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태백가의 사람들의 회복상태를 파악하고 돌아오던 정형진과 정순지는 건물 한쪽에 가만히 서서 한쪽을 주시하는 남궁혜자를 발견하고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정형진과 정순지는 자신들이 이르렀음에도 말없이 한 곳을 주시하는 남궁혜자를 보며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연무장 위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소빈이 있었다.
“저 아이가 어찌, 아직 회복도 다 되지 않았을 것을.”
정형진이 앞서 나가며 소빈을 말리려 하자 정순지가 형진을 막았다.
“잠시 두고 보자. 저 아이가 이번 전투에서 뭔갈 얻었나 보구나.”
“예? 그게 무슨.”
정형진은 그제야 정신을 집중하고 소빈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힘이 없었고, 기운차지 못했다. 초식도 없는 엉망인 자세에 뭐가 볼 게 있나 했던 그의 시선은 점점 그녀의 움직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과연 저 검무가 태백 정가에 있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을 새도 없었다.
그렇게 소빈의 검무에 취해있던 정형진은 자신의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에 점점 정신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어머니, 어떻게 보십니까?”
“아마, 그 아이의 것이 아닌가 싶다.”
“시우 군 말씀이십니까?”
“…….”
정순지의 말에 남궁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돌아온 우빈이가 꽤 재미난 검을 익혀 왔더구나. 시우 녀석이 펼쳤던 검과는 다르지만 그것과 매우 유사했지. 지금 소빈이가 펼치는 검은 그것인 거 같구나.”
“그렇다는 건…….”
정순지와 정형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다른 이의 무공을 함부로 익히는 대가가 얼마나 큰지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 말려야 합니다. 아무리 동맹의 관계라 하여도 이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형진이 나서려 했지만 남궁혜자의 말이 더 빨랐다.
“이미 늦었다. 녀석이 결국 봐버렸구나.”
정형진과 정순지의 눈에 차가운 얼굴로 연무장에 오르는 시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괜히 나서지 말거라. 너희들이 나서면 일이 더욱 커질 터이니.”
정형진과 정순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초조한 마음으로 소빈과 시우를 바라보았다.
몰아의 깨달음 속에 헤엄치던 소빈이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섰을 땐 세상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발을 비척거리고 빙글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다잡기 위해 머리를 부여잡았다.
몇 번의 눈을 끔뻑이며 눈을 떴을 땐 그녀의 눈앞에 시우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우를 바라보는 소빈의 심정은 덜컥 내려앉았다.
시우가 붕권을 흉내 낸 것만으로도 경을 첬던 태백 정가였다. 거기에 더불어 자신은 시우에게 무참히 짓밟힌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그의 뒤를 쳤었다.
최시우는 그 이후에도 자신에게 불편한 감정을 내비친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엔 언제나 그 불편함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와 불편함을 풀기도 전에 그의 무공을 훔쳐 시연하는 모습까지 보였으니 지금의 당황스러움은 그녀가 풀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상태였다.
“아, 저…… 그게…….”
“방금 보여준 검은 우빈이에게서 배운 건가요?”
“아, 아니요. 전투 중에 잠깐 보고서……. 죄, 죄송합니다.”
소빈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지만 시우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소빈은 차가운 시우의 반응에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남의 무공은 함부로 따라 하지 않는 것이 상계의 불문율임에도 욕심이 앞서 이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만약 벌을 내리고 싶으시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소빈은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꾸욱 참아 넘겼다.
억울함이나 자존심이 상해서 마음이 슬픈 것이 아니었다.
시우는 몇 번이나 태백 정가를 도왔고,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 주었다.
그럼에도 여태껏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나 마음을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그녀를 서글프게 했다.
“그 검을 제가 봐도 될까요?”
시우가 얘기하자 소빈이 놀란 눈빛으로 자신도 모르게 검을 내밀었다.
소빈의 손 위에 있던 검은 스르르 날아 시우의 손에 가볍게 쥐어졌다.
“좋은 검이네요.”
시우는 검의 무게를 가늠해 보고 이리저리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빈이가 익힌 검은 천살지존이라는 이가 남긴 천살지존검법입니다.”
가볍게 휘두르던 시우의 검이 점점 묵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우빈이는 현재 단전이 없는 관계로 강력한 살기를 받아들일 만한 신체를 갖지 못했기에 그 안에 자연경에 대한 요체만을 빼서 알려줬지요.”
시우의 검이 조금씩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의 검날은 부챗살처럼 펴졌다가 다시 하나의 검으로 모이고, 반월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작은 내공으로도 압도적인 파괴력을 선보일 수 있는 자연경의 요체는 실리적으로 효과는 있지만 깊이까지는 가질 수 없습니다.”
반월을 그리던 그의 검이 사방을 점하고, 팔방을 지배하며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속도는 묵직함이 있던 초반에 비해 훨씬 빨라졌지만, 검 끝에서 소리는 나지 않았다.
“진짜로 자신의 수준을 올리기 위해선 요체를 습득하여 심득으로 만들고 깨달음으로 자신의 벽을 부숴야 합니다.”
팔방을 가득 채우던 시우의 검이 십육 방, 삼십이 방, 육십사 방까지 퍼져나갔다.
연무장의 허공에는 실제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검의 그림자가 가득 메웠고, 쏟아지는 달빛마저도 검날에 베어 사라질 듯했다.
“그리고 이 검의 진정한 요체는 천살지존의 검안에 있죠.”
세상을 가득 메우던 검날들 하나하나에서 광폭한 살기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압력처럼 달려드는 살기들은 소빈이 마셔야 할 공기마자 증발시킨 듯 소빈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정순함으론 한반도의 다른 문파들과 비교할 수 없다는 태백기가 스스로 뻗어 나오며 소빈의 몸을 보호하려 했지만, 단순한 보호의 행동이었음에도 천살지존의 살기는 소빈 내부에서 움직이는 태백기를 찍어 누르고 흩뜨려 버렸다.
“크헉!”
살기를 버티지 못한 소빈이 울컥거리며 검은 핏덩이를 토해냈다.
아직 회복되지 못한 몸을 가진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내뱉었다.
“할머님!”
연무장 위를 날카로운 검들이 빽빽하게 메우자 정형진의 음성이 급박해졌다.
“…….”
검들 중 일부가 위협적으로 소빈의 머리카락 몇 개를 자르고 있었지만 남궁혜자와 정순지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제가 나서서 용서를 빌겠습니다.”
“…….”
“…….”
시우가 펼친 검들이 강력한 살기를 내뿜자 형진을 바라보던 남궁혜자와 정순지도 깜짝 놀라 시우를 바라보았다.
연무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검초들의 살기는 고수 중에서도 고수 급에 올랐다는 남궁혜자와 정순지를 심히 압박하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런 살기 속에 소빈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에 형진은 애가 탈 뿐이었다.
“제가 가서 팔이든 목이든 내놓겠습니다.”
정형진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자 남궁혜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정순지는 정형진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무장을 가득 메우던 검초 들이 살기등등하게 내리쳐져 소빈의 몸을 관통하자 남궁혜자의 손이 형진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소빈아!”
검형들이 소빈의 몸을 관통하자 정형진은 그만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고, 남궁혜자는 재빨리 마혈을 집어 정형진을 제압했다.
마혈이 집혔음에도 정형진의 몸은 계속 움찔거렸다.
“허어, 허어, 허어.”
검은 핏물을 가득 내뿜은 소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내뱉은 핏물들을 바라보았다.
속이 한결 편하고, 기운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짓누르던 피로와 부상의 후유증이 가시고 한껏 수련한 후처럼 개운한 느낌이었다.
소빈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제가 내공심법에는 조예가 깊지 못해. 이 정도밖에는 해드릴 수가 없네요.”
소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몸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막혀있던 혈들이 타동되고, 뚫지 못했던 세맥들에 내공이 흘러넘쳤다.
연무장에 감도는 밀도 높은 에너지는 소빈의 숨결 따라 단전으로 들어와 내공으로 쌓였고, 쌓인 내공은 온몸을 휘저으며 기운을 복돋았다.
“어, 어떻게.”
“마법사로서의 작은 재주 중 하나예요.”
시우는 검을 소빈에게 넘겨주며 말을 이어갔다.
“누님께는 자연경의 요체보다는 천살지존의 심득을 직접 익히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제가 알려드린 것들을 다른 이에게 전하지 않는다. 약속하시면 천살지존의 심득을 드리겠습니다.”
시우의 말에 소빈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시우는 품속에서 포션 두 개를 꺼내어 소빈에게 건넸다.
포션을 받아든 소빈은 포션을 바라보다 시우를 보고 물었다.
“어찌 제게 그런 것을 주려 하시나요?”
소빈의 눈은 어쩐지 기대에 가득 찬 듯 똘망똘망하게 빛이 났다.
“함께 싸운 전우지 않습니까. 전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전우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소빈이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소빈은 어쩐지 시우가 한 이야기가 입에 계속 맴돌았다.
“전우…….”
시우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소빈을 기다려 주었다.
“초식은 방금 보았고, 구결만 알려드리면 되겠죠?”
소빈은 정신을 퍼뜩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저,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그런데 초식도 다시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말 편히 하셔도 돼요. 우빈이 누나신데.”
“아뇨, 전 이게 편해요.”
시우의 말에 소빈은 고개를 절레 저으며 말했다.
“먼저 그것부터 드세요. 빠른 시간 안에 초식과 구결을 익히려면 체력부터 회복해야죠.”
시우의 말에 소빈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포션을 마시기 시작했다.
소빈이 준비가 되자 시우는 구결부터 천천히 읊어주기 시작했다.
소빈은 몇 번이나 구결에 대해 다시 물었고, 시우는 그때마다 불편한 표정 없이 다시 이야기 해주었다.
두 사람의 수업은 밤새 계속되었다.
* * *
소빈이 핏물을 토하며 쓰러질 때, 정형진은 마혈을 억지로 푸느라 내공이 뒤틀리고 근육이 파열될 지경이었다. 눈에는 핏줄이 생겨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검형들이 연무장에서 사라지고, 검형에 공격당했던 소빈이 핏물을 토한 것 외에는 외상이 보이지 않자 정형진의 흥분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위기는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시우는 포션을 넘겨주고 소빈은 그런 시우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 이 어찌?”
황망해하는 정형진을 보고 남궁혜자가 입을 열었다.
“아침이 되면, 좋은 선물을 가지고 시우에게 가거라.”
“예?”
“지금 저 아이가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남궁혜자의 이야기에 정형진이 이력(耳力)을 돋었다.
-제가 알려드린 것들을 다른 이에게 전하지 않는다. 약속하시면 천살지존의 심득을 드리겠습니다.
“헙!”
정형진은 자신이 들은 것에 자신도 모르게 놀라며 숨을 내뱉었다.
“아마도 우리 집안에서 검후가 날지도 모르겠구나.”
“허허, 홍복입니다. 홍복.”
남궁혜자와 정순지가 허허롭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와중에도 형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형진이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소빈이가 왜 몇 번씩이나 초식을 다시 보여달라고 하는 걸까요? 역시나 어려운 걸까요?”
시우의 뜻을 생각해 이력을 닫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행동만 보던 정형진이 몇 번이나 초식을 틀리며 시우에게 다시 보여 달라하고 초식이 틀릴 때마다 시우에게 교정받는 소빈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남궁혜자가 한숨을 내쉬었고, 정순지도 한심한 눈으로 형진을 바라보았다.
“쯧쯧, 저 눈치로 어찌 결혼은 해서 애는 낳았을 고?”
“큰 며느리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습니다. 참으로 눈치는 없는 녀석이라고.”
정형진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떠하냐? 내 소빈이의 남편으로 저 녀석을 생각하는데.”
“시우 군은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던데요.”
“뭐 아직 젊지 않느냐. 요즘은 금방 만나고 헤어진다고 하던데.”
“어머님은 저보다 더 신세대시군요.”
두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가자 정형진은 그제야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예?!”