 특별지시입니다.”
김준상의 말에 한종수가 이를 갈았다.
“최시우!”
“그 애송이가!”
장만재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부턴 걸어가셔야 할 거 같습니다.”
장만재와 한종수가 더 이상 겸손할 수 없는 자세로 자동차 창문 너머 냉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원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두 분께서 한국 상계를 이끌 분들이라 생각하여 강호맹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건데. 이거 참 그동안 헛짓거리를 한 건 아닌지 심히 고민이 되는군요.”
진문형의 이야기에 한종수와 장만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어쩔 수 없지요. 주인이 객을 이리 대한다면 객은 그저 따를 수밖에 오랜만에 산책도 할 겸 좀 걸어 보도록 하지요.”
진문형의 말을 끝으로 긴 리무진의 문이 열리고, 강호맹을 이끄는 여섯 명의 무인과 그들을 호위하려고 함께 온 백여 명의 무인들이 연구소 입구에 섰다.
“어디, 그 잘난 한국 상계의 인물들을 보러 가 볼까?”
“호오. 저자도 꽤 재미난 힘을 익히고 있는 것 같군요. 염화지기인 건가?”
점창의 정산명이 김준상을 보며 턱을 쓸었고, 그 이야기를 듣던 김준상이 움찔거렸다.
“이렇게 우릴 걷게 하는 건 뭔가 대단한 것을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명백하겠지요?”
“훗! 그래봤자 한국 상계다. 뭐 건물이나 조막만 한 연무장을 자랑하고 싶은 거겠지.”
“잔디 하나는 잘 깔려 있군요.”
“하하하하.”
육존과 그들의 옆에서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두 사람이 앞서 걷고, 그 뒤로 오백의 대인원이 따르고 있었다.
“호오! 저것 좀 보십시오. 꽤 큰 석상 같군요.”
“내 취향이군. 우리 마교에도 몇 개 가져다 놓으면 좋을 것 같군. 어이 한국 놈들. 저런 것을 만드는 장인을 알고 있나?”
혁련무궁의 말에 한종수가 길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제가 여기 관리자 놈을 꼭 족쳐서라도 알아내겠습니다.”
“좋아. 근데 저 뿔은 마음에 안 드는군. 너무 많아.”
혁련무궁이 검을 뽑아 검기를 날렸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간 검기가 목표물에 닿기 직전 목표물이 스윽 움직이며 검기를 피했다.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석상이 살기를 뿌리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호맹의 인원들은 갑자기 커다란 석상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졸도할 지경이었다.
“헉! 대, 대체!”
“서, 석상이 아니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